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2014.12.28 10:02

(10강) 390년과 4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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겔 4:1-8http://onlycross.net/videos/eze/eze-040108.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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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 너 인자야 토판을 가져다가 그것을 네 앞에 놓고 한 성읍 곧 예루살렘을 그 위에 그리고

2 그 성읍을 에워싸되 그것을 향하여 사다리를 세우고 그것을 향하여 흙으로 언덕을 쌓고 그것을 향하여 진을 치고 그것을 향하여 공성퇴를 둘러 세우고

3 또 철판을 가져다가 너와 성읍 사이에 두어 철벽을 삼고 성을 포위하는 것처럼 에워싸라 이것이 이스라엘 족속에게 징조가 되리라

4 너는 또 왼쪽으로 누워 이스라엘 족속의 죄악을 짊어지되 네가 눕는 날수대로 그 죄악을 담당할지니라

5 내가 그들의 범죄한 햇수대로 네게 날수를 정하였나니 곧 삼백구십 일이니라 너는 이렇게 이스라엘 족속의 죄악을 담당하고

6 그 수가 차거든 너는 오른쪽으로 누워 유다 족속의 죄악을 담당하라 내가 네게 사십 일로 정하였나니 하루가 일 년이니라

7 너는 또 네 얼굴을 에워싸인 예루살렘 쪽으로 향하고 팔을 걷어 올리고 예언하라

8 내가 줄로 너를 동이리니 네가 에워싸는 날이 끝나기까지 몸을 이리 저리 돌리지 못하리라

 

 

<설교>

 

하나님께서 홍수 심판 후에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않을 것이라는 언약을 세우시고 언약의 증거로 구름 속에 무지개를 두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구름으로 땅을 덮을 때 무지개가 구름 속에 나타나면 하나님과 모든 생물 사이에 세우신 영원한 언약을 기억하시겠다고 합니다. 언약의 증거로 무지개를 두신 것은 언약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은혜의 형상화입니다. 노아에게 하신 언약이 곧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언약을 세우셨다면 하나님은 영원히 언약을 기억하시고 그 언약대로 세상을 물로 심판하지 않으십니다. 즉 무지개를 두지 않으셔도 언약을 잊지 않으십니다. 그런데도 굳이 무지개를 두시고 무지개가 구름 속에 나타나면 보시고 하나님이 세우신 언약을 기억하겠다고 하시는 것일까요?

 

 

하나님이 무지개를 보시고 언약을 기억하신다면 인간 역시 무지개가 나타났을 때 무지개를 보고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해야 합니다. 즉 무지개를 두셔서 은혜를 형상화 하신 것은 인간에게 언약을 보게 하면서 세상이 하나님의 은혜로 보존되고 있음을 잊지 말라는 취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무지개를 보면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지 않습니다. 무지개가 나타난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기억할 만한 개인적인 특별한 사건이 아니기 때문일 것입니다. 무지개가 나타났다고 해서 병이 치료되거나 돈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자신과 연관되지 않거나 득이 되지 않는 일에는 관심두지 않습니다. 때문에 무지개에도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이 당연합니다. 하나님의 언약, 은혜도 기억하지 못하고 자기 방식 그대로 살아갑니다. 그것이 우리가 몸담고 있는 세상입니다.

 

 

이것을 생각하면 하나님께서 무지개를 언약의 증거로 두신 이유를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은 하나님이 보여주신 것을 보고도 믿지 않는 악한 존재임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인간은 자신이 보고 싶어 하는 것만 보려고 합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보여준다고 해도 보고 싶은 것이 아니면 관심 두지 않고 외면합니다.

 

 

아마 우리가 지금껏 살아온 삶이 그랬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은혜를 기억하고 알 수 있는 수많은 것을 보여주셨지만 정작 우리는 하나님이 보여주신 것에는 관심 두지 않고 내가 보고자 하는 것만 보여 달라고 하고 보고 싶어 했을 것입니다. 그런 우리가 지나온 날들을 돌아보면서 ‘아! 그게 은혜였구나’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면 그 또한 하나님의 크신 은혜일 것입니다.

 

 

무지개가 은혜의 형상화라면 무지개는 필히 인간의 죄를 기억하게 합니다. 죄가 있는 곳에 은혜가 더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무지개를 보면서도 은혜를 기억하지 않는다는 인간의 죄 또한 기억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됩니다. 이것이 세상입니다.

 

 

본문에 보면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이상한 행동을 하게 합니다. 먼저 1절을 보면 토판을 가져다가 예루살렘 성읍을 그 위에 그리라고 합니다. 토판은 흙으로 만든 벽돌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2절에서는 예루살렘 성읍을 그린 토판을 향하여 사다리를 세우고, 흙으로 언덕을 쌓고, 진을 치고, 공성퇴를 둘러 세우라고 합니다.

