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2015.03.15 09:26

(20강) 이마에 표 있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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겔 9:1-11http://onlycross.net/videos/eze/eze-090111.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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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 또 그가 큰 소리로 내 귀에 외쳐 이르시되 이 성읍을 관할하는 자들이 각기 죽이는 무기를 손에 들고 나아오게 하라 하시더라

2. 내가 보니 여섯 사람이 북향한 윗문 길로부터 오는데 각 사람의 손에 죽이는 무기를 잡았고 그 중의 한 사람은 가는 베 옷을 입고 허리에 서기관의 먹 그릇을 찼더라 그들이 들어와서 놋 제단 곁에 서더라

3. 그룹에 머물러 있던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 문지방에 이르더니 여호와께서 그 가는 베 옷을 입고 서기관의 먹 그릇을 찬 사람을 불러

4.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예루살렘 성읍 중에 순행하여 그 가운데에서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표를 그리라 하시고

5. 그들에 대하여 내 귀에 이르시되 너희는 그를 따라 성읍 중에 다니며 불쌍히 여기지 말며 긍휼을 베풀지 말고 쳐서

6. 늙은 자와 젊은 자와 처녀와 어린이와 여자를 다 죽이되 이마에 표 있는 자에게는 가까이 하지 말라 내 성소에서 시작할지니라 하시매 그들이 성전 앞에 있는 늙은 자들로부터 시작하더라

7. 그가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는 성전을 더럽혀 시체로 모든 뜰에 채우라 너희는 나가라 하시매 그들이 나가서 성읍 중에서 치더라

8. 그들이 칠 때에 내가 홀로 있었는지라 엎드려 부르짖어 이르되 아하 주 여호와여 예루살렘을 향하여 분노를 쏟으시오니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모두 멸하려 하시나이까

9.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의 죄악이 심히 중하여 그 땅에 피가 가득하며 그 성읍에 불법이 찼나니 이는 그들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이 땅을 버리셨으며 여호와께서 보지 아니하신다 함이라

10. 그러므로 내가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며 긍휼을 베풀지 아니하고 그들의 행위대로 그들의 머리에 갚으리라 하시더라

11. 보라 가는 베 옷을 입고 허리에 먹 그릇을 찬 사람이 복명하여 이르되 주께서 내게 명령하신 대로 내가 준행하였나이다 하더라

 

 

<설교>

 

하나님께서 바벨론의 그발 강가에 있던 에스겔을 성전의 우상의 자리가 있는 곳으로 데려가시고 이스라엘의 장로 칠십 명과 제사장으로 짐작되는 스물다섯 명이 성전에서 우상을 섬기는 것을 목도하게 하십니다. 종교지도자인 제사장과 장로들이 우상을 섬긴 것은 “여호와께서 우리를 보지 아니하시며 여호와께서 이 땅을 버리셨다”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가증한 일로 여기셨고 “그러므로 나도 분노로 갚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며 긍휼을 베풀지도 아니하리니 그들이 큰 소리로 내 귀에 부르짖을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겔 8:18)는 말씀대로 이스라엘에게 분노하시고 재앙으로 갚아 예루살렘을 황폐하게 하시고 백성들은 바벨론으로 포로 되어 끌려가게 하신 것입니다.

 

 

제사장과 장로들은 하나님을 이스라엘을 위한 하나님으로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이었고 자기를 위해 우상을 섬기는 것이며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는 가증한 일이었습니다. 이처럼 가증한 일을 행한 자들에게 하나님은 손에 죽이는 무기를 잡은 여섯 사람을 등장시켜 놋 제단 곁에 세움으로 죽음으로 갚으실 것을 보여주십니다(1,2절).

