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2015.02.01 09:38

(15강) 끝이 왔도다

조회 수 3309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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겔 7:1-9http://onlycross.net/videos/eze/eze-070109.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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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 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2 너 인자야 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땅에 관하여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끝났도다 이 땅 사방의 일이 끝났도다

3 이제는 네게 끝이 이르렀나니 내가 내 진노를 네게 나타내어 네 행위를 심판하고 네 모든 가증한 일을 보응하리라

4 내가 너를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며 긍휼히 여기지도 아니하고 네 행위대로 너를 벌하여 네 가증한 일이 너희 중에 나타나게 하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5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재앙이로다, 비상한 재앙이로다 볼지어다 그것이 왔도다

6 끝이 왔도다, 끝이 왔도다 끝이 너에게 왔도다 볼지어다 그것이 왔도다

7 이 땅 주민아 정한 재앙이 네게 임하도다 때가 이르렀고 날이 가까웠으니 요란한 날이요 산에서 즐거이 부르는 날이 아니로다

8 이제 내가 속히 분을 네게 쏟고 내 진노를 네게 이루어서 네 행위대로 너를 심판하여 네 모든 가증한 일을 네게 보응하되

9 내가 너를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며 긍휼히 여기지도 아니하고 네 행위대로 너를 벌하여 너의 가증한 일이 너희 중에 나타나게 하리니 나 여호와가 때리는 이임을 네가 알리라

 

 

<설교>

 