 

 

사다리는 전쟁 때 성벽에 세워서 군사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성을 공격하는 용도의 기구입니다. 흙으로 언덕을 쌓는 것은 흙을 쌓아 성벽과 같은 높이로 만들어서 그 위에서 성을 향하여 활을 쏘거나 다른 무기로 성을 공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공성퇴는 고대 전쟁에서 성을 포위한 군사들이 성벽을 부술 때 사용했던 무기인데, 수레 위에 고정된 커다랗고 끝이 뾰족한 통나무(끝은 쇠로 되어 있음)를 말합니다. 이 모든 것을 모형으로 만들라고 하신 것인데 이 모형은 한마디로 예루살렘이 적군에게 포위를 당하고 공격을 받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즉 장차 예루살렘에 어떤 환난을 겪을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성의 환난이 확실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3절에서 철판을 가져다가 에스겔과 성읍 사이에 두어 철벽을 삼고 성을 포위하는 것처럼 에워싸라는 것으로 보여주십니다. 에스겔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는 선지자입니다. 그러한 선지자와 예루살렘 성읍 사이에 철판이 세워졌다는 것은 하나님과 예루살렘의 단절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유다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단한 철판이 세워진 것처럼 막혀 있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이 유다를 도와서 적군을 물리쳐 주실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큰 착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처럼 예루살렘의 무너짐과 환난은 확실하다는 것을 선지자에게 모형을 만들게 함으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예레미야서 21장을 보면 시드기야 왕이 사람을 예레미야에게 보내어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우리를 치니 청컨대 너는 우리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라 여호와께서 혹시 그의 모든 기적으로 우리를 도와 행하시면 그가 우리를 떠나리라”(렘 21:2)고 말합니다. 시드기야는 예레미야 선지자가 간구하면 하나님이 자신들을 도와서 바벨론을 물리쳐 주실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에게 유리한 방향으로만 생각하고 보고 싶은 것만 보며 듣고 싶은 것만 듣고자 하는 인간의 습성입니다.

 

 

하지만 예레미야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며 불쌍히 여기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예루살렘에 무너지고 극심한 환난에 처하게 되는 것이 확실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가 철판이 가로막힌 것처럼 막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은 자신들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떤 상태인가를 깨닫지 못합니다. 여전히 선지자가 기도하면 하나님이 도와주실 것이라는 착각에 빠져 있습니다. 그래서 렘 21:13절에 보면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골짜기와 평원 바위의 주민아 보라 너희가 말하기를 누가 내려와서 우리를 치리요 누가 우리의 거처에 들어오리요 하거니와 나는 네 대적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죄로 인해서 분노하고 계십니다. 분노로 인해서 예루살렘을 불로 사르겠다고 하시고 그 불을 끌자가 없을 것이라고 엄중히 경고하십니다(렘 21:12). 그런데도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향한 자신들의 상태에 대해 생각하고 깨닫기보다는 자신들이 처한 환난에서 벗어날 것에만 마음을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도우심만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와 있는 이스라엘도 예외는 아닙니다. 지금 바벨론에 잡혀 온 이스라엘 백성의 유일한 희망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도우심과 능력으로 이스라엘이 바벨론을 물리치고 자신들은 해방되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에스겔이 포로로 잡혀 온 당시는 아직 예루살렘이 무너지기 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바벨론을 물리치는 것에 희망을 두는 것입니다.

 

 

렘 28:2,3절을 보면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일러 말씀하시기를 내가 바벨론의 왕의 멍에를 꺾었느니라 내가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이 이 곳에서 빼앗아 바벨론으로 옮겨 간 여호와의 성전 모든 기구를 이 년 안에 다시 이 곳으로 되돌려 오리라”고 말합니다.

 

 

바벨론으로 인해서 위기에 빠진 이스라엘에게 큰 희망이 되는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이 누구의 말이겠습니까? 거짓 선지자 하나냐가 성전에서 제사장과 모든 백성들을 향해서 하는 말입니다. 하지만 예레미야는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돌아오게 하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예레미야의 말은 절망을 선포한 것과 같습니다. 그런 말을 누가 좋아하고 듣고자 하겠습니까? 하지만 분명 하나님의 일은 하나냐의 말이 아니라 예레미야의 말대로 되어 집니다. 그것을 에스겔의 행위를 통하여 확실하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4절부터 보면 다시 에스겔에게 “너는 또 왼쪽으로 누워 이스라엘 족속의 죄악을 짊어지되 네가 눕는 날수대로 그 죄악을 담당할지니라”고 말씀합니다. 에스겔이 왼쪽으로 누워 지내야 하는 날은 삼백 구십일이고 그 날은 이스라엘이 범죄한 기간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 수가 차거든 다시 오른쪽으로 누워 사십 일을 지내라고 하십니다.

 

 

사십 일은 유다 족속의 죄의 기간입니다. 다시 말해서 북쪽 이스라엘은 삼백 구십년간 범죄했고 남쪽 유다는 사십 년간 범죄 했으며 그 사실을 에스겔이 삼백 구십일을 왼쪽으로 누워 지내고 다시 사십 일을 오른쪽으로 누워 지냄으로 보여주라는 것입니다. 왼쪽은 북쪽 이스라엘이고 오른쪽은 남쪽 유다를 가리키는 방향입니다. 이처럼 에스겔은 옆으로 누운 상태로 지내면서 예루살렘을 향해서 계속 하나님의 말씀을 예언해야 했던 것입니다.

