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2015.03.08 09:39

(19강) 가증한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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겔 8:5-15http://onlycross.net/videos/eze/eze-080515.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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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5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제 너는 눈을 들어 북쪽을 바라보라 하시기로 내가 눈을 들어 북쪽을 바라보니 제단문 어귀 북쪽에 그 질투의 우상이 있더라

6.그가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스라엘 족속이 행하는 일을 보느냐 그들이 여기에서 크게 가증한 일을 행하여 나로 내 성소를 멀리 떠나게 하느니라 너는 다시 다른 큰 가증한 일을 보리라 하시더라

7.그가 나를 이끌고 뜰 문에 이르시기로 내가 본즉 담에 구멍이 있더라

8.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이 담을 헐라 하시기로 내가 그 담을 허니 한 문이 있더라

9.또 내게 이르시되 들어가서 그들이 거기에서 행하는 가증하고 악한 일을 보라 하시기로

10.내가 들어가 보니 각양 곤충과 가증한 짐승과 이스라엘 족속의 모든 우상을 그 사방 벽에 그렸고

11.이스라엘 족속의 장로 중 칠십 명이 그 앞에 섰으며 사반의 아들 야아사냐도 그 가운데에 섰고 각기 손에 향로를 들었는데 향연이 구름 같이 오르더라

12.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스라엘 족속의 장로들이 각각 그 우상의 방안 어두운 가운데에서 행하는 것을 네가 보았느냐 그들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보지 아니하시며 여호와께서 이 땅을 버리셨다 하느니라

13.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다시 그들이 행하는 바 다른 큰 가증한 일을 보리라 하시더라

14.그가 또 나를 데리고 여호와의 전으로 들어가는 북문에 이르시기로 보니 거기에 여인들이 앉아 담무스를 위하여 애곡하더라

15.그가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네가 그것을 보았느냐 너는 또 이보다 더 큰 가증한 일을 보리라 하시더라

 

<설교>

 

‘인본주의’라는 말이 있습니다. ‘인간이 모든 것의 중심이 된다는 사상’인데 쉽게 말하자면 세상의 중심은 인간이고 신의 존재 이유 역시 인간을 위해서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신에 대한 생각도 인간을 중심으로 해서 접근하려고 하고 신앙생활도 인간의 경험과 판단과 열심을 중요시하게 됩니다. 따라서 인간의 열정적 활동이 결여된 신앙은 참된 신앙에서 밀려나게 됩니다. 이처럼 인본주의가 무엇인가를 이해하고 현대 기독교의 실상을 들여다보면 지금의 교회는 이미 전반적으로 인본주의가 신앙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같은 인본주의를 가볍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인본주의는 하나님을 부르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님을 배격하고 인간이 신의 자리에서 섬김을 받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외치지만 그 또한 인본을 위한 포장일 뿐이며 그럼에도 그것을 믿음으로 강조하는 현실 자체가 하나님을 배격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인본주의 안에서는 모든 것을 나 자신과 연결하여 이해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도 사랑도 나와 연결하여 이해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드러났고 증거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십자가가 아닌 세상에서의 자기 문제를 중심하여 은혜와 사랑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결국 자기 일이 잘되면 은혜와 사랑이 풍성한 것이고 반대면 은혜와 사랑에서 멀어져 있는 것처럼 간주하는 이 모든 것이 인본주의적 시각입니다.

 

 

‘인본주의’ 이것이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세상입니다. 세상이 추구하는 삶의 내용이고 전부입니다. 신앙도 인본을 위한 것으로 여기며 교회에서 ‘믿음 좋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열정적인 그 내면에도 역시 인본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인본은 무너지고 은혜만 남는 자리로 이끌어 가십니다. 우리 모두가 추구했던 인본의 실상이 모두 드러나고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을 배격하는 악행이었음을 보게 하심으로 ‘은혜가 살게 한다’는 그 사실 하나를 붙들게 하셔서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만 남게 하십니다.

 

 

내 육신이 넘어져 상처가 생기고 피가 나고 아픔이 온 몸을 감싸는 상황이 된다고 해도 하나님의 은혜만을 높이 들어 올리고 증거하는 그 현실로 우리를 이끄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인본주의라는 단단한 껍데기를 깨뜨리고 은혜로 가득한 진리의 세계에 눈이 열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살리기 위해 일하신다면 우리를 어떻게 인도하시고 이끌어 가실까요? 물질적 풍요와 우리의 꿈과 포부대로 성공이 약속된 길일까요? 그것이 진심으로 여러분이 사는 길이라고 생각합니까? 인본의 세계는 어둠이며 저주와 죽음입니다. 그런데도 인본의 세계를 끌어안고 놓지 않습니다.

