스바냐
2011.01.23 17:14

(4강) 수치를 알자

조회 수 4116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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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 3:1-8http://onlycross.net/videos/zep/zep-030108.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 패역하고 더러운 곳, 포학한 그 성읍이 화 있을진저

2 그가 명령을 듣지 아니하며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의뢰하지 아니하며 자기 하나님에게 가까이 나아가지 아니하였도다

3 그 가운데 방백들은 부르짖는 사자요 그의 재판장들은 이튿날까지 남겨 두는 것이 없는 저녁 이리요

4 그의 선지자들은 경솔하고 간사한 사람들이요 그의 제사장들은 성소를 더럽히고 율법을 범하였도다

5 그 가운데에 계시는 여호와는 의로우사 불의를 행하지 아니하시고 아침마다 빠짐없이 자기의 공의를 비추시거늘 불의한 자는 수치를 알지 못하는도다

6 내가 여러 나라를 끊어 버렸으므로 그들의 망대가 파괴되었고 내가 그들의 거리를 비게 하여 지나는 자가 없게 하였으므로 그들의 모든 성읍이 황폐하며 사람이 없으며 거주할 자가 없게 되었느니라

7 내가 이르기를 너는 오직 나를 경외하고 교훈을 받으라 그리하면 내가 형벌을 내리기로 정하기는 하였지만 너의 거처가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나 그들이 부지런히 그들의 모든 행위를 더럽게 하였느니라

8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므로 내가 일어나 벌할 날까지 너희는 나를 기다리라 내가 뜻을 정하고 나의 분노와 모든 진노를 쏟으려고 여러 나라를 소집하며 왕국들을 모으리라 온 땅이 나의 질투의 불에 소멸되리라

 

 

<설교>

람은 자신의 죄가 타인들 앞에서 드러났을 때 수치를 느낍니다. 하지만 그것은 죄가 있는 자신을 수치스럽게 생각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죄로 인해서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가 드러났다는 사실로 수치스러워 하는 것입니다. 만약 사람이 죄가 있는 자신을 수치스러워 한다면 타인이 자신의 죄를 알든 모르든 상관없이 항상 자신을 수치스러운 존재로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자신을 깨끗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비록 착한 일을 한다고 해도 여전히 자기 안에 있는 죄를 보기 때문에 착한 일도 자신을 죄 없는 깨끗한 자로 만들 수 없음을 절감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의 모든 죄를 덮으시기 위해 십자가에 피 흘리신 주님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죄의 무게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살인죄와 도둑질의 무게가 다르다는 것이 죄에 대한 우리의 생각입니다. 물론 행위적인 면에서 본다면 살인죄와 도둑질의 무게는 다릅니다. 그래서 법정에서도 각기 다른 형벌을 내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죄의 본질을 따지게 되면 결국 모두가 동일하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도둑질의 본질이 탐욕이고, 살인의 본질이 미움이고 분노라고 한다면 탐욕이 있고 미움과 분노가 있는 모든 사람들은 도둑질을 하고 살인을 저지른 사람과 같은 범주에 속하게 됩니다. 이것이 성경에 말하는 죄에 대한 시각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본질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소홀합니다. 롬 1:32절을 보면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언급하는데 그 죄는 불의, 추악, 탐욕, 악의,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 수군수군 등등입니다. 우리가 볼 때는 아무것도 아닌 것들인데 성경은 그것을 사형에 해당하는 죄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모두가 사형판결을 받아야 하는 악인들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를 악인이라고 할 때, 악인이라는 말이 사실 실감 있게 다가오지 않습니다. 스스로를 그렇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사형에 해당한 것으로 말씀한 죄를 가볍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형에 해당하는 모든 죄가 우리에게 가득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수치스러운 존재로 보지 않는 것입니다.

 

 

1,2절을 보면 “패역하고 더러운 곳, 포학한 그 성읍이 화 있을진저 그가 명령을 듣지 아니하며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의뢰하지 아니하며 자기 하나님에게 가까이 나아가지 아니하였도다”고 말합니다.