 

 

여기서 우리가 주의 깊게 생각해야 하는 것은 손에 죽이는 무기를 잡은 여섯 사람, 즉 여섯 사자를 놋 제단 곁에 서게 하신 이유입니다. 놋 제단은 하나님께 제사드릴 때 제물을 잡아 불사르는 곳입니다. 따라서 놋 제단은 제물의 피 흘림과 희생이 있는 곳이고, 그것으로 죄를 용서하신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이 선포된다는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께로 마음이 향한 신자라면 ‘놋 제단’이라는 말에서 제물의 희생, 죄의 용서,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 등을 생각하게 될 것이고, 그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묵상하는 것으로 연결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만약 놋 제단을 제물을 바쳐 복을 얻기 위한 곳으로 바라본다면 어떻게 될까요?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놋 제단에 바쳐진 제물을 받으시고 기뻐하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보상으로 자신들을 돌보시며 복을 내리실 것으로 기대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들을 향해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사 1:11)고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놋 제단은 바치면 복을 받는 통로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자기를 위해 하나님을 찾았던 사람들은 놋 제단을 자신들의 가증한 일의 용서를 위해 죄 없는 제물이 희생의 피를 흘리는 곳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복을 위해 하나님이 기뻐할 제물을 바치는 곳으로만 여긴 것입니다. 놋 제단을 이런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은 지금도 여전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물을 바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복을 주신다는 악하고 헛된 말이 사람들을 미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죽이는 무기를 손에 든 여섯 사자를 놋 제단 곁에 서게 하신 것은 무슨 뜻일까요? 죽이는 무기를 손에 들었다는 것은 두말 할 것 없이 죽이겠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죽임을 당할 대상이 누구인지가 놋 제단으로 인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들이 바로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놋 제단을 복을 받기 위한 수단, 도구로 여기는 자들입니다. 때문에 이들은 제물을 바치는 것도 자기 복을 위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를 위해 놋 제단 앞에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가증한 일로 여기시고 죽이신다는 것을 놋 제단 곁에 여섯 사자를 세우심으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2절을 보면 그 중의 한 사람이 가는 베옷을 입고 허리에 서기관의 먹 그릇을 차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한 그 중의 한 사람은 문맥상 여섯 사람 중의 한 사람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을 듯 하지만 여섯 사람 외에 다른 한 사람을 지칭하는 것으로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여섯 사람 중의 하나라면 베옷을 입고 허리에 서기관의 먹 그릇을 찬 사람은 손에 죽이는 무기도 함께 들고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베옷을 입고 손에 서기관의 먹 그릇을 찬 사람에게는 “너는 예루살렘 성읍 중에 순행하여 그 가운데에서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표를 그리라”(4절)는 일을 맡겼습니다. 즉 이 사람은 죽이는 일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이 점을 염두에 둔다면 여섯 사람 중의 하나가 아니라 또 다른 한 사람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놋 제단 곁에 선 사람은 모두 일곱이 됩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사자, 즉 천사들입니다. 하나님은 여섯 천사에게 “너희는 그를 따라 성읍 중에 다니며 불쌍히 여기지 말며 긍휼을 베풀지 말고 쳐서 늙은 자와 젊은 자와 처녀와 어린이와 여자를 다 죽이되”라고 말씀합니다. 심판이 이들의 할 일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가까이 하지 말아야 할 대상이 있습니다. 이마에 표 있는 자입니다. 가까이 하지 말라는 것은 죽이지 말라는 뜻입니다. 즉 죽음에서 건짐을 받은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마에 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의 관심은 이마에 표를 받은 자에게로 향할 수밖에 없습니다. 죽음의 심판이 가까이 하지 못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그들이 과연 누구인지에 대해 관심이 향하는 것이 당연할 것입니다.

 

 

4절을 보면 이마에 표를 그리라고 지시한 대상은 “모든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우는 자”들입니다. 성전에서 행해지는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우는 사람들이 이마에 표가 그려질 대상입니다. 이들을 제외하고는 늙은 자와 젊은 자와 처녀와 어린이와 여자들까지 모두 불쌍히 여기지 않고 긍휼을 베풀지 않으며 손에 죽이는 무기를 든 여섯 천사에 의해서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심판에서 건짐을 받는다면 심판주이신 하나님을 위해 공로를 세웠거나 그 믿음이 특별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천사에 의해 이마에 표가 그려진 사람에 대한 공로나 신앙생활이나 선행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되지 않습니다. 다만 가증한 일을 가증한 일로 바라보며 그로 인해 탄식이 있었고 울음이 있었을 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보시고 이마에 표를 그리게 하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만으로도 현대 교회가 믿음의 증거, 또는 복의 조건으로 제시하는 것들이 얼마나 엉터리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놋 제단을 희생 제물의 피와 죄의 용서로 바라보지 않고 자신의 정성을 보이면 복을 받을 수 있는 영험한 곳으로 바라보는 것처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복을 받기 위한 수단으로 여기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이 분노하시는 가증한 일이라는 것을 모릅니다.

