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개
2011.02.20 20:38

(3강) 오늘 이전을 기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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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 2:10-23http://onlycross.net/videos/hag/hag-021023.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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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0 다리오 왕 제이년 아홉째 달 이십사일에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학개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11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니 너는 제사장에게 율법에 대하여 물어 이르기를

12 사람이 옷자락에 거룩한 고기를 쌌는데 그 옷자락이 만일 떡에나 국에나 포도주에나 기름에나 다른 음식물에 닿았으면 그것이 성물이 되겠느냐 하라 학개가 물으매 제사장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아니니라 하는지라

13 학개가 이르되 시체를 만져서 부정하여진 자가 만일 그것들 가운데 하나를 만지면 그것이 부정하겠느냐 하니 제사장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부정하리라 하더라

14 이에 학개가 대답하여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에 내 앞에서 이 백성이 그러하고 이 나라가 그러하고 그들의 손의 모든 일도 그러하고 그들이 거기에서 드리는 것도 부정하니라

15 이제 원하건대 너희는 오늘부터 이전 곧 여호와의 전에 돌이 돌 위에 놓이지 아니하였던 때를 기억하라

16 그 때에는 이십 고르 곡식 더미에 이른즉 십 고르뿐이었고 포도즙 틀에 오십 고르를 길으러 이른즉 이십 고르뿐이었었느니라

17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희 손으로 지은 모든 일에 곡식을 마르게 하는 재앙과 깜부기 재앙과 우박으로 쳤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이키지 아니하였느니라

18 너희는 오늘 이전을 기억하라 아홉째 달 이십사일 곧 여호와의 성전 지대를 쌓던 날부터 기억하여 보라

19 곡식 종자가 아직도 창고에 있느냐 포도나무, 무화과나무, 석류나무, 감람나무에 열매가 맺지 못하였느니라 그러나 오늘부터는 내가 너희에게 복을 주리라

20 그 달 이십사일에 여호와의 말씀이 다시 학개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21 너는 유다 총독 스룹바벨에게 말하여 이르라 내가 하늘과 땅을 진동시킬 것이요

22 여러 왕국들의 보좌를 엎을 것이요 여러 나라의 세력을 멸할 것이요 그 병거들과 그 탄 자를 엎드러뜨리리니 말과 그 탄 자가 각각 그의 동료의 칼에 엎드러지리라

23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스알디엘의 아들 내 종 스룹바벨아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내가 너를 세우고 너를 인장으로 삼으리니 이는 내가 너를 택하였음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시니라

 

 

<설교>

상에 수립되어 있는 모든 기준은 잘못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선악을 알게 된 인간에 의해 세워진 기준이라면 결국 인간이 알게 된 선악을 구분하는 것으로 드러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령 가난은 좋지 않은 것이고 부자는 좋은 것이 세상의 기준입니다. 높아지는 것이 좋은 것이고 낮아지는 것은 좋지 않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가난하고 낮은 위치에 있다는 것은 세상으로부터 무시 받을 존재임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선악을 아는 시각에서 가난은 좋지 않은 것으로 인식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세상 기준이 신자에게 있다면 신자는 자신을 남들처럼 많이 가지고 못 가진 것으로 평가하게 됩니다. 그리고 남들보다 못가진 자신을 초라하게 여깁니다. 이것이 과연 신자로써 바른 것일까요?

 

 

세상의 것이 사람을 초라하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초라한 것은 가진 것이 없는 자신을 초라하게 여기는 시각입니다. 때문에 신자는 무엇이 진심으로 초라함인가를 알 수 있어야 합니다.

 

 

본문에 보면 선지자가 제사장에게 사람이 옷자락에 고기를 쌌는데 그 옷자락이 떡이나 국이나 포도주나 기름이나 다른 음식물에 닿으면 닿은 그것들은 거룩해지느냐는 질문을 합니다. 그리고 제사장들은 아니라고 답합니다. 율법에는 거룩한 제물을 싼 것에 뭔가가 닿았다고 해서 그것에 거룩해진다는 규례가 없습니다. 거룩은 다른 것으로 전달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선지자는 질문을 하나 더 합니다. 그것은 시체를 만져서 부정해진 자가 국이나 떡을 만지면 그것들을 어떻게 되느냐는 것입니다. 제사장들은 율법대로 부정해진다고 답합니다. 선지자가 이런 질문을 하는 이유는 유다 백성의 형편이 어떠한가를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14절에 보면 “이에 학개가 대답하여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에 내 앞에서 이 백성이 그러하고 이 나라가 그러하고 그들의 손의 모든 일도 그러하고 그들이 거기에서 드리는 것도 부정하니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여호와 앞에서 유다 백성과 그 나라가 부정하다는 것입니다. 이유는 유다는 이미 이방 나라의 포로로 끌려가서 그곳에서 70년을 생활 했습니다. 이방인은 율법에 의하면 부정한 사람들인데 부장한 사람의 나라에 끌려가서 그들과 접촉하면서 70년을 살았으니 유다 또한 부정해진 존재가 아니냐는 것입니다.

