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2015.02.22 00:50

(17강) 죄악의 걸림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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겔 7:14-27http://onlycross.net/videos/eze/eze-071427.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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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4. ○그들이 나팔을 불어 온갖 것을 준비하였을지라도 전쟁에 나갈 사람이 없나니 이는 내 진노가 그 모든 무리에게 이르렀음이라

15. 밖에는 칼이 있고 안에는 전염병과 기근이 있어서 밭에 있는 자는 칼에 죽을 것이요 성읍에 있는 자는 기근과 전염병에 망할 것이며

16. 도망하는 자는 산 위로 피하여 다 각기 자기 죄악 때문에 골짜기의 비둘기들처럼 슬피 울 것이며

17. 모든 손은 피곤하고 모든 무릎은 물과 같이 약할 것이라

18. 그들이 굵은 베로 허리를 묶을 것이요 두려움이 그들을 덮을 것이요 모든 얼굴에는 수치가 있고 모든 머리는 대머리가 될 것이며

19. 그들이 그 은을 거리에 던지며 그 금을 오물 같이 여기리니 이는 여호와 내가 진노를 내리는 날에 그들의 은과 금이 능히 그들을 건지지 못하며 능히 그 심령을 족하게 하거나 그 창자를 채우지 못하고 오직 죄악의 걸림돌이 됨이로다

20. 그들이 그 화려한 장식으로 말미암아 교만을 품었고 또 그것으로 가증한 우상과 미운 물건을 만들었은즉 내가 그것을 그들에게 오물이 되게 하여

21. 타국인의 손에 넘겨 노략하게 하며 세상 악인에게 넘겨 그들이 약탈하여 더럽히게 하고

22. 내가 또 내 얼굴을 그들에게서 돌이키리니 그들이 내 은밀한 처소를 더럽히고 포악한 자도 거기 들어와서 더럽히리라

23. ○너는 쇠사슬을 만들라 이는 피 흘리는 죄가 그 땅에 가득하고 포악이 그 성읍에 찼음이라

24. 내가 극히 악한 이방인들을 데려와서 그들이 그 집들을 점령하게 하고 강한 자의 교만을 그치게 하리니 그들의 성소가 더럽힘을 당하리라

25. 패망이 이르리니 그들이 평강을 구하여도 없을 것이라

26. 환난에 환난이 더하고 소문에 소문이 더할 때에 그들이 선지자에게서 묵시를 구하나 헛될 것이며 제사장에게는 율법이 없어질 것이요 장로에게는 책략이 없어질 것이며

27. 왕은 애통하고 고관은 놀람을 옷 입듯 하며 주민의 손은 떨리리라 내가 그 행위대로 그들에게 갚고 그 죄악대로 그들을 심판하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

 

 

