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바냐
2011.01.30 17:22

(5강) 기뻐하며 즐거워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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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 3:9-20http://onlycross.net/videos/zep/zep-030920.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9 그 때에 내가 여러 백성의 입술을 깨끗하게 하여 그들이 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한 가지로 나를 섬기게 하리니

10 내게 구하는 백성들 곧 내가 흩은 자의 딸이 구스 강 건너편에서부터 예물을 가지고 와서 내게 바칠지라

11 그 날에 네가 내게 범죄한 모든 행위로 말미암아 수치를 당하지 아니할 것은 그 때에 내가 네 가운데서 교만하여 자랑하는 자들을 제거하여 네가 나의 성산에서 다시는 교만하지 않게 할 것임이라

12 내가 곤고하고 가난한 백성을 네 가운데에 남겨 두리니 그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의탁하여 보호를 받을지라

13 이스라엘의 남은 자는 악을 행하지 아니하며 거짓을 말하지 아니하며 입에 거짓된 혀가 없으며 먹고 누울지라도 그들을 두렵게 할 자가 없으리라

14 시온의 딸아 노래할지어다 이스라엘아 기쁘게 부를지어다 예루살렘 딸아 전심으로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15 여호와가 네 형벌을 제거하였고 네 원수를 쫓아냈으며 이스라엘 왕 여호와가 네 가운데 계시니 네가 다시는 화를 당할까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이라

16 그 날에 사람이 예루살렘에 이르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시온아 네 손을 늘어뜨리지 말라

17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18 내가 절기로 말미암아 근심하는 자들을 모으리니 그들은 네게 속한 자라 그들에게 지워진 짐이 치욕이 되었느니라

19 그 때에 내가 너를 괴롭게 하는 자를 다 벌하고 저는 자를 구원하며 쫓겨난 자를 모으며 온 세상에서 수욕 받는 자에게 칭찬과 명성을 얻게 하리라

20 내가 그 때에 너희를 이끌고 그 때에 너희를 모을지라 내가 너희 목전에서 너희의 사로잡힘을 돌이킬 때에 너희에게 천하 만민 가운데서 명성과 칭찬을 얻게 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설교>

선지자는 예루살렘 성을 패역하고 포악하며 더러운 것으로 화가 있을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그런데 14절에서는 “시온의 딸아 노래할지어다 이스라엘아 기쁘게 부를지어다 예루살렘 딸아 전심으로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라고 말하면서 기뻐하고 즐거워 할 이유를 여호와가 형벌을 제거하였고 원수를 쫓아내었으며 이스라엘 왕 여호와가 함께 하심으로 다시는 화를 당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으로 말합니다(15절). 이 내용만 보자면 유다는 분명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회복, 즉 구원을 선포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이 내용에서 한 가지 이상한 것은 심판과 구원 사이에 당연히 있어야 하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심판과 구원 사이에는 회개가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구원의 단계입니다. 즉 심판에서 구원으로 돌이킴 받을만한 조건이나 계기가 인간 쪽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지자의 외침은 아무런 조건과 계기가 없이 심판에서 갑작스럽게 구원으로 방향을 바꾸어 버립니다.

 

 

유다는 그들의 포악과 패역으로 인해서 멸망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여호와가 그들의 형벌을 제거하여 바벨론부터 해방되어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하십니다. 그 이유가 그들이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하면서 자신들의 죄를 뉘우치고 대대적인 회개 운동을 통하여 하나님을 감동하게 했기 때문이 아니라 유다의 그 어떤 조건도 보지 않으시고 돌아오게 하신 것입니다.

 

 

이 같은 하나님의 구원에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은 나의 구원으로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즉 나의 구원에 초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께 초점을 두게 하는 것이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구원이 인간이 가진 조건에 따라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알 것입니다. 인간은 심판이 마땅한 존재일 뿐입니다. 예수를 믿기 전이나 믿은 후나 이 같은 인간의 본질은 불변입니다. 예수를 믿기 전에는 심판이 마땅한 불의한 존재였는데 나중에 정신을 차리고 회개하고 예수를 믿어서 선한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심판을 취소하는 것은 없습니다.

