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가랴
2011.05.01 14:10

(9강) 기이한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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슥 8:1-13http://onlycross.net/videos/zec/zec-080113.mp4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여 이르시되

2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내가 시온을 위하여 크게 질투하며 그를 위하여 크게 분노함으로 질투하노라

3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내가 시온에 돌아와 예루살렘 가운데에 거하리니 예루살렘은 진리의 성읍이라 일컫겠고 만군의 여호와의 산은 성산이라 일컫게 되리라

4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예루살렘 길거리에 늙은 남자들과 늙은 여자들이 다시 앉을 것이라 다 나이가 많으므로 저마다 손에 지팡이를 잡을 것이요

5 그 성읍 거리에 소년과 소녀들이 가득하여 거기에서 뛰놀리라

6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이 일이 그 날에 남은 백성의 눈에는 기이하려니와 내 눈에야 어찌 기이하겠느냐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7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보라, 내가 내 백성을 해가 뜨는 땅과 해가 지는 땅에서부터 구원하여 내고

8 인도하여다가 예루살렘 가운데에 거주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진리와 공의로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9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만군의 여호와의 집 곧 성전을 건축하려고 그 지대를 쌓던 날에 있었던 선지자들의 입의 말을 이 날에 듣는 너희는 손을 견고히 할지어다

10 이 날 전에는 사람도 삯을 얻지 못하였고 짐승도 삯을 받지 못하였으며 사람이 원수로 말미암아 평안히 출입하지 못하였으나 내가 모든 사람을 서로 풀어 주게 하였느니라

11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제는 내가 이 남은 백성을 대하기를 옛날과 같이 아니할 것인즉

12 곧 평강의 씨앗을 얻을 것이라 포도나무가 열매를 맺으며 땅이 산물을 내며 하늘은 이슬을 내리리니 내가 이 남은 백성으로 이 모든 것을 누리게 하리라

13 유다 족속아,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이방인 가운데에서 저주가 되었었으나 이제는 내가 너희를 구원하여 너희가 복이 되게 하리니 두려워하지 말지니라 손을 견고히 할지니라

 

 

<설교>

2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시온을 위하여 크게 분노함으로 질투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질투하신다는 것이 왠지 하나님께는 어울리지 않는 말로 들립니다. 왜냐하면 질투라는 말을 누군가에 대한 시기의 의미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질투하는 분으로 많이 묘사합니다. 출 3:14절에서도 하나님을 ‘질투라 이름하는 질투의 하나님’으로 말하고, 신 4:24절에서는 여호와를 ‘소멸하는 불’로, ‘질투하시는 하나님’으로 말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질투하신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질투는 사랑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감정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대상이 나 아닌 다른 누군가를 사랑할 때 질투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대상이 아니라면 질투는 없습니다.

 

 

따라서 질투하신다는 것은 질투의 대상이 곧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라는 뜻이 됩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대상에게서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만 사랑해야 할 자가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사랑합니다. 이에 대해 하나님은 질투하시고 그들에 대해 진노하시고 소멸해 버리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질투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온전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일까요? 우리의 마음에 과연 하나님만이 자리하고 계실까요? 아닐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 자리하고 있고, 나를 주관하고 다스리는 것은 바로 나 자신입니다. 내가 나의 주인이 되어서 내 뜻대로 살아갑니다. 하나님을 찾는 것도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고 하나님 때문도 아니라 나를 위해서고 나 때문입니다. 내 중심에는 오로지 내가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당연한 것은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이스라엘도 하나님께는 질투의 대상이었습니다. 질투로 인해서 결국 멸망을 당하고 바벨론으로 끌려갔습니다. 그들은 바벨론에서도 자신을 위해 살았습니다. 금식을 한 것도 자신을 위해서였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런 그들을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하십니다.