<설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기복신앙은 있을 수 없습니다. 십자가 은혜는 세상의 복을 추구하고 기도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가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기복신앙은 십자가 은혜의 가치를 모른다는 뜻이고, 십자가 은혜의 가치를 모른 자의 신앙은 신앙의 흉내를 내는 가짜에 불과할 뿐이며, 그가 하는 모든 고백 또한 비록 천사의 말을 한다 할지라도 뜻도 알지 못한 채 의미 없이 지껄이는 앵무새의 말과 같다 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 은혜가 하나님 사랑의 완성이라는 것을 아십니까? 십자가 은혜가 하나님 사랑의 완성임을 안다면 그 앎은 신자를 십자가 은혜만으로 부족함이 없는 세계로 이끌어 갑니다. 그러한 은혜의 세계에 눈이 열리고 그 세계에 마음을 두게 된 신자에게서 기복신앙은 나올 수 없다는 것이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기복신앙은 땅의 것으로 자신을 채우고자 하는 인간 욕망의 산물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아들을 화목제물 삼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덮으셔서 양자의 신분을 얻게 하신 것을 믿는 것입니다. 십자가로 완성된 사랑을 믿고 의지하고 사랑만으로 부족함이 없는 세계로 인해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이 신앙의 세계이며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는 것이 참된 복음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복음이 증거하는 하나님의 사랑은 복음 밖의 세계가 알고 있고 기대하는 신의 사랑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알고 받아들이십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여러분이 많이 배워서가 아니고 많이 들어서도 아니며 많이 알아서도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역사하여 여러분을 사랑의 세계로 이끄신 결과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사랑으로 사는 신자라는 존재는 하나님의 이끄심으로 인해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스스로의 결단으로 하나님을 자신이 믿을 신으로 선택하여 신자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자신을 택하시고 이끄셨다는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오직 자신을 위한 하나님만 생각할 뿐이고 이런 생각에 의해 기복신앙이 진리로 자리하고 하나님 또한 인간의 복을 위한 분으로 그 이름이 불리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에 있어서 잊지 말아야 할 분명한 사실은 모든 일의 주도권은 내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입니다. 세상의 모든 일은 나를 위한 나 중심으로 흘러가지 않고 하나님을 위한 하나님 중심으로 하나님에 의해 이끌려 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란 존재는 무엇일까요? 한마디로 말해서 ‘하나님의 도구’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도구일 뿐입니다.

 

 

그런데 누구라도 하나님의 도구라는 말은 쉽게 인정하고 받아들이지만, 그 한편에는 ‘하나님의 도구로 하나님이 사용하셨으니 그에 따른 보상을 받는다’는 생각이 자리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보상’에 대한 기대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로 자신의 주인이 하나님이시기에 하나님 마음대로 도구로 사용하실 수 있음을 간과한 것입니다.

 

 

주인이 자신의 도구를 마음대로 사용할 권한이 있음은 당연한 것이고 사용한 후에 도구에게 보상을 주는 일은 없음을 생각하지 못한 것입니다. 끝까지 자신이 자기의 주인으로 자리하며 자신을 놓지 않은 것이고 이것이 인간의 죄라는 사실을 알지 못함으로 결국 우상이라는 어둠을 빛으로 착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택한 백성이 이러한 잘못 됨에 갇혀 있다면 하나님은 어떻게 일하실까요? 일단 인간의 잘못 됨을 옹호하시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잘못된 생각을 깨뜨리시고 참된 말씀의 세계로 이끄셔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눈을 뜨게 하시고 그 은혜와 사랑만으로 기뻐하게 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부어지는 참된 복이며 이 복은 인간이 깨뜨려지는 자리에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징벌과 저주가 인간을 철저히 깨뜨리시고 부숴 버리기 위한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셔야 합니다.

 

 

19절에 보면 “그들이 그 은을 거리에 던지며 그 금을 오물 같이 여기리니 이는 여호와 내가 진노를 내리는 날에 그들의 은과 금이 능히 그들을 건지지 못하며 능히 그 심령을 족하게 하거나 그 창자를 채우지 못하고 오직 죄악의 걸림돌이 됨이로다”고 말합니다.

 

 

은을 거리에 던져 버리고 금을 오물처럼 여기는 것은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은과 금은 부의 상징이며 많을수록 자신을 과시할 수 있고 그것으로 행복해 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은을 쓰레기처럼 취급하고 금을 더러운 오물처럼 여기게 된다면 그것은 은과 금의 가치가 사라지고 오히려 더러운 것으로 여기게 되는 어떤 상황이 발생했음을 뜻합니다. 그것은 여호와의 진노로 말미암아 기근과 전염병이 발생한 것입니다.

 

 

기근이 발생했을 때 가장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것은 무엇이든 창자를 채울 수 있는 것입니다. 기근의 상황에서는 맛이 있고 없고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창자를 채울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간절히 원하게 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은과 금이 지니고 있던 가치는 사라지게 됩니다.