 

 

9절에 보면 “그 때에 내가 여러 백성의 입술을 깨끗하게 하여 그들이 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한 가지로 나를 섬기게 하리니”라고 말합니다. 심판이 마땅한 유다 백성 안에서 입술이 깨끗하여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여호와를 섬기는 백성들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바로 하나님이 남기신 자들입니다.

 

 

이들 남은 자는 악을 행하지 않고 거짓을 말하지 않으며 입에 거짓된 혀가 없고 먹고 누울 지라도 두려워하는 것이 없는 사람들입니다(13절). 다시 말해서 오늘날 하나님이 택한 신자가 바로 이런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현대 교회에서 신자는 교회생활에 충실한 것으로 그 믿음과 신자 됨을 인정받지만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신자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먼저 신자는 9절의 말씀대로 깨끗한 입술로 여호와의 이름을 부릅니다. 깨끗한 입술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하나님은 예루살렘 성을 패역하고 포악하며 더럽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5절에 보면 불의한 자는 수치를 알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자신의 불의와 더러운 수치를 알지 못한 자의 입에서는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구하는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이것이 더러운 입술에 해당됩니다.

 

 

죄 있는 자가 자신의 죄를 보지 못하고 마치 죄 없는 자처럼 육신을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야 말로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입니다. 따라서 깨끗한 입술은 자신의 불의와 더러움을 보면서 자기 수치 됨을 고백하고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와 긍휼을 구하는 것입니다.

 

 

11절을 보면 “그 날에 네가 내게 범죄한 모든 행위로 말미암아 수치를 당하지 아니할 것은 그 때에 내가 네 가운데서 교만하여 자랑하는 자들을 제거하여 네가 나의 성산에서 다시는 교만하지 않게 할 것임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날에 범죄한 행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하시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으로 하여금 교만하지 않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곧 자기 수치를 바라보며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구원 받은 신자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에게는 자신의 더러움과 수치를 보면서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로 인해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이야 말로 신자다운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기쁨이 됩니다.

 

 

그런데 현대 교회는 오직 교회 운영에 도움이 되는 사람을 기뻐합니다. 그런 사람을 참된 신자로 인정합니다. 아무리 자기 수치를 알고 하나님의 용서를 구한다고 해도 교회 생활에 충실하지 못하면 믿음이 없는 것으로 여깁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을 알지 못한 교회의 실상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자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를 믿는 여러분의 현실이 어떠한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를 믿는 자로서 패역과, 포악과, 불의에서 벗어나 있습니까?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해도 우리 현실은 여전히 죄의 세력에 붙들려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수치스러운 존재인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의 현실을 잊는 순간 우리는 나의 것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영광 돌리겠다는 시도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은 점점 구원 받을 만한 사람으로 무장되어 갈 것입니다.

 

 

신자가 하나님의 구원으로 기뻐하고 즐거워 할 수 있으려면 인간의 실상인 죽음의 자리까지 내려가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너고 하나님의 구원을 찬양했던 것도 그들을 쫓아왔던 애굽 군대로 인해 죽음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죽었다’며 절망하고 모세를 원망하는 자리가지 내려갔을 때 그들 앞에 열리는 홍해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실감하기에 충분했습니다. 만약 쫓아오는 애굽 군대가 없었다면, 그래서 죽음을 실감하지 못했다면 홍해가 갈라진 사건은 단지 신기한 기적에 지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단지 나를 천국 보내기 위한 것으로 바라본다면 아직 죽음에 처한 자신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죄에서, 죽음이라는 형벌에서 우리를 건지신 십자가를 기쁨과 즐거움이 아닌 내 구원을 위한 사건으로만 여긴다면 신자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17절에 보면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기쁨을 이기지 못할 정도로 기뻐하시는 신자는 하나님이 베푸신 긍휼과 자비하심의 존귀함을 깨닫고 감사하고 즐거워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수치스러운 존재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예수님의 존귀한 피가 부어져서 깨끗하다고 일컬음 받게 되었습니다. 이 은혜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그가 바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신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