 

 

에스겔의 이 행위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8절의 “내가 줄로 너를 동이리니 네가 에워싸는 날이 끝나기까지 몸을 이리 저리 돌리지 못하리라”는 말씀을 보면 하나님이 에스겔로 줄로 묶어 꼼짝 못하게 하셔서 몸을 이리 저리 돌리지 못하게 하십니다. 에워싸는 날이 끝나기까지 에스겔 임의대로 몸을 돌리지 못하게 하시는 것은 죄에 대한 보응이 확실하게 행해질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바벨론 포로 생활의 확실성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할 것은 390일과 40일의 의미입니다. 왜 북쪽 이스라엘의 죄는 390년이고 남쪽 유다의 죄는 40년일까요? 북쪽 이스라엘은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이 왕이 되는 것을 거부한 열 지파가 여로보암을 왕으로 세워 시작한 나라입니다. 이 때 부터 앗수르에 의해 멸망하기까지의 기간이 390년이기 때문에 390일을 왼쪽으로 누워 지내게 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남쪽 유다는 왜 40일일까요? 북쪽 이스라엘에 비해 범죄의 기간이 그만큼 짧다는 뜻일까요? 인간이나 국가에 있어서 범죄의 기간은 의미가 없으며 규정 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의 범죄의 기간은 세상에 날 때부터 시작하여 죽는 순간까지입니다. 때문에 몇 년을 살고 죽든 전 인생이 범죄의 기간에 해당된다고 보면 됩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년 수는 다르다고 해도 죄에 있어서는 차별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다의 범죄의 기간이 40년이라고 해서 북쪽 이스라엘보다 더 낫다는 뜻은 아닙니다. 또한 40년을 제외한 나머지 기간은 범죄 하지 않았다는 의미도 아닙니다. 단지 하나님께서 390년과 40년을 통해서 뭔가 말씀하기 위해 남쪽 유다의 죄를 40년으로 정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40일이라는 기간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는 분명치가 않습니다. 예루살렘 멸망한 후 해방하기까지의 포로생활의 기간으로 보기도 하고 그것을 광야 40년과 같은 의미로 보기도 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생각할 것은 390년과 40년의 합이 430년이라는 것입니다. 430년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종으로 지냈던 기간입니다. 즉 에스겔이 왼쪽, 오른쪽으로 누워 지낸 모든 기간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종살이 했던 기간을 보여주는 것이고, 그리고 그것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와 있는 이스라엘의 형편과도 일치합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애굽의 종살이가 영원한 것이 아니라 출애굽이라는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의 사건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보면 하나님은 에스겔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죄를 보여주시며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애굽에서 종살이 했던 때를 기억하게 함으로써 바벨론에서의 포로가 영원한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은혜로 해방될 것임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희망의 말씀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희망의 말씀은 죄 안에 담겨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자신의 죄를 봄으로써 그 안에서 자신들에게 무엇이 참된 희망인가를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를 보여주고 죄를 외치는 말씀에 대해 눈살 찌푸릴 이유가 없습니다. 그 말씀에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죄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다만 은혜를 외친다면 그 의도는 참으로 불순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죄와 상관없이 인간의 복지를 위해 존재하고 역사하는 인간의 입맛에 맞는 하나님을 선포함으로 인간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애굽의 종이라는 사실과 그런 우리를 해방과 함께 하나님의 영원한 백성으로 삼아주신 은혜를 선포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에스겔이 이스라엘과 유다의 죄를 담당하여 왼쪽으로 390일, 오른쪽으로 40일을 몸을 이리저리 돌리지도 못한 채 지내는 것은 큰 고난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처럼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담당하심으로 고난의 길을 가셨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보여주시고 그 죄에서 해방시키고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로 삼아주시는 은혜의 모든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에스겔과 예루살렘 사이를 철판으로 가로막은 것처럼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철판으로 가로막힌 것처럼 막혀 있었습니다. 그처럼 막힌 것을 십자가로 허무시고 우리에게 함께 하시며 영원히 죄의 포로가 되어 사망에 처해져야 할 우리를 죄에서 구출하시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 되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십자가입니다. 십자가가 바로 언약의 증거이며 십자가를 믿는 것이 우리 안에 무지개가 뜨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보고 싶은 것만 보려고 하는 것 때문에 십자가를 말하면서도 그 은혜에 대해서는 보지 못합니다. 우리가 살아온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임에도 불구하고 그 은혜를 누리지 못하고 감사하지 못합니다. 다만 자기 육신의 유익에만 마음을 두고 있습니다.

 

 

이러한 우리에게 예수님은 끊임없이 십자가를 보게 하십니다. 말씀으로 우리의 둔하고 단단한 마음을 두드리시며 십자가의 은혜에 굴복하게 하십니다. 이것이 성령으로 만들어지는 신자입니다. 우리 자신을 제대로 볼 수 있는 것은 십자가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여러분께 가장 필요한 것도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에서 자신을 제대로 발견하면서 여러분의 마음이 하나님의 은혜로 더욱 더 강하게 이끌림 받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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