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2015.02.08 09:39

(16강) 죄악의 몽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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겔 7:10-13http://onlycross.net/videos/eze/eze-071013.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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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0 볼지어다 그 날이로다 볼지어다 임박하도다 정한 재앙이 이르렀으니 몽둥이가 꽃이 피며 교만이 싹이 났도다

11 포학이 일어나서 죄악의 몽둥이가 되었은즉 그들도, 그 무리도, 그 재물도 하나도 남지 아니하며 그 중의 아름다운 것도 없어지리로다

12 때가 이르렀고 날이 가까웠으니 사는 자도 기뻐하지 말고 파는 자도 근심하지 말 것은 진노가 그 모든 무리에게 임함이로다

13 파는 자가 살아 있다 할지라도 다시 돌아가서 그 판 것을 얻지 못하리니 이는 묵시가 그 모든 무리에게 돌아오지 아니하고, 사람이 그 죄악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목숨을 유지할 수 없으리라 하였음이로다


 

 

<설교>

 

하나님의 분노는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보여줍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하나님이 분노하시고 재앙을 내려 심판하실 정도로 가증한 일을 행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8절에서 “이제 내가 속히 분을 네게 쏟고 내 진노를 네게 이루어서 네 행위대로 너를 심판하여 네 모든 가증한 일을 네게 보응하되”라고 표현합니다. 또한 9절에서 “내가 너를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며 긍휼히 여기지도 아니하고”라고 말한 것처럼 불쌍히 여김 받고 긍휼히 여김 받을 가치도 없는 인간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하나님의 분노에 대한 내용을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듭니까?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분노와 심판을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라는 단순 도식으로 접근하여 이해합니다. 하지만 과연 하나님의 심판이 죄에 대한 징벌을 목적으로 하고 있을까요?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그런 분이라면 우리는 매일매일 징벌을 받고 비참하게 버려져야 할 존재에 지나지 않습니다.

 

 

맞습니다. 우리는 그런 존재일 뿐입니다. 구원을 받아야 할 가치가 없으며 복을 누리며 편히 살아야 할 가치도 없는 존재들일 뿐입니다. 우리가 하는 것이라곤 하나님을 분노케 하는 것뿐입니다. 명목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늘 내 영광, 내 기쁨에 목메어 있고 내 뜻을 위해서만 살아갑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이 구원 받아야 할 이유와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까? 그 이유를 단 하나라도 찾아낼 수 있습니까? 창 18:20,21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또 이르시되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무거우니 내가 이제 내려가서 그 모든 행한 것이 과연 내게 들린 부르짖음과 같은지 그렇지 않은지 내가 보고 알려 하노라”고 말씀합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행한 것이 평소 하나님을 부르짖고 찾았던 것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이 말씀에서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을 감지합니다. 그리고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려 하시나이까”라고 하면서 “그 성 중에 의인 오십 명이 있을지라도 주께서 그 곳을 멸하시고 그 오십 의인을 위하여 용서하지 아니하시리이까”(창 18:24)라고 묻습니다. 아브라함의 이 물음은 의인 십 명으로까지 내려갔다는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 내용에서 소돔과 고모라의 죄가 무거워 멸망을 받아야 하지만 의인이 있었다면 그 죄가 용서되고 멸망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 것임을 압니다. 그렇게 보면 소돔과 고모라의 불행은 의인이 없었다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께 내어놓을 의는 없습니다. 이것은 멸망에서 구원 받아야 할 이유도 조건도 가치도 없음을 말합니다. 이러한 우리에게 하나님이 찾으시는 의가 하늘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의의 존귀함과 가치는 하나님의 분노와 함께 드러나는 것입니다.

 

 

우리 또한 하나님의 분노와 징벌이 마땅한 존재라고 했습니다. 구원 받아야 할 가치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우리를 위해 하늘의 하나님이 오셔서 우리의 의가 되어주신 것입니다. 이처럼 구원 받을 가치가 없는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크신 분노와 징벌에서 이와 같은 하나님의 사랑을 만날 수 있습니다.

 

 

10절을 보면 “볼지어다 그 날이로다 볼지어다 임박하도다 정한 재앙이 이르렀으니 몽둥이가 꽃이 피며 교만이 싹이 났도다”라고 말합니다. 몽둥이는 징벌의 도구입니다. 하나님이 몽둥이를 드셨다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분노의 심판을 야기하는 가증한 일을 행했다는 의미가 될 것입니다.

 

 

따라서 몽둥이가 꽃이 피었다는 표현은 나무가 꽃을 피우는 것이 절정인 것처럼 이스라엘의 죄가 절정에 이르렀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몽둥이와 교만은 같은 의미의 표현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싹이 났다는 것은 크게 자라갈 것을 의미하는 것만큼 이스라엘의 교만이 왕성하게 자라갈 정도로 죄악으로 뭉쳐진 이스라엘의 완악한 인간성을 상징하는 표현인 것입니다.

 

 

또한 11절을 보면 “포학이 일어나서 죄악의 몽둥이가 되었은즉 그들도, 그 무리도, 그 재물도 하나도 남지 아니하며 그 중의 아름다운 것도 없어지리로다”고 말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포학은 가난하고 힘없는 약자를 무시하고 멸시하며 억압하고 핍박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이스라엘은 이러한 포악으로 가득한 존재가 되었고 하나님은 그들의 죄를 징벌하기 위해 몽둥이를 드셔야 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징벌로 인해 그들도, 그 무리도, 그 재물도 하나도 남지 아니하며 그 중의 아름다운 것도 남지 않고 없어질 것입니다. 이스라엘에 남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모두 죽게 될 것이고, 그들이 의지했던 재물 또한 남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심판은 세상이 소중하게 여기고 귀하게 여겼던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될 뿐임을 드러내는 현장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세상이 이와 같은 하나님의 심판과 무관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가증한 일에 대해 반드시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믿는 신자가 믿음으로 바라보는 세상의 실상입니다. 그 날에 세상에 남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제아무리 아름답게 여기고 소중히 생각하며 의지했던 모든 것들이 하나도 남지 않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이라면 과연 현재를 어떻게 바라보며 살아가야 할까요? 이러한 문제는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믿음에 자기 희망을 담고 기대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세상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가득한 포악과 교만을 보지 않고 힘 되는 것, 소중한 것, 아름다운 것만 바라봅니다.

