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가랴
2011.05.08 17:26

(10강) 은혜 받은 자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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슥 8: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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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4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 조상들이 나를 격노하게 하였을 때에 내가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기로 뜻하고 뉘우치지 아니하였으나

15 이제 내가 다시 예루살렘과 유다 족속에게 은혜를 베풀기로 뜻하였나니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지니라

16 너희가 행할 일은 이러하니라 너희는 이웃과 더불어 진리를 말하며 너희 성문에서 진실하고 화평한 재판을 베풀고

17 마음에 서로 해하기를 도모하지 말며 거짓 맹세를 좋아하지 말라 이 모든 일은 내가 미워하는 것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18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19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넷째 달의 금식과 다섯째 달의 금식과 일곱째 달의 금식과 열째 달의 금식이 변하여 유다 족속에게 기쁨과 즐거움과 희락의 절기들이 되리니 오직 너희는 진리와 화평을 사랑할지니라

20 만군의 여호와가 이와 같이 말하노라 다시 여러 백성과 많은 성읍의 주민이 올 것이라

21 이 성읍 주민이 저 성읍에 가서 이르기를 우리가 속히 가서 만군의 여호와를 찾고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자 하면 나도 가겠노라 하겠으며

22 많은 백성과 강대한 나라들이 예루살렘으로 와서 만군의 여호와를 찾고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리라

23 만군의 여호와가 이와 같이 말하노라 그 날에는 말이 다른 이방 백성 열 명이 유다 사람 하나의 옷자락을 잡을 것이라 곧 잡고 말하기를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하심을 들었나니 우리가 너희와 함께 가려 하노라 하리라 하시니라

 

 

<설교>

생명을 위해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들은 참으로 기이합니다. 기이할 수밖에 없는 것은 우리의 상식과 사고를 뛰어 넘어서 우리가 도무지 생각할 수도 상상할 수도 없는 방식으로 생명의 일을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그 중에 하나가 은혜 받을 수 없는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은혜를 받은 것이 유다였습니다.

 

 

유다가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 베풂의 결과입니다. 그들이 회개하고 달라졌기 때문이 아닙니다. 인간의 상식과 이치대로라면 그들은 바벨론에서 더 고통을 당해야 합니다. 자신들의 죄를 깨닫고 하나님께 돌아올 때까지 고생을 겪으면서 회개를 해야 합니다. 그래야 돌아올 자격이 있다는 것이 우리 생각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전혀 달라지지도 않은 유다를 돌아오게 합니다. 왜 그들이 변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으실까요? 이유는 하나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진노로 고통을 겪고 그로 인해서 변하여 구원을 받는 방식으로는 누구도 구원을 얻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어떤 방식으로도 변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변한다고 해봐야 기껏 삶의 방식이나 행동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변화가 아닙니다. 인간의 악한 본질, 즉 죄성은 불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구도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고 하나님의 구원에 해당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하고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리고 구원에 이르게 하십니다. 이 같은 하나님에 대해 기이하게 여기는 놀라움이 있어야 합니다.

 

 

이처럼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는 당연한 것이 아님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만약 은혜를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면 그것은 자신을 은혜 받을 만한 사람으로 생각한다는 것이고, 그것은 곧 자기를 바라본다는 뜻이 됩니다. 그리고 이것은 사람에 대한 차별로 나타날 것입니다.

 

 

은혜를 안다면 자신에게 있는 것을 자기의 수고와 노력의 결과로 여기지 않습니다. 14절을 보면 이스라엘의 조상들이 하나님을 격노하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심으로 멸망을 받고 이방 나라에 포로가 되어 고통을 받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뉘우치지 않고 하나님께 마음을 두지 않으며 여전히 자신을 위해 살아갑니다. 그런 예루살렘과 유다 족속에게 은혜를 베풀어 돌아오게 하시고 본성의 복을 누리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루살렘에 돌아온 그들에게 주어진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에게 베풀어지고 그들은 은혜로 살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물입니다. 그러므로 유다가 은혜를 안다면 그들에게 주어진 것을 힘으로 삼지 않을 것이고 가지지 못한 자를 약자라 하여 무시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 받은 자의 삶입니다.