성경의 중심은 십자가입니다. 때문에 십자가에 대한 이해가 잘못되면 성경의 모든 해석은 잘못될 수밖에 없습니다. 누구든 성경을 해석할 수는 있지만 십자가에 대한 바른 이해가 없는 해석이라면 그 해석은 십자가 복음에서 벗어나게 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십자가를 말할 때 거의 모든 기독교인들은 자신 만만한 태도를 보입니다. 십자가를 알고 믿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아마 이 부분에 대해서는 누구도 양보하지 않으려고 할 것입니다. 내가 예수를 수십 년을 믿었고, 내가 목사고, 내가 장로고, 내가 집사고, 권사라는 생각과 함께 자신이 십자가에 대해 바르게 알지 못하고 있을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단 1%의 가능성도 두지 않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당신이 알고 있고 믿는다고 하는 그 십자가는 우상입니다’라고 말한다면 과연 인정하고 받아들일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진심으로 기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모두 자신에게 갇혀서 자신만을 보고 있는데 자신을 넘어서 진리의 실체를 본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넘어서 진리의 실체를 보는 것은 성령이 아니고서는 안 되기 때문에 기적이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넘어선다는 것은 나를 위한 십자가, 나의 구원을 위한 십자가를 버리는 것을 뜻합니다. 대개의 교인들은 십자가에서 자기 구원을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 우리의 구원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구원을 위해 십자가 믿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깁니다. 그런데 자기 구원을 위해 십자가를 믿는 것이 죄고 우상이라고 한다면 여러분은 이해하시겠습니까? 이해하기는커녕 이상한 이단 사상으로 들릴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의 내면에는 자기 신앙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평소에 교회를 다니면서 스스로를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으로 인정하고 생활하다가 기도하고 싶을 때가 있거나,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하나님을 부르고 기도하면 하나님이 자신에게 함께 해주시고 도움을 주신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자기 신앙은 모든 종교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납니다. 자신이 신을 믿고 있다고 생각하고 자신이 필요로 할 때 신을 부르면 도와준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특히 종교적인 일을 위해서 도움을 구한다면 신은 그 일을 하는 내 편이 되어주신다고 생각하는 이 모든 것이 자기 신앙이며 이것을 우상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자기 신앙적 색체가 얼마나 강하게 드러나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 사람은 각기 자기 신앙을 가지고 신을 찾는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인간의 자기 신앙을 신앙으로 인정하실까요? 하나님이 인간의 자기 신앙을 인정하시는 분이라면 기독교의 우상은 말 그대로 하나님과 예수님이 아닌 부처를 말하거나 장승이나 단군이라는 형상을 만들어 세우는 것으로 국한 될 것입니다. 결국 기독교와 다른 종교가 신앙의 속성과 본질은 같은데 단 하나, 믿음의 대상이 하나님이 아니고 예수가 아니라는 이유 때문에 지옥에 보내는 아주 편협한 신, 편협한 종교로 드러날 뿐입니다. 지금 세상이 기독교를 그렇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현대 기독교에 필요한 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게 됨으로 지금까지 신앙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죄인 된 인간의 자기 신앙이었을 뿐,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신앙이 아니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참된 하나님을 아는 길로 나아가는 것이 필요하고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말씀을 주시면서 이끌어 가시는 이유입니다. 에스겔도 이러한 하나님의 의도와 함께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6장의 내용에서 반복되어 강조되는 것은 “내가 여호와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였습니다. 이것은 본문 4절에서도 언급되고 있고 앞으로 여러분이 에스겔을 살펴 가면서 계속 접하게 되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내가 여호와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는 말씀은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일지 못한 상태에 있었음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자신들이야 말로 누구보다 여호와를 잘 알고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알고 있던 여호와가 여호와가 아니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6장에서 에스겔을 세워 이스라엘에 대한 징벌과 재앙에 대해 예언하게 하신 하나님은 7장에서도 이스라엘에게 임할 재앙에 대해 말씀합니다. 특히 본문에서는 끝났다는 말이 여러 번 반복됩니다. 끝났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최후, 즉 마지막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이 내리시는 재앙이 크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끝내버릴 큰 재앙으로 이스라엘의 행위를 심판하고 모든 가증한 일에 대해 보응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5절에서 ‘비상한 재앙’으로 표현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진노하시고 재앙을 내리신다고 예언하시면 이스라엘이 취해야 할 태도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아마 하나님이 진노하시는 이유를 찾아 알고 진노하시는 죄에서 떠나는 것이라는 생각을 많이 할 것입니다. 죄에서 떠나면 하나님도 재앙을 내리지 않으실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바로 앞에서 말씀드렸던 자기 신앙임을 알아야 합니다. 나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를 믿는 것과 같은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3절을 보면 “이제는 네게 끝이 이르렀나니 내가 내 진노를 네게 나타내어 네 행위를 심판하고 네 모든 가증한 일을 보응하리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을 아예 끝내 버릴 정도로 하나님이 진노하시는 이유는 이스라엘의 악한 행위, 가증한 일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6장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이스라엘에 가득한 산당, 즉 우상 섬김입니다.

 

 

우리는 그까짓 우상 다 버리면 되지 않느냐라고 쉽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상은 인간의 본성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즉 신으로 섬겼던 형상 하나를 부수는 것으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우상에는 인간이 추구하는 자신의 인생, 꿈, 행복 등 모든 것이 담겨 있습니다. 이것을 위해 신을 찾는 것이 자기 신앙입니다.

 

 

따라서 우상을 부순다는 것은 자신이 원하는 인생을 포기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때문에 누구도 자기 신앙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인생의 시작부터 끝까지 나를 위한 신, 나를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으로 존재하기를 원하고 그 하나님만 참된 신으로 섬기겠다고 고집부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이 우상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이해하십니까?

 

 

4절에 보면 “내가 너를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며 긍휼히 여기지도 아니하고 네 행위대로 너를 벌하여 네 가증한 일이 너희 중에 나타나게 하리니 내가 여호와 인줄을 너희가 알리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9절에서도 “내가 너를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며 긍휼히 여기지도 아니하고 네 행위대로 너를 벌하여 너의 가증한 일이 너희 중에 나타나게 하리니 나 여호와가 때리는 이임을 네가 알리라”고 말합니다.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고 긍휼히 여기지도 아니한다는 것은 지금까지 이스라엘을 불쌍히 여기셨고 긍휼히 여기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을 행위대로 벌하시겠다고 하신 것은 이스라엘의 행위가 처음에는 좋았다가 후에 악해졌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행위의 악함은 처음부터였습니다. 이스라엘을 포함하여 모든 인간의 행위는 선악과 사건 이후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을 불쌍히 여기시고 긍휼히 여기심으로 그들의 행위를 벌하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그것을 제사를 통해서 깨닫고 확인했어야 합니다.

