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2015.03.01 09:24

(18강) 질투의 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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겔 8:1-4http://onlycross.net/videos/eze/eze-080104.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 여섯째 해 여섯째 달 초닷새에 나는 집에 앉았고 유다의 장로들은 내 앞에 앉아 있는데 주 여호와의 권능이 거기에서 내게 내리기로

2 내가 보니 불 같은 형상이 있더라 그 허리 아래의 모양은 불 같고 허리 위에는 광채가 나서 단 쇠 같은데

3 그가 손 같은 것을 펴서 내 머리털 한 모숨을 잡으며 주의 영이 나를 들어 천지 사이로 올리시고 하나님의 환상 가운데에 나를 이끌어 예루살렘으로 가서 안 뜰로 들어가는 북향한 문에 이르시니 거기에는 질투의 우상 곧 질투를 일어나게 하는 우상의 자리가 있는 곳이라

4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거기에 있는데 내가 들에서 본 모습과 같더라

 

 

<설교>

 

우리가 하나님을 신앙한다고는 하지만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분명히 알고 신앙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인식을 넘어서 계시는 분이기 때문에 피조물인 우리는 아예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인식한다거나 알 수 있는 수준에 있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신앙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누구신지 분명히 알지 못한 상태에서도 신앙이 가능한 것일까요?

 

 

이런 문제에 대해 대개의 기독교인들은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이유는 애당초 하나님을 신앙하고자 하는 이유가 하나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게 되는 것보다 자기에게 만족이 되는 삶을 추구하는 것에 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신앙의 의미와 그 내용보다 결과에 목적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고 원하는 결과, 즉 복을 얻기 위해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수단과 방법에 치중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말하는 ‘좋은 신앙’‘알곡 신앙’의 의미도 ‘그러한 신앙이 복을 받는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현대 교회가 머물고 있는 신앙의 자리이다 보니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에 대해서도 열심히 신앙생활 잘하면 복을 주는 분으로 가르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신앙은 늘 현실과 충돌된다는 것을 매일의 삶에서 확인 할 것입니다.

 

 

복을 받는 좋은 신앙의 삶을 위해서 믿음 좋은 사람들을 본받자고 말합니다. 과연 그 말대로 우리가 아브라함의 신앙의 본받을 수 있고, 모세, 다윗, 사도 바울의 신앙을 본받을 수 있습니까? 설령 본받을 수 있다고 해도 그 결과가 우리가 추구하고 기대하는 복으로 돌아오는 것입니까?

 

 

누구의 신앙을 본받아 그대로 행한다고 해도 그 결과는 우리가 기대하는 복이 아닐뿐더러 신앙을 본받을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문제에서 우리가 힘써야 하는 것은 신앙의 인물을 본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문제, 신앙에 대한 문제를 놓고 씨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고 신앙은 또 무엇인지에 대한 문제를 놓고 생각하고 고민하면서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앞에 신앙의 인물을 세우신 것은 ‘그를 본 받아라’는 취지가 아니라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보여주고 가르쳐주기 위한 답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앙의 인물들이나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하신 이스라엘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 속성과 성품을 조금씩 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속성과 성품을 알아가게 되면서 자신이 알고 있었고 믿어왔던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었음을 알게 되는 것이고 신앙 또한 신앙이 아니었음을 인정하게 됩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재앙을 받는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보여주는 도구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이스라엘이 하나님으로부터 재앙을 받는 것이 이스라엘이라는 특정 민족에게 국한 된 일로 그친다면 구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가치가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구약성경과 이스라엘에게서 어떤 중점을 놓치지 않고 계속 따라간다면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나타내고자 하신 진리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발견하고 깨달았다고 여겨지는 진리조차도 인간적 해석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자신의 앎에 붙들리지 않고 늘 진리의 내용을 알아가는 일에 마음을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8장을 보면 이스라엘이 행한 가증한 일에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6절을 보면 가증한 일로 인하여 하나님은 성소를 멀리 떠나셨습니다. 오늘은 하나님을 성소에서 멀리 떠나게 한 이스라엘의 가증한 일에 대해 생각해 볼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행한 가증한 일은 간단합니다. 우상입니다. 우상을 섬긴 것이 하나님이 성소를 떠나신 가증한 일이었고 이스라엘의 죄였으며 재앙과 심판의 이유였습니다. 그렇다면 우상만 제거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고 쉽게 생각할 수 있겠지만 지금까지 우상에 대한 내용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우상을 제거하는 것은 부처상을 없애는 것처럼 간단한 문제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1절을 보면 “여섯째 해 여섯째 달 초닷새에 나는 집에 앉았고 유다의 장로들은 내 앞에 앉아 있는데 주 여호와의 권능이 거기에서 내게 내리기로”라고 말합니다.