 

 

16,17절을 보면 “너희가 행할 일은 이러하니라 너희는 이웃과 더불어 진리를 말하며 너희 성문에서 진실하고 화평한 재판을 베풀고 마음에 서로 해하기를 도모하지 말며 거짓 맹세를 좋아하지 말라 이 모든 일은 내가 미워하는 것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말합니다.

 

 

너희가 행할 일이라는 것은 은혜를 받은 자가 행할 일을 말합니다. 은혜 받은 자가 행할 일은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증거하는 것이고,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을 높이고 찬송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선지자는 이웃과 더불어 진리를 말하고, 성문에서 진실하고 화평한 재판을 베푸는 것이고, 서로 해하기를 도모하지 않고, 거짓 맹세를 좋아하지 않는 것이라고 합니다.

 

 

흔히 말하기를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가 행할 것은 은혜를 받은 만큼 내어 놓고 베푸는 것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선지자는 은혜 받은 자가 행할 일을 이웃과의 관계에서 말합니다.

 

 

이웃과 더불어 진리를 말한다는 것은 이웃과 함께 진리의 길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웃을 함께 진리를 나누고 진리의 길로 걸어갈 형제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신자가 진리 안에서 함께 한다는 것이 세상에서의 차별의 기준이 모두 허물어진 관계에서 함께 함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돈이 벽이 되어서 함께 진리를 나누지 못한다면 그것은 형제로 대하지 않고 자기 소유를 기준하여 대하는 것이 됩니다.

 

 

성문에서 진실하고 화평한 재판을 베푼다는 것도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 것을 뜻합니다. 사람을 보지 않고 모든 이에게 진실한 재판을 행하는 것은 사람을 세상 기준으로 차별하지 않을 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내용들은 단지 재판을 공정하게 하라는 윤리적인 가르침이 아니라 사람에 대한 차별 의식을 하나님이 미워하심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차별의식은 하나님 은혜의 은혜 됨을 알지 못하는 증거물이기 때문입니다.

 

 

19절에 보면 금식에 대해 말합니다. 유다 백성들은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금식을 하면서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했습니다. 그들이 금식을 했다는 것은 바벨론 생활로 인해 많은 고통을 겪었다는 의미가 됩니다. 하지만 금식이 변하여 기쁨과 즐거움과 희락의 절기가 된다고 말씀합니다. 다시 말해서 고통의 세월이 끝나고 기쁨과 즐거움의 날이 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유다에 대한 사랑이 담겨 있는 말씀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유다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만한 민족이 못됩니다. 그런데도 그들을 사랑하시고 복에 거하게 하시는 것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전이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전은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가 베풀어지는 현장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성전을 두심으로써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베푸시고, 그들을 긍휼과 자비의 증거물로 삼으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을 사랑하신 것은 이스라엘이 예뻐서가 아니라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새겨두심으로써 이스라엘로 하여금 그 사랑을 증거하도록 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도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사랑을 받을 만 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심으로써 하나님이 크신 사랑을 새겨두시고 그 사랑을 증거하라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아는 자는 자신의 잘됨을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하면서 잘됨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잘됨보다는 사랑 받을 수 없는 자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과 은혜를 감사하게 됩니다. 이것이 사랑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랑을 알고 은혜를 아는 앎은 삶으로 연결되어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그것이 이웃을 차별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 1:16,17절에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한 행실을 버리며 행악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 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고 말합니다.

 

 

악한 행실을 버리고 행악을 그치고 학대 받는 자를 도와주고 고아를 위해 신원하고 과부를 위해 변호하라는 것은 하나님이 악한 행실, 행악으로 여기시는 것은 약자를 학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약자를 학대하는 것보다 더 악한 행실이 많습니다. 그럼에도 약자를 학대하는 것을 악한 행실과 행악으로 말하는 것은 약자를 학대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무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면 여러분은 그 크신 은혜를 증거할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여러분의 존재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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