 

 

자신들의 잘못이 무엇인가를 알고, 회개하고 애통해 하면서 신자로써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만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을 때 돌아오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자기를 위해 살고 있는 그들을 돌아오게 하신 것입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이스라엘은 여전했습니다. 성전을 다시 건축할 때는 자기 형편을 이유로 건축에 불만을 가졌고, 그로 인해 성전 건축이 중단되기도 했습니다. 결국 유다가 망하기 전이나 바벨론에서 포로로 고생할 때나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후에도 그들의 사고방식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실패한 것입니까? 만약 유다를 망하게 하셔서 바벨론으로 끌려가 모진 고통을 겪게 하신 일들이 유다를 정신 차리게 하고 다른 사람으로 변화시키기 위한 것이었다면 하나님의 일은 실패한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인간의 변화에 있지 않았습니다. 고통과 고생으로 인해 인간이 변화하고 달라질 수 있다면 예수님이 오실 필요는 없습니다. 고통과 고생을 통해 인간을 변화 시켜 가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을 유다를 돌아오게 하신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4절을 보면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예루살렘 길거리에 늙은 남자들과 늙은 여자들이 다시 앉을 것이라 다 나이가 많으므로 저마다 손에 지팡이를 잡을 것이요”라고 말합니다. 나이가 많아 손에 지팡이를 잡은 늙은 여자와 늙은 남자가 많다는 것은 전쟁으로 죽은 사람이 없이 평안이 지속되고 장수의 복을 누리게 됨을 의미합니다.

 

 

또 5절에 보면 “그 성읍 거리에 소년과 소녀들이 가득하여 거기에서 뛰놀리라”고 말합니다. 소년과 소녀들이 가득하다는 것은 자손의 번창을 뜻합니다. 고대 사회에서 자손의 번창은 신의 축복을 의미합니다. 즉 하나님은 유다를 돌아오게 하시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평안이 계속되게 하셔서 장수의 복을 누리게 하시고 자손이 번성하는 복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7,8절에서도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해가 뜨는 땅과 해가 지는 땅에서부터 구원하여 내고 인도하여다가 예루살렘 가운데 거주하게 하시고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신다고 합니다. 이 모든 내용들은 하나같이 하나님이 베푸시는 복에 대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들 가운데 함께 하시면서 그들의 복의 주체가 되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유다가 하나님의 복을 누릴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불러내신 모든 백성이 동일합니다. 그런데도 복을 주시겠다는 것은 복은 인간의 자격에 따라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알게 합니다. 우리는 이 같은 사실에 주지해야 합니다.

 

 

질투하시는 하나님 앞에서는 누구도 복을 누릴 자격이 없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소멸의 대상일 뿐입니다. 심판이 우리에게 주어져야 할 당연한 몫입니다. 설사 하나님의 심판을 받으며 하나님의 진노를 접한다고 해도 인간은 달라지지 않기 때문에 결국 인간은 하나님의 분노 안에서 영원한 멸망에 갇혀야 할 존재일 뿐입니다.

 

 

그런데도 그런 인간을 다시 돌아오게 하시고 복을 주시겠다고 하시고 그 같은 일을 행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생각한다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참으로 기이할 따름입니다.

 

 

그래서 6절에 보면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이 일이 그 날에 남은 백성의 눈에는 기이하려니와 내 눈에야 어찌 기이하겠느냐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에게 베푸시는 일들이 남은 백성의 눈에는 참으로 기이한 일로 보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기이하다는 것은 인간의 상식과 생각과 지식을 벗어난 일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그렇습니다. 우리의 상식과 생각을 벗어난 일입니다.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복을 누릴 사람이 못되고 오히려 분노와 심판을 받는 것이 마땅함을 안다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우리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기이한 일로 보이게 됩니다.

 

 

다시 말하지만 여러분이 하나님의 복을 누릴 자격이 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천국을 말하지만 과연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을 믿음으로 천국 간다고 하지만 예수님을 믿을 수 있는 자격도 자질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자신에 대한 이 같은 사실을 직시한다면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에 대한 하나님의 일은 참으로 기이하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게 하고, 구원에 이르게 합니까? 무엇이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세계로 인도했습니까? 우리 자신에게서는 그 어떤 가능성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기이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2절에 보면 하나님은 시온을 위해 질투하십니다. 시온에는 성전이 있고 성전의 의미는 하나님의 용서입니다. 하나님의 질투는 하나님의 용서를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질투로 인해 소멸 받아야 할 대상이 하나님의 용서로 인해 복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용서가 복의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용서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복의 근원이십니다. 그래서 신자는 예수님만을 높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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