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가랴
2011.04.24 17:17

(8강) 신앙과 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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슥 7:1-14http://onlycross.net/videos/zec/zec-070114.mp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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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 다리오 왕 제사년 아홉째 달 곧 기슬래월 사일에 여호와의 말씀이 스가랴에게 임하니라

2 그 때에 벧엘 사람이 사레셀과 레겜멜렉과 그의 부하들을 보내어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고

3 만군의 여호와의 전에 있는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에게 물어 이르되 내가 여러 해 동안 행한 대로 오월 중에 울며 근신하리이까 하매

4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5 온 땅의 백성과 제사장들에게 이르라 너희가 칠십 년 동안 다섯째 달과 일곱째 달에 금식하고 애통하였거니와 그 금식이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한 것이냐

6 너희가 먹고 마실 때에 그것은 너희를 위하여 먹고 너희를 위하여 마시는 것이 아니냐

7 예루살렘과 사면 성읍에 백성이 평온히 거주하며 남방과 평원에 사람이 거주할 때에 여호와가 옛 선지자들을 통하여 외친 말씀이 있지 않으냐 하시니라

8 여호와의 말씀이 스가랴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9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여 이르시기를 너희는 진실한 재판을 행하며 서로 인애와 긍휼을 베풀며

10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와 궁핍한 자를 압제하지 말며 서로 해하려고 마음에 도모하지 말라 하였으나

11 그들이 듣기를 싫어하여 등을 돌리며 듣지 아니하려고 귀를 막으며

12 그 마음을 금강석 같게 하여 율법과 만군의 여호와가 그의 영으로 옛 선지자들을 통하여 전한 말을 듣지 아니하므로 큰 진노가 만군의 여호와께로부터 나왔도다

13 내가 불러도 그들이 듣지 아니한 것처럼 그들이 불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14 내가 그들을 바람으로 불어 알지 못하던 여러 나라에 흩었느니라 그 후에 이 땅이 황폐하여 오고 가는 사람이 없었나니 이는 그들이 아름다운 땅을 황폐하게 하였음이니라 하시니라

 

 

 

<설교>

 

교와 신앙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종교와 신앙을 구분하지 못하면 종교를 신앙으로 착각하고 신앙이 아닌 종교의 길을 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종교는 사람으로 시작해서 사람으로 끝나기 때문에 사람을 위해 신을 찾습니다. 하지만 신앙은 하나님으로 시작해서 하나님으로 끝나기 때문에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그래서 종교는 사람의 노력과 열심을 요구하지만 신앙은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만을 추구하고 의지합니다. 오늘 본문이 이러한 종교와 신앙에 대해 얘기하고 있습니다.

 

 

2절부터 보면 벧엘 사람이 부하들을 여호와의 전에 있는 제사장과 선지자들에게 보내어서 자신이 여러 해 동안 행한 대로 오월 중에 울며 근신을 해야 하는지 묻습니다. 이 물음을 보면 유다는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하면서 해마다 오월이면 근신을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근신이란 금식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유다 백성이 오월이 되면 금식을 했던 것은 성전 파괴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왕하 25:8,9절에 보면 오월 칠일에 바벨론 왕의 시위대장 느부사라단이 성전과 왕궁을 불살랐다고 되어 있습니다. 즉 오월은 성전이 무너진 달로써 유다 백성이 바벨론에서 성전이 무너진 것을 기억하며 금식하는 관습이 생긴 것 같습니다.

 

 

이 관습이 바벨론에서 계속되었는데 지금은 예루살렘에 돌아왔고 성전도 어느 정도 건축되어가는 과정에 있기 때문에 바벨론에서처럼 금식을 계속 해야 하는지 의문이 생긴 것 같습니다. 이 질문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전의 무너짐으로 인해 금식했다면, 성전이 다시 건축되는 상황에서 금식의 이유는 사라진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이 질문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온 땅의 백성과 제사장들에게 이르라 너희가 칠십 년 동안 다섯째 달과 일곱째 달에 금식하고 애통하였거니와 그 금식이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한 것이냐 너희가 먹고 마실 때에 그것은 너희를 위하여 먹고 너희를 위하여 마시는 것이 아니냐”(5,6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다의 금식을 하나님을 위해서 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을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종교입니다. 우리에게 금식은 신앙의 행위로 인정됩니다. 하지만 금식을 했다고 해서 신앙으로 인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누구를 위한 금식이냐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한 것이면 신앙이지만 자신을 위한 것이면 하나님이 거부하시는 종교일 뿐입니다.