 

 

제사는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존재해 온 것이 온전히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심과 긍휼히 여겨주신 은혜의 결과임을 보여줍니다. 죄 없는 제물의 희생이 그 사실을 백성을 향해 외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당을 세우고 우상을 섬긴 것은 존재의 근거를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 세상에 두고 있는 것이기에 가증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생각할 것은 우리가 하나님이 창조하신 땅에서 살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이 불쌍히 여기시고 긍휼히 여겨주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땅에서 존재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 덕분이라는 것을 잊고 살아갑니다. 때문에 존재한다는 것으로 감사하지 못하고 내가 원하는 나로 존재하기 위해서 자신의 소원을 들어줄 신을 찾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한 일임을 드러내시기 위해서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며 긍휼히 여기지도 아니하며 행위대로 벌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그동안 불쌍히 여기시고 긍휼히 여기셨던 것은 이스라엘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에서 끊어진 존재가 무엇으로 존재하는지를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을 세우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이방 나라처럼 세상에서 부강하게 되는데 뜻을 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증거물로 존재하는데 뜻을 두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이 일에 실패한 것입니다.

 

 

6절에 보면 "끝이 왔도다, 끝이 왔도다 끝이 너에게 왔도다 볼지어다 그것이 왔도다"라고 말합니다. 끝이 왔다는 것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선악과를 먹고 하나님의 생명에서 끊어지고 죽음 아래 있게 된 것이 이미 끝났음을 의미합니다. 그처럼 끝난 인간을 지금까지 끌어 오신 것은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가 살게 한다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그 일에 실패 했기에 끝이 왔다는 선언을 하시는 것입니다.

 

 

끝이 왔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알지 못하는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선언입니다. '끝이 언제 옵니까?'라고 물을 필요가 없습니다. 끝이 언제 오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세상은 끝날 수밖에 없고 끝이 도달하는 사태를 누구도 피할 수가 없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제 우리는 끝이 선포된 현실에서 참된 복이 무엇인가에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끝이 선포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행하실 일은 심판입니다. 이것이 세상이 처한 현실입니다. 심판이 계획되어 있는 것입니다. 심판에서 우리를 건지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으로 나타나야 할까요?

 

 

'예수 믿고 천국가자'라고 하는 것은 관심이 자기 구원으로 향해있는 것입니다. 나의 구원이 관심이 아니라 나를 심판에서 건지시고 생명에 있게 하신 분에게 관심을 두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일에 관심을 두고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나타내는 것을 자신을 세워서 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일임을 생각한다면 자신이 원하는 복을 위해 자기 공로를 자랑하는 자기 신앙으로는 나아가지 않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끝이 왔다고 선포하시는데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끝이 왔음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도우시면 고통에서 벗어나 다시 평안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끝을 생각하지 않고 현실의 삶만 생각하는 지금의 세상과 다르지 않습니다.

 

 

모두가 끝을 무시한다 해도 우리는 끝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을 끝내고 심판하시는 것을 당연하게 여겨야 합니다. 그럴 때 예수님의 피로 인해 끝에서 건짐 받았다는 것이 참된 복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신자는 세상에서 그 복을 보여주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 이성희 2015.02.14 10:21
    목사님,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윗 글을 대구서머나카페 복음나눔란으로 스크랩해 갑니다...^^
  • 신윤식 2015.02.15 09:21
    예 감사합니다. 저도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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