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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 1:1-15http://onlycross.net/videos/hag/hag-010115.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 다리오 왕 제이년 여섯째 달 곧 그 달 초하루에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학개로 말미암아 스알디엘의 아들 유다 총독 스룹바벨과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2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여 이르노라 이 백성이 말하기를 여호와의 전을 건축할 시기가 이르지 아니하였다 하느니라

3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학개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4 이 성전이 황폐하였거늘 너희가 이 때에 판벽한 집에 거주하는 것이 옳으냐

5 그러므로 이제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니 너희는 너희의 행위를 살필지니라

6 너희가 많이 뿌릴지라도 수확이 적으며 먹을지라도 배부르지 못하며 마실지라도 흡족하지 못하며 입어도 따뜻하지 못하며 일꾼이 삯을 받아도 그것을 구멍 뚫어진 전대에 넣음이 되느니라

7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니 너희는 자기의 행위를 살필지니라

8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성전을 건축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것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또 영광을 얻으리라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9 너희가 많은 것을 바랐으나 도리어 적었고 너희가 그것을 집으로 가져갔으나 내가 불어 버렸느니라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것이 무슨 까닭이냐 내 집은 황폐하였으되 너희는 각각 자기의 집을 짓기 위하여 빨랐음이라

10 그러므로 너희로 말미암아 하늘은 이슬을 그쳤고 땅은 산물을 그쳤으며

11 내가 이 땅과 산과 곡물과 새 포도주와 기름과 땅의 모든 소산과 사람과 가축과 손으로 수고하는 모든 일에 한재를 들게 하였느니라

12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과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남은 모든 백성이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와 선지자 학개의 말을 들었으니 이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를 보내셨음이라 백성이 다 여호와를 경외하매

13 그 때에 여호와의 사자 학개가 여호와의 위임을 받아 백성에게 말하여 이르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너희와 함께 하노라 하니라

14 여호와께서 스알디엘의 아들 유다 총독 스룹바벨의 마음과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마음과 남은 모든 백성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그들이 와서 만군의 여호와 그들의 하나님의 전 공사를 하였으니

15 그 때는 다리오 왕 제이년 여섯째 달 이십사일이었더라

 

 

<설교>

경에서 소선지서는 사람들에게 인기가 없습니다. 목사도 소선지서를 본문삼아 설교하는 것이 다른 성경에 비해 적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소선지서의 내용이 주로 죄와 심판에 대한 것으로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소선지서에도 목사들이 많이 사용하는 본문이 있습니다. 학개와 말라기입니다. 학개는 성전 건축을 독려하기 위한 본문으로 최상이고 말라기는 십일조를 강조하기 위한 본문으로 최상이기 때문입니다.

 

 

유다는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가 생활하다가 바벨론을 점령한 바사의 고레스에 의해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돌아온 그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무너진 성전을 다시 건축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성전건축을 중단하게 됩니다. 이유는 사마리아 사람들의 방해도 있었지만 그들 스스로 생각할 때 성전 건축이 자기들 형편에 너무 무리한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돌아온 그들의 생활은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일단 자신들의 형편이 안정이 된 후에 성전을 건축하기 위해 중단한 것입니다. 그리고 15년이 지났을 때 선지자 학개가 유다 총독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것입니다. 1절이 그 같은 배경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2절을 보면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여 이르노라 이 백성이 말하기를 여호와의 전을 건축할 시기가 이르지 아니하였다 하느니라”고 말합니다.

 

 

