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라기
2011.07.17 14:05

(2강) 어떻게 멸시하였나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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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1:6-14http://onlycross.net/videos/mal/mal-010614.mp4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6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들은 그 아버지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버지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하는도다

7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제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여호와의 식탁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말하기 때문이라

8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 먼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을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 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으며 너를 받아 주겠느냐

9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는 나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면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여 보라 너희가 이같이 행하였으니 내가 너희 중 하나인들 받겠느냐

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제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가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1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해 뜨는 곳에서부터 해 지는 곳까지의 이방 민족 중에서 내 이름이 크게 될 것이라 각처에서 내 이름을 위하여 분향하며 깨끗한 제물을 드리리니 이는 내 이름이 이방 민족 중에서 크게 될 것임이니라

12 그러나 너희는 말하기를 여호와의 식탁은 더러워졌고 그 위에 있는 과일 곧 먹을 것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하여 내 이름을 더럽히는도다

13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또 말하기를 이 일이 얼마나 번거로운고 하며 코웃음치고 훔친 물건과 저는 것, 병든 것을 가져왔느니라 너희가 이같이 봉헌물을 가져오니 내가 그것을 너희 손에서 받겠느냐 이는 여호와의 말이니라

14 짐승 떼 가운데에 수컷이 있거늘 그 서원하는 일에 흠 있는 것으로 속여 내게 드리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니 나는 큰 임금이요 내 이름은 이방 민족 중에서 두려워하는 것이 됨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설교>

 

하나님께서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라고 질책을 합니다.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하는 제사장으로써 하나님의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으로 불린다는 것은 한마디로 제사장의 자격이 없다는 것이고,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모든 것들이 거짓이라는 뜻이 됩니다.

 

 

그러므로 이런 말을 들으면 발끈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인지상정일 것입니다. 그래서 제사장들은 “아들은 그 아버지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버지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라는 말에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라는 반응을 보인 것입니다.

 

 

제사장들이 성전에서 하나님을 멸시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일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 나름대로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하나님을 섬긴다고도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난데없이 하나님의 이름을 멸시한다는 말을 들으면 발끈할 수밖에 없는 것이고, ‘우리가 어떻게’라는 말로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말한 대로 이것은 우리도 다르지 않습니다.

 

 

제사장들을 하나님의 이름을 멸시하는 자로 질책을 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들은 분명 하나님의 이름을 멸시하고 7절에서 말한 대로 더러운 떡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제단을 더럽히는 자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 같은 평가를 거부한 채 어떻게 멸시했고 어떻게 더럽혔는가라는 말로 자기를 방어하고자 하는 것은 그들이 자신들의 생각에 맞는 자기 신앙이라는 세계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신앙의 세계에서 자신들은 문제될 것이 없었습니다. 제사를 잘 시행했고 제물도 바쳤습니다. 즉 제사장으로서의 본분을 다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 자신들더러 하나님이 이름을 멸시했다고 질책을 하니 반발이 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내가 하나님께 뭘 어떻게 하는가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보시느냐’입니다. 내 생각에 내가 잘하고 있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다른 누군가가 잘하고 있다고 칭찬해 주는 것도 의미가 없습니다. 타인에게 인정받는 기분 좋음은 있겠지만 생명의 문제와는 전혀 상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판단자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옳다고 하신 것이 옳은 것이고, 하나님이 그르다고 하신 것이 그른 것입니다. 우리의 시각은 판단의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시각과 기준으로 자신을 바라보기 때문에 문제점이 무엇인가를 발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당시 제사장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제사장들을 하나님의 이름을 멸시하는 자로 질책하시는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아들로써 아버지를, 종으로써 주인을 공경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즉 공경이 없는 제사는 제사가 아니며, 공경이 없는 제물 역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제사장들은 제사를 드리고 제물 바치는 것 자체를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으로 우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어떻게 판단하시는가에 대해서도 무지한 것입니다.

 

 

제사나 제물은 죄인을 용서하신 하나님의 은총과 자비하심에 대한 감사가 그 본질입니다. 따라서 진심으로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로 기뻐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를 용서하시고 생명에 있게 하신 하나님의 인도를 신뢰하면서 내가 원하는 인생의 길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인생을 원하며 항상 자신이 있는 자리에서 하나님이 베푸신 은총으로 기뻐하고 감사하는 자로 살기를 소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자의 중심에는 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이 베푸신 은총을 안다는 것이고, 그 은총을 자신의 최고의 복을 누리고 있다는 것이 됩니다. 이것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에 해당됩니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이러한 공경이 없었습니다. 그 증거가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였나이까’라는 반발입니다. 이 것이 그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모른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거하는데도 사랑을 모르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 역시 자신들의 기준으로 판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세상을 기준으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탐욕일 뿐입니다. 자신의 탐욕이 채워지는 것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향한 탐욕의 눈으로 하나님을 생각하게 되면 모든 것은 왜곡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도 은혜도 자비도 복도 구원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하늘의 모든 것에 대해 철저히 왜곡한 채 제사장들처럼 ‘어떻게’라는 말로 일관할 뿐입니다.

 

 

7,8절을 보면 제사장들은 더러운 떡을 제단에 드렸습니다. 그들이 바친 더러운 떡은 눈 먼 제물이었고 절고 병든 제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에 제물은 온전한 것만 바치도록 되어 있습니다. 제사장들이 이 같은 하나님의 규례를 모를 리가 없었을 것이고 따라서 자신들이 바치는 제물이 더러운 것이라는 것도 모를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러한 제물을 바치기를 주저하지 않은 것은 그들의 신앙이 의미와 내용은 사라지고 오직 형식만 남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들의 신앙이 형식만 남은 이유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오랫동안 그들 나름대로 신앙생활을 해도 달라진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제사를 드리고 제물을 바쳐도 그들의 삶은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자신들을 사랑하신다고 여길만한 것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제사와 제물이 내용과 의미가 빠진 채 형식으로만 남게 된 것입니다. 온전한 제물을 드리든 온전치 못한 제물을 드리든 자신들의 삶에 달라지는 것이 없기에 가치 없는 온전하지 못한 제물을 바치는 것으로 어쨌든 제사는 드렸다는 명목을 남기는 것으로 신앙생활을 했다는 자기 정당성을 남기고자 한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형식으로 흘러간다며 그 이유도 다르지 않습니다. 신앙생활이라는 것을 나름대로 해봐도 달라진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달라지는 것이 없다는 것이 정답일 것입니다. 수십 년 믿고 예배를 드리고 헌금을 해도 삶이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배나 헌금에 대한 매력이 없는 것이고 결국 모든 것이 형식으로만 남게 된 것입니다.

 

 

문제는 자기 행함에 대한 기대를 갖는 것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주신다는 기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생명이라는 존귀한 복으로 인도하고자 하시는데 우리는 기껏 육신을 지탱하는데 조금 편리한 것에 눈독을 들이고 있습니다. 이것이 주의 이름을 멸시하는 것이고 더러운 떡으로 거룩한 하나님의 제단을 더럽히는 것이 됩니다. 예수님이 피 흘려 죽으신 십자가를 더럽히는 것입니다.

 

 

11절을 보면 이방민족 중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크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주의 이름을 위하여 분향하고 깨끗한 제물을 드릴 것이라고 합니다. 이 일이 예수님의 오심으로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예수님의 거룩한 피 안에서 온전한 제사가 가능해진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들고 나오는 것을 바라보며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없습니다. 오직 십자가를 바라보며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주를 공경하는 것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