 

 

‘여섯째 해 여섯째 달 초닷새’는 유다 왕 여호야긴이 포로로 끌려온지 6년이 되는 해 여섯째 달의 닷새 되는 날이라는 뜻이며 에스겔이 여호야긴 왕과 함께 끌려온 날이기도 합니다. 그때 에스겔은 자기 집에 있었고 유다 장로들도 에스겔 앞에 앉아 있었습니다. 거기에서 여호와의 권능이 에스겔에게 임한 것입니다.

 

 

 여호와의 권능이 임한 에스겔은 불같은 형상을 보게 되고 그가 손 같은 것을 펴서 에스겔의 머리털 한 모슴을 잡고 그를 들어 예루살렘 성전 북쪽으로 데려갑니다. 그런데 그곳이 질투를 일어나게 하는 우상의 자리가 있던 곳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여호와의 권능이 에스겔에게 임하여 그를 사로잡고 성전으로 데려가서 이스라엘의 범죄의 현장을 보게 한 것입니다.

 

 

질투를 일어나게 하는 우상이라는 것은 ‘질투의 우상’이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하여금 질투하게 하는 우상이라는 뜻입니다. 우상은 말 그대로 눈에 보이는 하나의 형상일 뿐입니다. 인격적인 존재가 아니며 신적인 권능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상이 인간에게 질투를 집어넣을 수는 없습니다.

 

 

출 34:14절을 보면 “너는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하는 질투의 하나님임이니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질투라는 단어를 좋지 않게 봅니다. 때문에 ‘질투의 하나님’이라는 말이 조금은 낯설 수 있습니다. 선하신 하나님에게 질투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기에 질투의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개의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을 질투보다는 사랑으로만 이해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잘 알고 있고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랑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질투의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서 사랑의 하나님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질투는 자신이 사랑하는 이성이 다른 이성을 사랑하는 것을 시기하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질투는 사랑 없이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질투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질투하신다는 것은 질투의 대상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뜻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사랑의 의미와는 다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자기중심에서 이해하고 해석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을 도와주고 천국 보내주는 정도를 사랑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은 무엇일까요? 요 3:16절을 보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독생자를 주신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독생자를 주셨다는 것은 독생자의 피로 인한 속죄의 은혜를 주신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속죄의 은혜를 베푸실 사랑의 대상이 하나가 아니라 세상 전부라면 어떻게 될까요? 하나님의 사랑이 세상 전부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면 질투라는 말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랑에는 구별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오직 하나의 대상만을 사랑하십니다. 그들이 곧 하나님이 택한 백성이고 구약에는 이스라엘 백성을 세워서 하나님의 사랑을 보이십니다. 따라서 요 3:16절에서 말하는 세상은 하나님이 택한 백성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질투에 담겨 있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내가 너만 사랑하고 나의 가장 귀한 속죄의 은혜를 너에게만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향해서 스스로를 ‘질투의 하나님’이라고 하신 것은 세상 모든 민족들 가운데서 오직 너만 사랑하겠다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너만 사랑하겠다’고 하셔도 되는데 왜 ‘질투하는 하나님’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사랑의 대상으로 하여금 너를 사랑하는 그 한분만을 사랑하고 감사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만을 가장 귀하고 사랑할 대상으로 알고 섬기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베푸신 속죄의 은혜가 세상 그 무엇보다 크고 존귀한 것임을 알라는 뜻과 같습니다. 속죄의 은혜가 가장 좋고 존귀하다는 것을 알아야 속죄의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만을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하신 것이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출 20:5,6)는 것입니다.

