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2015.01.25 09:47

(14강) 징벌의 이유

조회 수 3073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겔 6:1-10http://onlycross.net/videos/eze/eze-060110.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2 인자야 너는 이스라엘 산을 향하여 그들에게 예언하여

3 이르기를 이스라엘 산들아 주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주 여호와께서 산과 언덕과 시내와 골짜기를 향하여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나 곧 내가 칼이 너희에게 임하게 하여 너희 산당을 멸하리니

4 너희 제단들이 황폐하고 분향제단들이 깨뜨려질 것이며 너희가 죽임을 당하여 너희 우상 앞에 엎드러지게 할 것이라

5 이스라엘 자손의 시체를 그 우상 앞에 두며 너희 해골을 너희 제단 사방에 흩으리라

6 내가 너희가 거주하는 모든 성읍이 사막이 되게 하며 산당을 황폐하게 하리니 이는 너희 제단이 깨어지고 황폐하며 너희 우상들이 깨어져 없어지며 너희 분향제단들이 찍히며 너희가 만든 것이 폐하여지며

7 또 너희가 죽임을 당하여 엎드러지게 하여 내가 여호와인 줄을 너희가 알게 하려 함이라

8 그러나 너희가 여러 나라에 흩어질 때에 내가 너희 중에서 칼을 피하여 이방인들 중에 살아 남은 자가 있게 할지라

9 너희 중에서 살아 남은 자가 사로잡혀 이방인들 중에 있어서 나를 기억하되 그들이 음란한 마음으로 나를 떠나고 음란한 눈으로 우상을 섬겨 나를 근심하게 한 것을 기억하고 스스로 한탄하리니 이는 그 모든 가증한 일로 악을 행하였음이라

10 그 때에야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내가 이런 재앙을 그들에게 내리겠다 한 말이 헛되지 아니하니라

 

<설교>

 

현대 교회가 하나님께 매달리는 열심은 가히 특별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매달리는 열심으로 천국에 갈 수 있다면 탈락되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열심히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매달리는 열심이 아무리 특별하다고 해도 그것으로 천국 갈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열심을 보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교회가 신자에게 열심을 강조하고 마치 열심이 있어야 복을 받고 천국에 가는 것처럼 가르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지 않으신 것을 신앙인 것처럼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증거는 열심이 아닙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는 세상이 찾고 구하는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참된 뜻에 관심을 두고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아가며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으로 기뻐하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자녀를 위해 하나님이 주신 것이 말씀입니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하고 감사하는 자기 백성을 찾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자녀가 누구인가 하는 것은 인간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이미 확정되어져 세상에 표출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준에 의한 하나님의 자녀, 즉 우리가 생각하는 신자다움은 틀렸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의해 확정된 하나님의 자녀가 어떤 존재인가를 아는 것에 관심을 두어야 합니다. 우리는 기껏해야 교회 일에 열심이 있고 행실이 착하면 하나님의 자녀답다고 칭찬하지만 과연 하나님도 우리의 기준에 따라 우리를 바라보시고 인정하실지 성경을 통해 점검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만약 믿음이 있다고 생각하신다면 무엇보다도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 무엇인가를 먼저 아시고 그 믿음으로 자신의 믿음을 점검해야 합니다. 자기 열심, 자기 느낌, 자기 생각, 자기 경험, 자기 지식을 기준으로 삼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에서 하나님의 기준을 배워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이고 이것을 위해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를 인도하시고 일하시는 하나님의 모든 뜻이 하나님을 아는 하나님의 자녀 되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섣불리 하나님을 안다고 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교만입니다. 구원조차도 우리의 생각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신 원리에 의해서만 된다는 것을 말씀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어야 합니다. 본문의 말씀도 이러한 취지로 주어졌습니다.

 

 

본문이 무슨 내용인 것 같습니까? 우상을 섬긴 이스라엘을 징계하시겠다는 내용으로 생각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이 말씀을 왜 우리에게 주신다고 생각합니까? ‘이스라엘은 우상을 섬기다가 징계를 받았다. 너희는 이스라엘처럼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 주셨다고 생각합니까?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이런 시각으로 이해하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마치 바닷물이 파랗게 보인다고 해서 ‘바닷물 색깔은 파랗다’고 믿는 것과 같습니다.

 

 

3절을 보면 “이르기를 이스라엘 산들아 주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주 여호와께서 산과 언덕과 시내와 골짜기를 향하여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나 곧 내가 칼이 너희에게 임하게 하여 너희 산당을 멸하리니”라고 말씀합니다.

