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라기
2011.08.28 12:56

(7강) 무슨 말로 대적하였나이까

조회 수 4007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말 3:13-18http://onlycross.net/videos/mal/mal-031318.mp4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3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완악한 말로 나를 대적하고도 이르기를 우리가 무슨 말로 주를 대적하였나이까 하는도다

14 이는 너희가 말하기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니 만군의 여호와 앞에서 그 명령을 지키며 슬프게 행하는 것이 무엇이 유익하리요

15 지금 우리는 교만한 자가 복되다 하며 악을 행하는 자가 번성하며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가 화를 면한다 하노라 함이라

16 그 때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에 말하매 여호와께서 그것을 분명히 들으시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여기는 자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하셨느니라

17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나는 내가 정한 날에 그들을 나의 특별한 소유로 삼을 것이요 또 사람이 자기를 섬기는 아들을 아낌 같이 내가 그들을 아끼리니

18 그 때에 너희가 돌아와서 의인과 악인을 분별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자와 섬기지 아니하는 자를 분별하리라

 

 

<설교>

 

사람은 자기 입장을 버리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여전히 자기 입장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 반발하기 십상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나 하시는 일이 자기에게 유리한 것이 아니라 불리한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말라기 선지자의 말에 대한 이스라엘의 반응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잘못된 모습에 대해 지적하는 선지자의 말에 대해 ‘어떻게’라는 말로 일관합니다.

 

 

본문에서도 선지자는 이스라엘이 완악한 말로 하나님을 대적하였으면서도 ‘무슨 말로 대적하였나이까’라며 자신들의 정당함을 주장하는 것을 책망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대적한 적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앞에서는 하나님을 괴롭게 하지도 않았고,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지도 않았고, 주의 이름을 멸시하지도 더럽게 하지도 않았음을 주장하는 이스라엘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들은 이처럼 자신들의 정당함을 주장함으로써 현재 자신들의 어려운 삶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자신들을 사랑하지 않은 결과로 돌리려고 합니다. 자신들을 하나님을 바르게 신앙하고 섬기는데 하나님은 사랑하지 않으신다고 함으로써 모든 잘못이 하나님께 있는 것으로 돌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말씀을 통해서 그들은 하나님을 멸시하고 그 이름을 더럽히며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 하는 자들에 지나지 않았음이 드러났습니다. 결국 그들은 어떤 고통에서도 할 말이 없는 죄인들이었을 뿐입니다.

 

 

신자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명확히 해야 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누구도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는 정당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선지자가 지적하는 것처럼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우리 역시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일 뿐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실체라는 것이 인정된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하시는 어떤 일에 대해서도 반발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일컫습니다. 죄인이라는 것은 멸망이 마땅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죄인이라고 하면서 바라는 것은 편한 인생입니다. 원하는 것이 모두 이뤄지기를 기대합니다. 이것은 멸망이 당연한 죄인에게 어울리지 않는 생각입니다.

 

 

죄인에게 주어질 것은 형벌밖에 없습니다. 형벌이 저와 여러분께 마땅한 하나님의 일인 것입니다. 이것을 잊지 않는다면 예수님을 보내셔서 우리를 죄에서 건지신 하나님이야 말로 사랑의 하나님이시며 긍휼과 은총으로 우리에게 함께 하심을 알 수 있습니다.

 

 

과연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여러분은 자신이 하나님을 대적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마 이스라엘처럼 ‘나는 하나님을 대적한 적이 없다’고 부인할 것입니다. 그래서 현재의 삶에 대해 불만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임을 말씀합니다. 과연 무엇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일까요?

 

 

14-15절을 보면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고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고 슬프게 행한 모든 것이 아무 유익이 없다고 합니다. 슬프게 행한 것이라는 말은 금식하고 회개한 것을 말합니다. 즉 하나님을 섬기고 명령을 지키며 금식하고 회개까지 했는데도 유익이 없다는 것은 삶의 형편이 나아진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이 바라보는 세상 현실은 하나님을 섬기는 자는 아무 유익이 없고 오히려 악인이 더 번성합니다. 그런 현실을 보며 교만한 자가 더 복을 받고 악인이 더 번성하며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가 화를 면한다며 불만을 토로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완악한 말입니다.

 

 

교만한 자가 더 복을 받는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누리는 복의 가치를 교만한 자가 누리는 세상의 것보다 더 못한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언약을 주시고 생명으로 인도하십니다. 이처럼 언약의 하나님으로 함께 하시는 것이 이스라엘의 복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교만한 자가 누리는 번성을 더 큰 복으로 바라보며 하나님에 대해 반발합니다, 이처럼 긍휼의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보다 세상의 번성을 더 큰 복으로 여기는 것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불만이 없습니까? 우리는 모이면 십자가 은혜를 말합니다. 이 은혜는 독생자 아들을 아끼지 않으시고 십자가에 피 흘려 죽게 하심으로써 죄에 갇힌 우리를 건지신 긍휼과 자비의 은혜입니다. 때문에 은혜는 세상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복입니다. 이 복을 세상의 번성과 비교하면서 믿음의 유익을 따지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 됩니다.

 

 

세상에서의 번성은 하나님의 은혜와는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번성한다고 해도 구원의 능력은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멸망으로 끝나는 운명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신자는 이 운명에서 건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이 우리를 건지셨습니다. 이 무조건 적인 은혜에 속한 자로 부름 받은 것을 세상의 번성보다 못한 것으로 평가하는 것이 하나님에 대한 대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일 뿐입니다. 말로 생각으로 하나님을 대적합니다. 외적으로 어떤 행함이 있다고 해도 그 행함이 자신에게 어떤 유익으로 다가오기를 기대하면서, 유익이 없다고 여겨지면 신앙생활에 시큰둥해지는 것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도 헛되고 유익이 없다는 것은 자신을 위해 하나님을 섬겼다는 뜻이 됩니다. 금식하고 회개하는 것 역시 자기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자기를 위해 하는 모든 것들이 불만을 낳게 되고 결국 하나님에 대한 대적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문제는 단순히 하나님을 대적한 것에 있지 않습니다. 15절에 보면 이스라엘은 이방인을 교만하고 악을 행하고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로 여깁니다. 따라서 이방인은 복을 받지 말아야 하고 번성하지도 말고 화를 당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반면에 자기들에 대해서는 14절의 내용대로 하나님을 섬기고 명령을 지키며 금식하고 회개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여깁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복을 받고 번성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실은 그들의 생각과는 전혀 반대로 드러나기 때문에 아무 유익이 없다는 불만과 함께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문제는 자신들을 의인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복을 받고 번성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방인의 번성에 화가 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 의인은 없습니다. 다만 의인으로 여김 받는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그들은 자기 죄를 알게 됨으로써 하나님의 긍휼만을 바라고 엎드리는 자들입니다. 이들만이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십자가의 의를 믿게 되는 것입니다. 이들이 하나님의 기준에서 진정한 의인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문제는 하나님에 대해 반발하고 불만을 가진 것이라기보다는 자신들을 의인으로 여긴 것에 있습니다. 자신들 역시 의인이 아니라 이방인과 다르지 않은 죄인이었음을 알았다면 이방인의 번성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죄인 된 자를 구원하시는 긍휼과 사랑을 바라보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 안에서는 복의 의미가 달라집니다. 세상에서의 번성이 복이 아니라 진정한 복으로 오신 그리스도께 속한 자가 되었다는 것이 복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자에게 불만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