 

 

평소의 상황이라면 은과 금으로 얼마든지 양식을 구할 수 있지만 기근의 상황에서는 무용지물입니다. 자신의 생명이 되는 양식을 무엇과도 바꾸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쌀 한 톨에 금 한 덩이를 준다 해도 바꾸지 않습니다. 창자를 채우는 양식은 쌀 한 톨이지 금 한 덩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쌀 한 톨이 지니고 있는 가치를 보지 못하고 잊고 살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은과 금이 비록 창자를 채울 수는 없다 해도 거리에 던지거나 오물 같이 여기지는 않을 것입니다. 기근이 지나가면 은과 금의 가치는 다시 회복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보면 기근의 상황에서 단지 창자를 채우지 못한다는 것 때문이 아닌 다른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것을 19절에서 ‘죄악의 걸림돌’이라는 말로 설명합니다.

 

 

은과 금은 양식이 되지 못할뿐더러 여호와의 진노에서 건지지 못하며 그 심령에 만족이 되지도 못합니다. 은과 금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오직 죄악의 걸림돌이었을 뿐입니다. 즉 은과 금이 그들을 넘어지게 하여 죄에 빠뜨리는 걸림돌이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죄악의 걸림돌을 사랑하고 귀하게 여기며 자신의 행복과 즐거움의 도구로 여겼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와의 진노로 인한 기근과 전염병, 즉 심판으로 인해서 은과 금을 죄악의 걸림돌로 바라보게 되고 은을 거리에 던지며 금을 오물로 여기는 새로운 시각이 있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있기 전에 이스라엘은 은과 금을 화려한 장식으로 삼았습니다. 자기 몸을 은과 금으로 화려하게 장식하여 스스로를 과시하면서 마치 특별한 존재가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지고 그것을 즐거움으로 삼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께는 교만이었음을 몰랐습니다. 다만 자신에게 즐거움이 되는 것으로 만족했을 뿐입니다.

 

 

이스라엘은 또 은과 금으로 가증한 우상과 미운 물건을 만들었습니다. 은과 금으로 우상을 만든 것은 우상의 가치를 높이기 위함입니다. 자신들이 믿고 의지할 만한 가치 있는 특별한 신적 존재로 만들기 위해 은과 금을 재료로 한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그들에게 오물이 되게 하겠다고 하십니다. 그렇게 보면 오물에 지나지 않은 것을 귀히 여기고 그것으로 즐거워하고 행복해하고자 했다는 것이 인간의 어리석음과 함께 헛된 욕망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알지 못하는 모든 인간들은 오물을 행복으로 삼는 어리석음 속에서 헛된 욕망으로 살아갑니다. 그리고 헛된 욕망으로 인해 신앙을 복의 수단으로 여기는 기복 신앙이 있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의 실존의 모습이며 우리 자신도 예외일 수는 없습니다. 이러한 우리에게 하나님이 말씀으로 나타나신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보지 못하고 있는 실존을 보게 하시고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로 이끄시기 위함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드리면 하나님과의 관계에는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보상으로 기대하는 복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것이야 말로 온 몸이 어둠의 상태에 있는 것임을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 깨달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생명의 세계로 들어가는 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은과 금으로 우상을 만든 것에 대해서는 진노하시면서 성전은 왜 은과 금으로 장식하셨을까요? 출 26장을 보면 성막을 만들라고 하시면서 그 재료와 방법과 구조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십니다. 그리고 성막의 재료에는 은과 함께 금도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제사장의 옷도 금과 함께 여러 보석으로 장식하게 하셨고 하나님의 언약궤 역시 순금으로 안팎을 싸고 금으로 테를 만들었으며 금으로 고리 네 개를 만들었으며 속죄소와 그룹도 금으로 만들었습니다. 은과 금으로 우상을 만드는 것은 안되고 성전과 그 기구를 만드는 것은 된다는 것입니까?