 

 

산과 언덕과 시내와 골짜기를 향하여 말씀하신다는 것은 산당이 이스라엘 곳곳에 자리하고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산당만 멸하신다고 하지 않고 “이스라엘 자손의 시체를 그 우상 앞에 두며 너희 해골을 너희 제단 사방에 흩으리라”(5절)고 하십니다. 이것이 산당을 만들어 우상을 섬긴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징계의 말씀입니다. 따라서 예루살렘이 황폐하게 되고 백성들이 여러 나라로 흩어지며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오게 된 내막은 산당을 만들어 우상을 섬긴 것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이 누구신가에 대한 보편적 생각에 따라 여러 질문을 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누구신가에 대한 보편적 생각은 사랑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제멋대로 상상하고 재단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알고 있는 사랑의 하나님과 이스라엘 자손을 죽여서 그 시체를 우상 앞에 두고 해골을 제단 사방에 흩으시겠다고 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해 보십시오. 과연 동일한 하나님으로 일치가 됩니까? 사랑과 심판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사랑의 하나님이시지만 우상을 섬기는 것은 용서하지 않고 심판 하신다’고 한다면 결국 하나님의 사랑으로도 용납하지 못하시는 것이 있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에 한계와 범위가 있는 사랑으로 추락되고 맙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의 사랑과 일치되려면 우상을 섬겨도 용서해 주시던가 아니면 우상을 섬길 때마다 경고를 하고 가볍게 징계를 해서라도 우상을 멀리 하도록 하는 것이 맞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하나님은 이스라엘 곳곳이 산당으로 가득하도록 방치하셨다가 그 산당으로 인해 심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마치 이스라엘을 심판하실 때를 기다리신 것처럼 보입니다. 맞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심판하실 때를 기다리신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다른 의도가 있다는 의미가 됩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7절에 보면 “또 너희가 죽임을 당하여 엎드러지게 하여 내가 여호와인 줄을 너희가 알게 하려 함이라”고 말합니다. 죽임을 당하여 엎드러지게 하는 하나님의 의도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로 하여금 여호와가 누구신가를 알게 하는 것입니다.

 

 

 누구보다 여호와를 잘 안다고 할 수 있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내가 여호와 인줄 알게 하겠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입장에서는 충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이스라엘은 그들에게 약속하시고 말씀하시고 함께 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이 누구이신 줄을 몰랐습니다. 자기들 멋대로 하나님을 상상했고 섬긴다고 했을 뿐입니다.

 

 

6장에 보면 “내가 여호와인 줄을 너희가 알게 하려 함이라”는 말이 네 번이나 강조되고 있습니다. 6장에서만이 아니라 에스겔 전체에서도 수없이 많이 강조되고 있는 내용입니다. 이것을 보면 하나님의 일하심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여호와를 알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의도라는 것은 10절의 “그 때에야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내가 이런 재앙을 그들에게 내리겠다 한 말이 헛되지 아니하니라”는 말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대로 재앙을 내리시는 것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여호와를 알게 하는 것을 목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처럼 여호와를 알게 하는 것에 목적을 두고 일하시는 것은 그것이 곧 영생이기 때문입니다.

 

 

요 17:3절에 보면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라고 말합니다. 영생은 종교적 업적을 이룬 결과도 열심 있는 행함의 결과도 아닙니다. 오직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영생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앎은 지식의 의미가 아니라 관계적 의미의 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이러한 관계에 있게 하기 위해 재앙을 내리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재앙을 내리시고 심판하시는 분이 그들에게 함께 하시고 인도하시고 도우시고 지키시는 여호와이심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산당을 세우고 우상을 섬긴 것은 신에 대한 생각이 이방인과 동일했기 때문입니다. 이방인처럼 인간의 열심에 따라 차등 있는 복으로 보상을 해 주고, 인간의 기대와 욕구를 충족해주고, 재앙으로부터 지켜주는 신을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들이 섬기는 하나님에게서 그들이 원하는 바를 얻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산당을 끌어들여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한 목적으로 신을 찾은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심판을 받아야 하는 존재라는 것, 그리고 하나님이 자신들을 심판하시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오로지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아야 하는 존재라고만 생각했습니다. 이유는 하나입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조상 대대로 하나님을 믿고 섬겨온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 때문입니다. 지금의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영생이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면 자기 백성의 영생을 위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당연히 하나님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그 일이 산당을 세우고 우상을 섬긴 죄를 책망하시면서 재앙과 심판으로 이스라엘을 죽이시고 해골을 제단 사방에 흩으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관심은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어떤 하나님을 알기를 원하시는 가로 향해야 합니다. 복 받고 편히 살다가 천국 가는 것이 신앙의 목적이나 이유가 되면 안 됩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산당을 세운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8절에 보면 살아남은 자가 등장합니다. 이들 살아남은 자는 이방인들 중에 사로 잡혀 있으면서 여호와를 기억하게 됩니다. 하지만 여호와가 자신들을 포로 생활에서 구출하여 주실 것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음란한 마음으로 여호와를 떠나고 음란한 눈으로 우상을 섬겨 여호와를 근심하게 한 것을 기억하고 스스로 한탄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9절). 이것이 하나님이 살아남게 하신 남은 자입니다.