 

 

그리고 그러한 것을 누리는 삶을 꿈꾸고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그러한 생각과 기대가 헛되다는 곳을 오늘 말씀으로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말씀에 의해서 우리의 헛된 생각이 여지없이 부서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앞에 이스라엘을 세우시고 그들의 죄를 폭로하시며 몽둥이를 드시는 하나님으로 나타나신 이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본문의 말씀에서 희망이 보이십니까? 이스라엘에게 분노하시고 재앙을 내려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행하심에서 보게 되는 희망이 있습니까? 많은 사람들은 본문과 같은 내용에 희망 따위는 없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희망은커녕 절망만 보인다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희망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심판이 세상에 남을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에 희망 둘 것이 없음을 알게 하는 것이 심판이 주는 희망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하심의 방식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부자가 되고 싶어 합니다. 예수님께서 부자가 천국에 가기가 낙타가 바늘구멍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말씀하셨는데도 사람들은 아랑곳 하지 않고 부자 되고 싶은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습니다. 부자 되려고 애쓰지 말라고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너나 할 것 없이 부자 되는 일에 힘을 쏟습니다. 부자가 왜 천국가기가 힘들다고 말씀하시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가 하나님의 분노, 심판과 상관이 없다고 생각합니까? 지금의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에게서 복을 기대하고 편안한 삶을 꿈꿉니다. 재앙이 없이 건강하게 오래 사는 편안한 삶을 원합니다. 자신을 때리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몽둥이 꽃이 피고 교만이 싹이 난 상태에 있음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정한 그 날에 이미 이르렀고 임박했다는 사실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 양편에도 십자가에 못 박힌 두 강도가 있었습니다. 누가복음에서는 한 사람은 예수님을 비방하고 한 사람은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고 믿음으로 낙원에 갑니다. 예수님을 비방한 한편 강도는 자신이 자기의 죄로 죽는 것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수 당신이 메시아라면 당신과 나를 구원해 보라’고 하면서 자신을 십자가에서 구원하지 못하는 예수님을 비방했습니다.

 

 

하지만 또 한편의 다른 강도는 십자가에서의 고통과 죽음을 자신이 행한 일에 대한 상당한 보응으로 여겼고 따라서 그렇게 죽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자신을 구원해 달라고 한 것이 아니라 다만 기억해 달라고 부탁한 것입니다.

 

 

두 강도의 차이는 자신의 악을 보는 것과 보지 않는 것에 있습니다. 자신의 악을 보지 않은 강도는 예수께 자기 구원을 말하지만 자신의 악을 바라보는 강도는 구원이 아니라 고통과 죽음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심판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끌어가고자 하는 자리는 바로 이것입니다. 자신의 악함을 보게 하고 하나님의 징벌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신의 자리를 보게 되면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구원 받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12절을 보면 “때가 이르렀고 날이 가까웠으니 사는 자도 기뻐하지 말고 파는 자도 근심하지 말 것은 진노가 그 모든 무리에게 임함이로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약속의 땅을 기업으로 주셨고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 분배 받은 땅을 대대로 지키며 살아가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레 25:23절에서는 “토지를 영구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니라 너희는 거류민이요 동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땅을 팔 수 없게 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생존의 문제로 하나님이 주신 땅을 사고파는 상황에 이르게 됩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땅을 사는 것으로 기뻐하고 땅을 파는 것으로 근심함으로 평강이 개어진 사회가 된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심판은 그 모든 것도 무의미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땅을 사고파는 것으로 기뻐하고 근심하는 것조차 부질없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눅 17:27-29절을 보면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더니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망시켰으며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부터 불과 유황이 비오듯 하여 그들을 멸망시켰느니라”고 말합니다.

 

 

노아나 롯의 때의 공통점은 세상이 하나님의 심판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유는 일상생활만을 삶의 전부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일상생활만 바라봤고 일상의 기쁨을 위해 살았기 때문에 자신들의 죄의 상태와 하나님의 일하심에는 눈을 돌리지 않았습니다. 일상생활 또한 지나가는 것이고 사라질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한 것입니다. 일상생활만 행복하면 된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인생은 하나님의 심판 앞에 놓여 있고 영원한 생명과 사망이라는 두 길 앞에 놓여 있는 현실에는 무관심한 것입니다.

 

 

가증한 일로 가득한 것이 세상임을 안다면, 그리고 우리 자신이 몽둥이가 꽃이 피고 교만이 싹이 난 이스라엘과 같음을 안다면 우리가 바로 죄악으로 인해 목숨을 유지할 수 없는 자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우리에게 소망은 그리스도일 뿐입니다. 목숨을 유지할 수 없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은혜로 그리스도의 은총 안에서 하루하루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주어진 취지입니다.

 

 

말씀은 하나님의 크신 분노와 심판 아래에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게 합니다. 그리스도를 보게 되면 내가 전부인 날 위한 삶에서 그리스도가 나의 전부이기를 원하는 삶이 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이러한 삶의 길에서 그리스도가 주는 기쁨이 무엇인가를 배워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축복이며 우리를 이러한 축복의 세계로 이끄시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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