 

 

아예 성막을 만들라는 지시 자체가 하나님의 명령에 모순이 됩니다. 하나님은 십계명에서 아무 형상도 만들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성막을 만들라고 하시고 하나님이 임재 해 계시는 상징적인 것으로 법궤를 만들라고 하신 것입니까? 이것은 이스라엘이 성막을 어떻게 여겼는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성막을 귀하게 여겼습니다. 초라한 성막이 아니라 은과 금으로 장식된 성막과 함께 하면서 성막을 하나님의 복이 주어지는 통로로 여긴 것입니다. 성막이 우상이 된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하나님은 성막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본성에 자리하고 있는 죄를 드러내시고 그들을 진노와 심판으로 대하고자 하신 것임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만약 현 시대에 성막과 함께 법궤가 그대로 존재한다면 어떤 대접을 받을지는 불을 보듯 뻔합니다. 누구라도 성막이 있는 이스라엘을 가고 싶어 안달일 것이고, 성막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느끼며 성막에 와 있다는 것만으로 자신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는 것으로 착각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보이는 것에서 신의 흔적을 찾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처럼 거룩하고 존귀한 장소로 여겼던 성전의 성소조차 이방인에 의해 더럽힘을 당하게 하겠다고 하십니다(24절). 그것으로 이스라엘에게 죄악의 걸림돌이었던 모든 것을 무너뜨리시고 아무 가치도 의미도 없는 것들이었음을 알게 하심으로 은을 거리에 던지고 금을 오물로 여기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말씀들로 눈을 떠야 하는 것은 지금껏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겼던 것들의 허망함입니다. 우리가 귀히 여기고 손에 쥐고 싶어 했던 것들은 나를 가치 있게 만들어 줄 장식품들이었습니다. 우리의 문제는 늘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추구한다는 것입니다. 더 나은 삶을 사는 것으로 즐거움을 누리고 행복해지고자 하는 헛된 욕망이 우리의 창자를 채울 수 없는 것들에 집착하게 하고 그것이 있고 없음으로 웃고 우는 헛된 모습을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은혜를 알지 못할 때 은과 금은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어 줄 가치 있는 것으로 자리합니다. 행복이 아닌 행복으로 우리를 걸려 넘어지게 하고 죄에 빠지게 합니다. 죄에 빠져 저주와 심판의 길로 가면서도 그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 인간의 형편입니다. 우리가 그러했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말씀으로 다가오셔서 십자가 은혜에 눈을 뜨게 하시고 그 모든 것이 우리를 저주에서 건지지 못하며 심령을 족하게 하거나 창자를 채우지 못하고 오직 죄악의 걸림돌일 뿐임을 알게 하십니다.

 

 

우리는 항상 내가 잘되는 일만 생각합니다. 그것이 사람의 일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이 잘되는 것에 뜻을 두고 일하십니다. 하나님의 잘됨은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 받으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 있는 신자가 뜻을 두고 추구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잘됨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으면 우리는 모든 것을 나를 위한 것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교회도 신앙도 하나님도 예수 그리스도도 모두 내가 복을 받아 잘되고 즐겁고 행복한 삶을 누리기 위한 수단과 방법으로 기대하게 됩니다.

 

 

때문에 우리가 십자가 은혜에 눈을 떴다는 것은 하나님의 크신 은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령을 보내셔서 영원한 저주와 심판의 고통을 받아야 할 우리를 건지시고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와 은혜만으로 기뻐하고 즐거워 할 수 있는 복된 삶이 있음을 알게 하시는 것이 사랑의 역사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입니다.

 

 

결국 이스라엘을 불쌍히 여기시는 자비하심과 긍휼과 사랑으로 그들에게 진노하시고 재앙과 징벌을 겪게 하시는 것입니다. 26절의 말씀처럼 환난에 환난이 더하는 상황조차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심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십자가의 은혜를 알게 하시려고 환난으로도 인도하십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천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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