 

 

우상을 만들어 섬긴다는 것은 단순히 다른 신을 하나 만들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존귀한 속죄의 은혜를 세상의 다른 것과 같이 취급한다는 것이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으로 하여금 질투를 일어나게 하는 것입니다. 우상은 속죄의 은혜를 줄 수가 없습니다. 때문에 속죄의 은혜가 가장 귀하다는 것을 안다면 굳이 우상을 섬길 이유가 없게 됩니다. 그런데 속죄의 은혜로는 만족이 되지 않기에 다른 것으로 만족을 채우기 위해 우상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도 사랑하지만 다른 세상의 것도 사랑한다는 것이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을 예루살렘 성전의 질투를 일어나게 하는 우상의 자리가 있던 곳으로 데려가십니다. 이유는 이스라엘이 성전에서 행했던 가증한 일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질투의 하나님이신 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스라엘이 겪는 재앙, 심판 모두가 하나님의 질투에 의한 것임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질투에 의한 분노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랑하고자 하는 대상을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작업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사 48:11절에서 “나는 나를 위하며 나를 위하여 이를 이룰 것이라 어찌 내 이름을 욕되게 하리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리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않습니다. 이것을 위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간섭하시며 그들을 돌아오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질투입니다.

 

 

겔 5:11-12절을 보면 “그러므로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네가 모든 미운 물건과 모든 가증한 일로 내 성소를 더럽혔은즉 나도 너를 아끼지 아니하며 긍휼을 베풀지 아니하고 미약하게 하리니 너희 가운데에서 삼분의 일은 전염병으로 죽으며 기근으로 멸망할 것이요 삼분의 일은 너의 사방에서 칼에 엎드러질 것이며 삼분의 일은 내가 사방에 흩어 버리고 또 그 뒤를 따라 가며 칼을 빼리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성소를 더럽힌 자들이기에 하나님이 아끼시고 긍휼을 베푸실 가치가 없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을 돌아오게 하신다면 그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이스라엘이 달라졌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않으시겠다는 질투에 의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받을 가치가 없는 자들을 돌아오게 하심으로 그들을 속죄하신 은혜가 얼마나 귀하고 큰가를 깨닫게 하셔서 하나님의 은혜만을 높이게 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소의 영광의 회복입니다.

 

 

때문에 신자가 성경을 제대로 보게 된다면 개인적인 소망이나 기대는 자연히 접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 어디에서도 우리들의 개인적 소망과 기대를 이뤄주기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은 등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만나는 하나님은 하나님 스스로를 위해 일하시고, 우리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일하십니다. 질투의 하나님이라는 말의 의미도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의 소망과 기대를 이뤄주는 하나님이라면 우리가 하나님 외에 좋아하는 것이 있다고 해서 질투할 것이 아니라 채워주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는 질투가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택하신 자기 백성만 사랑하겠다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를 모든 죄에서 건지시고 덮어 주시고 거룩한 백성으로 여기시며 생명의 나라에 들어가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의 선물은 오직 하나님이 택한 백성에게만 주어집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묻습니다. 우리는 이 물음에 대해 ‘예’라고 답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속에는 하나님 말고 사랑하는 다른 것으로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합니다. 이 같은 하나님의 사랑에서 속죄의 은혜가 얼마나 귀한가를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속죄의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으로 인해 감사하는 것입니다. 속죄의 은혜로 감사하는 것은 우리가 사랑하고 즐기는 세상의 모든 것들이 예수님보다 못하다는 것에 대한 고백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택한 자기 백성이 다른 것을 사랑하는 것을 질투하시고 간섭하셔서 하나님이 베푸신 하늘의 좋은 것으로 감사하고 그것이 하나님의 크신 사랑임을 고백하게 하십니다. 질투의 하나님이 이해되어지는 그것이 하나님을 아는 신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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