 

 

이상한 것은 인본의 세계를 좋아하고 놓지 않고 있으면서도 ‘당신의 신앙은 인본적이다’라고 말하면 화를 낸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본은 나쁜 것임을 감 잡고 있다는 뜻이 됩니다. 그런데도 자신이 인본의 세계에 붙들려 있다는 것을 보지 못하는 현실에서 내가 얼마나 인본적인 인간인가를 보게 하십니다. 이처럼 인본적인 나를 볼 수 있게 하시고 내가 죽은 자였을 뿐임을 실감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며 우리를 살리기 위한 하나님의 일하심입니다.

 

 

하나님이 불같은 형상으로 나타나 바벨론 그발 강가에 있는 에스겔의 머리털을 잡고 예루살렘 성전의 우상의 자리가 있던 곳으로 데려가서 이스라엘이 성전에서 무엇을 했는가를 보게 하시는 것도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처럼 이스라엘의 인본의 세계를 목도하게 하시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이것을 생각해 보면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그들 가운데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 남겨 놓기를 원하시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6절을 보면 “그가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스라엘 족속이 행하는 일을 보느냐 그들이 여기에서 크게 가증한 일을 행하여 나로 내 성소를 멀리 떠나게 하느니라 너는 다시 다른 큰 가증한 일을 보리라 하시더라”고 말합니다.

 

 

본문에 보면 이스라엘이 가증한 일을 행하였음을 반복하여 강조합니다. 가증한 일은 성전에 우상을 둔 것입니다. 10절을 보면 각양 곤충과 가증한 짐승과 이스라엘 족속의 모든 우상을 그 사방 벽에 그렸을 정도로 이스라엘은 우상을 섬기는 일에 심취되어 있었습니다. 놀라운 일은 이러한 우상 섬기는 일이 일반 백성 사이에서 몰래 행해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전에서 노골적으로 행해졌다는 사실입니다.

 

 

성전에는 제사장들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의 우상 섬김은 제사장들이 주도했다는 의미가 됩니다. 제사장만이 아닙니다. 11절의 “이스라엘 족속의 장로 중 칠십 명이 그 앞에 섰으며 사반의 아들 야아사냐도 그 가운데에 섰고 각기 손에 향로를 들었는데 향연이 구름 같이 오르더라”는 내용을 보면 이스라엘 장로 칠십 명까지 우상을 섬기는 가증한 일에 가담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사반의 아들 야아사냐도 언급됩니다. 사반은 요시야 왕이 성전에서 아세라 상을 제거하고 유다 각 성읍에서 산당을 헐어버리는 개혁을 단행했을 때 함께 했던 서기관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서기관 사반의 아들 야아사냐가 손에 향로를 들고 장로 칠십 명과 함께 우상을 섬기는 일에 합세한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우상 섬기는 것을 책망하고 신앙의 바른 길로 가도록 가르치고 인도해야 할 위치에 있는 사람들까지도 가증한 일에 가담하였음을 의미합니다. 어느 누구 하나도 우상 섬김이 가증한 일이고 하나님을 배격하는 것임을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요? 쉽게 납득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12절을 보면 그 답을 알 수 있습니다.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스라엘 족속의 장로들이 각각 그 우상의 방안 어두운 가운데에서 행하는 것을 네가 보았느냐 그들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보지 아니하시며 여호와께서 이 땅을 버리셨다 하느니라”는 말씀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이들은 “여호와께서 우리를 보지 아니하시며 여호와께서 이 땅을 버리셨다”는 생각으로 우상을 끌어들인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하나님을 섬겼던 신앙이 자신들에게 전혀 도움 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앞에서 언급했던 인본주의입니다.

 

 

이들이 성전에 우상을 둔 것은 자신들에게 함께 하고 자신들의 사정을 알고 도와주는 신을 원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인간이 생각하는 신의 개념입니다. 어떤 신이든 자신이 이롭게 되는 결과만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는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신앙의 세계, 신앙의 결과도 이 같은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아무 생각, 아무 관심도 없이 남발하는 지푸라기와 같은 용어일 뿐이고 정작 모든 관심은 자기 영광으로 집중되어 있습니다.

 

 

칠십 명의 장로들이 외치는 “여호와께서 우리를 보지 아니하시며 여호와께서 이 땅을 버리셨다”는 말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들의 신앙의 중심에는 누가 있다고 생각합니까? 주체는 또 누구입니까? 바로 그들 자신입니다. 자신을 신앙의 중심에 두고 하나님께 자신들을 봐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보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판단하는 근거는 자신들이 처한 현실입니다. 현실이 풍요롭고 편안하면 하나님이 봐주시고 은혜를 풍성히 베푸신 것이고, 궁핍하고 괴로우면 돌아보지 않으신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이들이 그동안 성전에서 제사 드리며 가졌던 생각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들에게 제사는 단지 하나님과 관계를 맺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입니다. 제사를 통해 하나님과 교제함으로 하나님으로 하여금 자신들을 돌아보고 현실적인 문제에 도움이 되어주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인본주의적 종교 행위가 곧 우상 섬김이기 때문에 설사 성전에 우상을 놓지 않았다고 해도 그들은 우상을 섬기고 있었을 뿐이라는 답을 내릴 수 있습니다.