 

 

선지자의 질문에서 거룩한 고기를 싼 옷자락이 다른 것에 닿는다고 해도 그것이 거룩해지지 않는 것처럼, 유다가 비록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이라고 해도 그들에 바벨론으로 간 것 때문에 바벨론이 거룩해지는 것은 없습니다. 하지만 유다가 부정한 이방나라에 함께 했으니 그들이 부정해진 것은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유다 백성들의 형편을 초라한 성전을 짓게 하시는 것으로 드러내고 계십니다.

 

 

유다가 건축하는 성전은 이전 성전에 비하면 초라하기 짝이 없습니다. 하지만 초라함은 건물의 차이에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유다가 부정한 존재라는 것, 그것이 바로 그들이 초라할 수밖에 없는 진정한 이유였습니다.

 

 

물론 건물만 바라본다면 외형적인 차별로 인한 초라함이 분명히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화려했던 솔로몬의 성전도 영원하지를 못했고, 그들의 죄로 인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외형적인 차이는 하나님께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15절을 보면 “이제 원하건대 너희는 오늘부터 이전 곧 여호와의 전에 돌이 돌 위에 놓이지 아니하였던 때를 기억하라”고 말합니다. 성전이 무너졌을 그 때를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때는 일하고 수고한 것만큼 소득을 얻지 못했음을 16,17절에서 말합니다.

 

 

그래도 이스라엘은 마음을 하나님께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바벨론의 포로에서 돌아와 성전을 쌓으면서도 그들은 만족할만한 열매를 얻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오늘부터는 복을 주겠다고 하십니다. 그 이유는 선지자가 지으라고 한 성전이 그들에게 복이 되기 때문입니다.

 

 

성전이 복이 되는 것은 성전이라는 건물이 복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성전에서 일어나는 일이 복이 되기 때문입니다. 9절을 보면 “이 성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고 말합니다. 나중 영광은 하나님께서 성전에서 일으키실 장래 일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바로 성전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죄 용서의 은혜입니다. 이것이 초라한 성전에 담겨 있는 장래 영광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성전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참된 성전으로 오신 예수님이 아주 초라한 모습으로 오신 것입니다. 솔로몬의 성전처럼 화려한 모습이 아니라 산에서 흔한 나무를 가져다가 지은 것과 같은 초라한 성전으로 오신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초라함을 입으시고 오신 것은 하나님 앞에서 너희는 죄로 인해 부정한 존재고 볼품없고 초라한 존재일 뿐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아는 신자는 초라한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에게서 ‘저것이 내 모습이다’ ‘내가 바로 죄로 인해 부정해진 초라한 존재다’는 것을 볼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세상의 화려함은 의미가 없습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차별되는 화려함이나 초라함은 하나님이 보시는 시각이 아닙니다. 부정한 존재가 모두 초라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면, 세상에서 어떤 위치에 있고 무엇을 가졌다고 해도 모두가 초라한 사람들입니다.

 

 

이처럼 자기의 초라함을 아는 사람이 예수님의 존재성에 대해 눈을 뜨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의 초라함을 예수님이 담당하시고 짊어지심으로써 우리를 의의 자리로, 영광의 자리로 인도하셨음을 믿게 됩니다. 이러한 신자가 예수님이 나의 복임을 고백하게 됩니다. 이것이 신자에게 약속되어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나중 영광입니다.

 

 

이 영광은 이전 영광, 즉 눈에 보이는 화려한 영광보다 더 큰 영광으로 주어집니다. 이 나중 영광을 더 큰 영광으로 볼 수 있는 신자가 누구인가 하면 바로 초라한 성전을 통해서 자신의 초라함을 발견한 사람입니다.

 

 

23절을 보면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스알디엘의 아들 내 종 스룹바벨아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내가 너를 세우고 너를 인장으로 삼으리니 이는 내가 너를 택하였음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시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스룹바벨을 종으로 택하여 세우고자 하시는 것은 초라한 성전에 담겨 있는 장래의 영광을 백성들이 바라보고 소망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스룹바벨은 초라하게 지어진 성전 앞에서 인간이 왜 초라할 수밖에 없는가를 쉬지 않고 알려야 합니다. 그것이 백성들을 복으로 인도하는 종의 사명입니다.

 

 

우리가 십자가에 죽으신 정말 죽음까지도 초라한 예수님 앞에 나오는 것은 유다 백성이 초라한 성전에 서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보면서 우리가 왜 초라한 존재일 수밖에 없는가를 마음에 새겨두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초라한 존재임을 증명하는 모든 부정함과 죄를 짊어지시고 피 흘려 죽으신 예수님의 은혜가 곧 우리에게 복이 되고 영광이고 기쁨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더 큰 영광에 참여한 백성들입니다. 이 복은 오늘 이전, 즉 예수님을 알기 이전의 우리의 초라함을 생각하면 더 큰 영광과 복으로 다가오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