앞서 말한 대로 유다는 자신들의 형편이 어렵다는 이유로 성전건축을 중단하고 미뤘습니다. 따라서 여전히 성전 건축할 시기가 이르지 않았다고 한다면 그것은 그들의 형편이 여전히 어렵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4절에 보면 “이 성전이 황폐하였거늘 너희가 이 때에 판벽한 집에 거주하는 것이 옳으냐”라고 말합니다. 판벽한 집은 널판으로 장식한 호화로운 집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그들이 어려움을 이유로 성전 건축을 미루는 것은 성전 건축에 마음에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됩니다. 그들 마음이 여호와를 향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 본문을 ‘자기들은 좋은 집에 살면서 하나님은 초라한 집에 모시는 것이 옳으냐’라며 교인들을 예배당 건축에 끌어 들이는 용도로 이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더군다나 6절의 내용은 예배당 건축에 소홀히 하는 교인들을 경고하기 위한 내용으로는 안성맞춤입니다. 자기 집은 호화로우면서도 성전건축을 시기상조라며 미룬 유다 백성들이 무엇을 해도 수입이 적고 먹고 마시고 입어도 풍족하지 못할 것이라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학개 선지자의 말은 전혀 그런 내용이 아닙니다. 성경이 교인들의 호주머니를 털기 위해 기록된 것이 아닐뿐더러 하나님이 하고자 하신다면 사람이 돈을 내든 내지 않던 결국 하나님이 이루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의 주인이신데 성전건축을 위해 돈을 내지 않는다고 나무랄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5절을 보면 “그러므로 이제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니 너희는 너희의 행위를 살필지니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7절에서도 같은 말을 합니다. 자기 행위를 살피라는 것은 자신들의 행위를 보면서 과연 하나님에 대해 어떤 마음이며 하나님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를 살피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유다가 자신들에게서 살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6절을 보면 많이 뿌려도 수확이 적을 것이고 먹을지라도 배부르지 못하고 마실지라도 흡족하지 못하며 입어도 따뜻하지 못하며 일꾼이 삯을 받아도 그것을 구멍 뚫은 전대에 넣음이 된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이 내용을 성전 건축에 마음이 없는 백성들에 대한 징계의 말씀으로 생각하지만, 징계라면 차라리 아예 수확이 없어야 하고 먹고 마시고 입을 것도 없어야 하며 일꾼이 삯을 받지도 못하는 형편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보면 6절의 내용은 징계의 의미는 아닙니다.

 

 

6절은 인간은 무엇에도 만족하지 못하는 존재임을 말합니다. 사람은 먹고 마시고 입는 일에 만족하지 못합니다. 자신의 수확에도 만족하지 못합니다. 항상 더 주어지기를 원하고 더 좋은 것을 누리고 싶어 합니다. 작년에 천만 원 번 사람이 올해 이천만원 벌었다면 더 주어진 천만 원으로 감사하고 행복해하기보다는 내년에는 더 벌고자 하는 욕망으로 가득하게 될 뿐입니다. 결국 얼마를 벌어도 인간은 자기에게 주어진 것을 적은 것으로 여길 뿐입니다. 이것이 많이 뿌릴지라도 수확이 적을 것이라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 징계의 차원에서 수확을 줄이신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욕망이 주어진 수확을 스스로 적게 여긴다는 의미입니다. 그렇게 보면 하나님의 말씀은 성전 건축을 미루는 것을 책망한다기 보다는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지 못하는 것을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유다 백성이 자기 형편을 이유로 성전건축을 미룬다면 그만큼 자신의 삶에 열심을 내고 물질적으로도 아낀 것이 됩니다. 하지만 그 결과가 과연 무엇입니까? 더 풍족해진 삶으로 인해 감사하고 행복을 누립니까? 아닙니다. 여전히 자신에게 있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인간입니다.

 

 

말하자면 신자는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지 않고서는 현실에서 무엇을 누리고 산다고 해도 만족과 평강은 없다는 것입니다. 성전보다 자기 삶에 마음을 둔 것이 곧 자기를 향한 욕망으로 살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고 그처럼 자신을 향한 욕망으로 사는 사람에게 만족은 없는 것입니다.

 

 

만족과 평강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서만 주어지는 열매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자신의 모든 것을 맡기고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것에 감사하는 그것이 신자를 만족과 평강과 복된 삶으로 인도합니다. 100을 가지고 만족해하지 못하는 사람과 10을 가지고 만족해하고 감사하는 사람을 비교할 때 누가 더 풍성하고 행복한 사람인가를 따져 보면 답을 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성전은 단지 제사하는 용도의 건물이 아니라 자신의 죄를 깨닫고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를 누리기 위한 곳입니다. 따라서 그들이 성전 건축을 미루는 것은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아는 것보다는 자신의 삶을 풍성하게 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겼음을 뜻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자신의 삶의 풍성을 위해 애를 쓴다고 해도 인간은 만족할 수 없고 행복할 수 없습니다.오히려 행복과 평안은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아는 바른 관계에서 얻어진다는 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8절을 보면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성전을 건축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것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또 영광을 얻으리라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고 말합니다.

 

 

솔로몬의 성전은 레바논의 백향목으로 지었습니다. 금과 보석으로 장식하여 크고 화려했습니다. 유다 백성들은 아마 그때의 성전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산에 올라가 나무를 가져다가 성전을 건축하라고 합니다. 성전의 중요성은 무엇으로 지었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용서를 마음에 두고 하나님께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삶을 위해 힘쓰지 말라는 것은 아니지만 재물이 풍성해진다고 해서 행복해지는 것이 아님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풍성해도 우리는 부족하다고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자에게는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를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으며, 그 은혜가 우리를 평강과 풍성한 복으로 인도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