 

 

7절을 보면 하나님은 에스겔을 뜰 문, 곧 3절에서 말한 안뜰로 들어가는 북향한 문으로 데려 가십니다. 그 문에서 에스겔은 구멍 하나를 보게 되는데 이 구멍은 우상을 섬기는 방으로 연결될 구멍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구멍이 있는 담을 헐게 하셔서 드러난 문을 통하여 들어가 거기서 행해지는 가증하고 악한 일을 보라고 하신 것을 보면 성전에서의 우상 섬김이 은밀히 행해지던 것이 아니었는지 짐작하게 합니다. 그처럼 감추어진 가증하고 악한 일들을 담을 헐게 하셔서 에스겔 앞에 드러내신 것입니다.

 

 

성전에서의 가증한 일은 그뿐만이 아닙니다. 여호와의 전으로 들어가는 북문에 이르렀을 때는 여인들이 앉아서 담무스를 위해 애곡하고 있었고, 성전 안뜰에서는 약 스물다섯 명이 성전을 등지고 낯을 동쪽으로 향하여 동쪽 태양에게 예배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에스겔에게 목도하게 하신 성전에서 행해지는 가증한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모든 가증한 일을 보여주심으로 이스라엘이 멸망하는 이유가 무엇인가를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것처럼 성전에서의 가증한 일은 단지 우상이라는 어떤 형상을 성전에 두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저 하나의 물체에 지나지 않는 물건이 성전에 있다고 해서 하나님의 거룩성이 훼손되지는 않습니다. 문제는 우상을 성전에 둔 이유입니다. 장로들이 외친 말처럼 여호와께서 자신들을 보지 않으시고 이 땅을 버리셨다는 생각에 자신들을 도울 신을 찾은 것이라면 이스라엘은 그동안 하나님을 자신들을 돌아보고 도와주는 신으로만 여겼다는 것이고 그것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우상으로 취급하는 가증한 일에 해당된 것입니다.

 

 

내가 주체가 되어 믿겠다고 나서는 모든 종교 행위는 하나님을 우상으로 여기는 것일 뿐입니다. 하나님을 믿음으로 복을 받겠다고 하는 것은 두말 할 것 없고, 마음의 평안을 누리고자 하는 것이나 기적을 체험하고자 하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을 우상으로 취급하는 가증한 일일 뿐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그러면 무엇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가?’라고 항변 하고 싶기도 할 것입니다. 그것도 충분히 이해됩니다. 하지만 인본주의 안에서 이해될 뿐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인본주의라는 단단한 껍데기가 깨어지는 것입니다. 담을 허물어 에스겔에게 성전에서의 가증한 일을 보게 하신 것처럼 우리 안의 가증함을 가로 막고 있는 담이 허물어져 그동안 감추어졌던 악함이 드러나고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스스로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주의 영이 에스겔을 성전으로 데려가 가증한 일을 보게 하신 것처럼 성령이 우리를 붙들어서 우리의 악함을 보게 하심으로 가능한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이라는 담에 막혀서 보지 못했던 나의 가증함을 보게 되고 인본주의의 묻혀 있던 저주와 죽음의 실체를 보게 된다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고전 3:16절을 보면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 말을 근거로 ‘성전은 사람이지 예배당이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맞습니다, 사도가 말한 성전은 예배당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고백하는 여러분이 성전입니다.

 

 

하지만 오늘은 이 말씀이 여러분께 두려움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성전이라면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성전에서의 가증한 일을 보여주신 것처럼, 오늘 우리로 하여금 성전인 내 안에 가득한 가증하고 악한 일을 보게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인본주의에 갇힌 현대 교회의 잘못됨을 압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인본주의와는 상관없이 하나님을 바라보며 순수하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한다고 할 수 있습니까? 우리 역시 인본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따라서 내릴 수밖에 없는 하나의 결론은 우리는 누구도 스스로 주를 믿고 나의 현실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은혜만을 높이며 기도하고 예배하고 찬송할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이 아니면 죽은 존재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많이 들은 말이라고 가볍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입으로는 죽은 존재라고 하면서도 항상 자신이 살아있음을 확인하고 싶어 하는 본성으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칠십 명의 장로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돌아보지 않고 이 땅을 버리셨다며 다른 신을 찾지만 우상을 성전에 두기 전부터 이미 그들 마음에는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즉 버림받아 마땅한 가증한 존재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성전의 형편을 보게 하셔서 드러내신 것이 이것이라면 오늘 우리에게서도 드러날 것은 우리가 버림받아 마땅한 가증한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이 같은 사실이 드러나며 여러분이 여기에 마음을 두게 된다면,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죽은 존재라는 사실이 깊은 진리로 다가와 여러분의 심중에 자리한다면 그것이 하나님의 크신 사랑입니다. 믿을 수 없는 강퍅한 자를 믿게 하신 은혜입니다. 이 은혜의 깊이로 조금씩 들어가게 되는 것이 신자가 누리는 행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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