 

 

남은 자의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자신들이 겪고 있는 재앙을 당연한 결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 모든 가증한 일로 악을 행하였음이라”는 말씀처럼 모든 재앙을 하나님 앞에서 가증한 일을 행한 당연한 결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지금껏 하나님 앞에서 가증한 일을 행해온 것이 자신의 실체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11,12절을 보면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너는 손뼉을 치고 발을 구르며 말할지어다 오호라 이스라엘 족속이 모든 가증한 악을 행하므로 마침내 칼과 기근과 전염병에 망하되 먼 데 있는 자는 전염병에 죽고 가까운 데 있는 자는 칼에 엎드러지고 남아 있어 에워싸인 자는 기근에 죽으리라 이같이 내 진노를 그들에게 이룬즉”라고 말합니다.

 

 

손뼉을 치고 발을 구르는 것은 기쁨의 표현입니다. 즉 가증한 일을 행한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을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과연 이러한 기쁨이 우리에게 가능하다고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불가능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기쁨이 무엇인가를 알고 그 기쁨에 동조하는 믿음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진노를 이스라엘에게 이루신 결과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어떤 결과를 기대하셨고, 어떤 결과를 이루시기 위해 진노하시고 전무후무한 재앙을 내리신 것일까요? 바로 자신이 가증한 일을 행했음을 알고 하나님의 징벌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남은 자의 표출입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인간이 신을 찾는 것은 알 수 없는 재앙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입니다. 재앙, 즉 불행과 상관없는 인생을 꿈꾸며 신을 찾습니다. 자신은 불행한 일은 겪지 말아야 하고 오직 행복한 인생만 주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이 신을 찾는 이유고 이러한 신이 곧 우상이기 때문에 누구든 이러한 이유와 목적으로 하나님을 찾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우상일 뿐이며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일 뿐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이러한 수준에 있다면 하나님은 과연 어떻게 하실까요? 하나님을 어떻게 알고 있든 상관없이 열심에 따라 복을 주고 기도한 대로 재앙을 막아 주시면서 불행이 없는 행복한 삶을 살게 하실까요? 그러한 하나님은 없습니다. 인간의 욕망에 의해 구축된 신, 즉 우상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이방인과 동일한 수준에서 하나님을 생각하고 믿음 아닌 믿음의 길을 간다면 재앙을 내리시고 심판하시면서 인간은 가증한 일을 행한 존재일 뿐이며 따라서 심판이 당연하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존재가 되게 하십니다. 이것이 택한 백성의 영생을 위한 하나님의 일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영원한 저주를 받는 것이 당연할 정도로 가증한 일을 행한 존재라는 것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신자는 모든 삶에서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할 수 없음을 알게 됩니다. 타인이 볼 때는 재앙이라고 할 수 밖에 없는 일에서도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노하시는 이유입니다. 단순히 죄를 범하였기에 진노하시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를 알게 하시고 영생에 있게 하기 위한 사랑에 의한 진노입니다. 때문에 신자는 모든 삶에서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처럼 재앙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와 징벌을 십자가를 통하여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통해서 내가 가증한 존재이고 죽음이 당연함을 알게 됩니다. 이런 우리가 주로 말미암아 살았으니 이것이 기적이고 복이며 은혜입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608 에스겔 (1강) 하늘이 열리며 신윤식 2014.10.19 4509
607 에스겔 (2강) 네 생물의 형상 신윤식 2014.10.26 4083
606 에스겔 (3강) 네 생물과 바퀴 신윤식 2014.11.02 3478
605 에스겔 (4강) 구름에 있는 무지개 신윤식 2014.11.09 3693
604 에스겔 (5강) 듣든지 아니 듣든지 신윤식 2014.11.23 3656
603 에스겔 (6강) 꿀 같은 말씀 신윤식 2014.11.30 3612
602 에스겔 (7강) 주의 영 신윤식 2014.12.07 3420
601 에스겔 (8강) 파수꾼의 책임 신윤식 2014.12.14 3289
600 에스겔 (9강) 입을 닫고 여시는 하나님 신윤식 2014.12.21 3388
599 에스겔 (10강) 390년과 40년 신윤식 2014.12.28 4607
598 에스겔 (11강) 부정한 떡 신윤식 2015.01.04 3463
597 에스겔 (12강) 머리털과 수염을 깎고 신윤식 2015.01.11 3548
596 에스겔 (13강) 여호와의 분노 신윤식 2015.01.18 3132
» 에스겔 (14강) 징벌의 이유 신윤식 2015.01.25 3073
594 에스겔 (15강) 끝이 왔도다 2 신윤식 2015.02.01 3309
593 에스겔 (16강) 죄악의 몽둥이 신윤식 2015.02.08 3129
592 에스겔 (17강) 죄악의 걸림돌 신윤식 2015.02.22 3527
591 에스겔 (18강) 질투의 우상 신윤식 2015.03.01 3805
590 에스겔 (19강) 가증한 일 신윤식 2015.03.08 3128
589 에스겔 (20강) 이마에 표 있는 자 신윤식 2015.03.15 3715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 31 Next
/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