 

 

패역하고 포악하고 더러운 곳으로 말하는 성은 예루살렘성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예루살렘 성은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곳으로 유다에게는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의 중심지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제사하는 성전이 있기 때문에 제사와 연관된 모든 사람이 집결해 있는 곳이기도 하고, 율법을 연구하는 사람들과 백성을 신앙으로 지도하는 역할을 하는 모든 사람들이 있습니다. 즉 제사장과 서기관 장로와 같은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에 모여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루살렘 성은 다른 성보다 더 신앙적인 면에서 뛰어나야 하고 하나님의 칭찬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쉽게 말해서 목사와 장로, 신학박사, 소위 믿음 좋다는 사람들만 모여 있는 성이라면 다른 성과는 달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성을 패역하고 더럽고 포악하다고 말씀합니다.

 

 

그 이유는 3,4절의 내용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방백들은 예루살렘의 지도자로써 귀족들을 뜻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지도자라면 백성들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정의와 공평으로 다스려야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먹이를 찾아다니며 부르짖는 사자처럼 자기 배를 채우는 일에만 급급했습니다.

 

 

재판장들은 이튿날까지 남겨두는 것이 없는 저녁이리라고 말합니다. 오로지 자기 탐욕을 위해 재판을 했다는 것입니다.  선지자들은 경솔하고 간사했습니다. 신실하게 하나님의 말씀만을 전해야 할 사람들이 백성들의 눈치를 보면서 그들의 귀를 즐겁게 하는 말을 전했던 것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제사장들이 성소를 더럽히고 율법을 범했다는 것도 하나님께 제사하면서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을 전하고 알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역시 제사를 이용해서 자기 배를 채우는 일에만 급급한 것을 뜻합니다.

 

 

이처럼 예루살렘 성은 방백부터 제사장까지 오직 자기 배를 채우는 일에만 관심을 두었을 뿐 하나님께는 전혀 마음을 두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상태를 두고 패역하고 포악하고 더럽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하여 우리를 살펴본다면 우리 역시 패역하고 포악하고 더러운 자라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보다는 나에게만 마음을 두고 살아가는 것이 곧 탐욕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얼마나 수치스러운 존재인가를 전혀 알지 못하고 깨끗한 척하고 살아가는 그것이 패역과 포악과 더러움에 해당되는 악이라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은 화를 피할 수가 없습니다. 예루살렘 성의 운명이 그와 같다면 동일하게 패역과 포악과 더러움의 상태에 있는 모든 것 역시 화를 피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역시 예외는 아닙니다.

 

 

그런데도 정작 우리는 자신에 대해 심각한 마음을 갖지 않습니다. 패역이나 포악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사람에게 탐욕이 있고, 시기가 있고, 분노가 있고, 때로 수군거리기도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 그것을 가지고 패역하다 하고 포악하다고 할 수 있느냐는 인식만 강합니다.

 

 

5절을 보면 “그 가운데에 계시는 여호와는 의로우사 불의를 행하지 아니하시고 아침마다 빠짐없이 자기의 공의를 비추시거늘 불의한 자는 수치를 알지 못하는도다”고 말합니다.

 

 

여호와는 의로우시고 불의를 행하지 않으시며 아침 마다 자기 공의를 비추시는 분입니다. 이처럼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불의한 자가 서게 되면 자기 수치를 알게 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불의한 자임에도 불구하고 자기 수치를 알지 못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사람들이 자기 의에 취해 살면서 하나님의 의를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의와 거룩하심 앞에 인간의 의가 얼마나 보잘 것 없으며, 인간의 의를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거룩을 멸시하는 패역임을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에게 하나님은 “내가 이르기를 너는 오직 나를 경외하고 교훈을 받으라 그리하면 내가 형벌을 내리기로 정하기는 하였지만 너의 거처가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나 그들이 부지런히 그들의 모든 행위를 더럽게 하였느니라”(7절)고 말씀합니다.

 

 

패역하고 포악하고 더러운 자에게 형벌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형벌을 정하기는 하셨지만 거처가 끊어지지 않게 하시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오직 하나님만을 경외하고 교훈을 받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신자가 자기 수치를 알고, 자신에게 정해진 것이 형벌이라는 것을 자각했을 때 있게 됩니다. 형벌이 당연한 자신을 건지시고 거처가 끊어지지 않는 복에 거하도록 하기 위해 예수님을 보내셨음을 생각한다면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경외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죄를 알고 자신의 수치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