 

 

따라고 지금의 교회가 이해하는 신앙의 의미는 분명 잘못되어 있습니다. 현대 교회가 생각하는 신앙은 종교적 행위에 대한 열심입니다. 예배와 주일 지키는 열심, 헌금과 기도 열심, 봉사에 대한 열심, 이러한 열심들이 신앙으로 인정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대로 한다면 무엇을 했든, 어떤 열심이 있었든 상관없이 자신을 위해 한 모든 것은 신앙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십계명에 ‘너를 위해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합니다. 즉 우상은 단순히 어떤 형상을 만들고 거기 절하는 것으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 하는 것이 우상의 본질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때문에 울며 금식을 한다고 해도 자신을 위해 한 것이라면 자신을 위해 우상을 만든 것과 바를 바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신을 위해 금식을 했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9-12절을 보면 유다가 망한 이유를 알 수 있는데 그것은 재판을 진실하게 행하고 서로 인애와 긍휼을 베풀며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와 궁핍한 자를 압제하지 말고 서로 해하려고 마음에 도모하지 말라는 말씀을 싫어하는 것에 대한 하나님이 진노였습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고아와 과부 나그네와 같은 연약한 자로 출발했습니다. 그런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약속의 땅에 들어가 기업을 얻고 복을 누렸습니다. 때문에 그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온 지 수백년이 흘렀다고 해도 그들의 현재는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것입니다. 이것을 잊지 않고 은혜에 감사하는 것이 하나님을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이 은혜를 잊음으로서 그들은 약자의 피를 흘리는 죄로 가득하게 되었고 하나님의 진노로 멸망을 받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유다는 자신들의 멸망의 내막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단지 포로 생활을 하는 고통만을 생각했고, 그래서 무너진 성전을 기억하면서 눈물을 흘리고 금식하면 하나님의 도움을 구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를 위한 금식입니다.

 

 

유다는 현재의 고통만을 생각했을 뿐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나 있었던 죄에 대해서는 무지했습니다. 만약 유다가 약자를 핍박했던 것을 생각한다면 그것은 단지 약자를 핍박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지 않고 듣기를 싫어하며 귀를 막았던 죄의 모습임을 보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유다의 멸망과 현재의 고통 또한 당연한 것으로 여길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눈물을 흘리며 금식을 하고 애통해 하는 것도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함이 아니라 말씀을 청종하지 않았던 죄에 대한 애통으로 이어져야 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바라보는 신앙인 것입니다.

 

 

종교적 의미에서의 행동은 행동하는 자신을 보게 됩니다. ‘이것을 해야 할까? 말아야 할까? 얼마나 하면 될까?’ 항상 행하고 행하지 않는 것에 관심을 둡니다. 자기 행위를 좀 더 의미 있고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들려고 하고, 따라서 의미가 없다고 여겨지는 것은 하지 않게 됩니다. 벧엘 사람이 금식을 해야 하는지 묻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예루살렘에 돌아왔고 성전도 다시 건축되고 있는데 바벨론에서의 금식이 예루살렘에서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생각입니다.

 

 

유다가 예루살렘에 돌아왔다고 해서 그들의 죄가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유다의 귀환은 그들의 죄와는 무관한 하나님의 일하심이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유다의 금식이 자신의 죄로 인한 것이었다면 예루살렘에 돌아왔다고 해도 여전히 죄 가운데 있는 자신을 발견했을 것이고 금식을 계속해야 하느냐는 물음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종교의 길을 가는 사람은 ‘이것을 해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라는 의문과 질문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스스로 신앙인이 되려고 하기 때문에 무엇을 하고 하지 않아야 수준 있는 신앙인이 되는가에 집착합니다. 그리고 신앙에 도움이 안되는 것은 가치 없는 것으로 여기고 외면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 밖에서의 신앙, 즉 종교 생활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뭔가 열심히 하면 된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누구를 위해 한 것이냐?’를 묻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경건하고 거룩하게 보이는 행위라고 해도 자신을 위한 것은 거부하십니다. 그것이 예배든 금식이든 거부하십니다. 그래서 종교라는 것입니다.

 

 

신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청종하게 되면 자신의 불의함을 보게 됩니다. 누구라도 말씀을 청종하면서 자기 의를 추구한다면 그는 말씀을 청종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말씀 앞에 서게 되면 불의한 자로 나오게 됩니다. 신자가 자기 불의함을 보게 될 때 회개의 마음이 되고 애통이 있게 됩니다. 그리고 모든 죄를 덮으시고 용서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소원을 두게 됩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이러한 신앙의 사람에게는 무엇을 하고 안하고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행함이 아니라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 은혜로 다가오고 은혜로 하나님과 교통하는 관계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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