 

 

사람이 신앙생활을 잘하여 복을 얻을 수 있다면 신앙생활만 잘하면 구원을 얻을 수도 있다는 뜻이 됩니다. 그런데도 구원은 예수로 말미암아 얻는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합니다. 구원은 예수를 믿음으로 받지만 복은 구원을 받은 사람이 신앙생활을 잘 할 때 그 상으로 주신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그리스도를 알고 구원에 참여되었음을 알게 된 신자가 세상에 눈을 돌린 적이 있던가요? 없습니다. 설사 옛 사람의 습성이 있어서 세상에 미련을 둔다고 해도 성령에 의해 책망 받으며 하나님의 사랑에 붙들리는 길로 인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을 때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는 것을 알았고, 자신에게 유익한 것으로 여겼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긴다는 말을 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의 복을 구하지 않는다고 해서 믿음이 더 낫다는 생각을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부분에서 큰 착각을 합니다. ‘나는 신앙이 기복적이 아니기 때문에 바른 믿음이다’라고 생각하며 복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믿음이 없다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이 또한 자기 탐심일 뿐입니다.

 

 

인간에게는 낫다고 말할 조건이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그리스도께 붙들어 놓았기 때문에 세상의 복을 추구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매이는 것이 더 기쁨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이마에 표가 그려졌다고 해서 표가 없이 심판을 받는 사람보다 더 나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전에서 행해지는 가증한 일을 보며 탄식이 나오고 울음이 나온다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하시고 그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하셨기 때문에 있게 되는 탄식과 울음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서 진리로 이끌려 가는 것이고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생각으로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마에 표를 그리라고 하셨는데 그 표는 어떤 것일까요? 출애굽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애굽의 모든 처음 난 것을 치시는 재앙을 행하실 때 이스라엘 백성에게 어린양을 취하여 그 피를 집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피가 표적이 되어 재앙이 내리지 않은 것입니다.

 

 

또한 계 14:1절을 보면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서 있는데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더라”고 말합니다.

 

 

어린양과 함께 시온 산에 선 십사만 사천인은 어린양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구원에 참여하게 된 하나님의 백성을 뜻합니다. 그래서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더라고 말합니다.

 

 

이마가 지식을 의미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들 십사만 사천은 사도 바울처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만을 가장 고상한 것으로 여기고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이마에 그려진 표는 어린양의 피의 은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표로 어린양의 피의 은혜를 그 마음에 새겨 놓은 것입니다.

 

 

때문에 이마에 표가 그려진 사람은 어린양으로 오신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만을 따라가게 되어 있습니다. 피의 은혜를 따라가며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에 세상의 일들이 은혜를 멸시하는 가증한 일로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은혜가 멸시는 되는 것으로 인해 탄식하며 애통하게 되는 것입니다.

 

 

10,11절을 보면 “그러므로 내가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며 긍휼을 베풀지 아니하고 그들의 행위대로 그들의 머리에 갚으리라 하시더라 보라 가는 베 옷을 입고 허리에 먹 그릇을 찬 사람이 복명하여 이르되 주께서 내게 명령하신 대로 내가 준행하였나이다 하더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세상에 대해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며 긍휼을 베풀지도 않고 행위대로 갚으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마에 표를 그릴 천사는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준행할 것입니다. 결국 애굽에서 어린양의 피를 보고 재앙이 넘어간 것처럼 세상의 심판에서도 이마에 있는 표를 보고 넘어갈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마에 표를 남긴 자기 백성을 찾으신다는 것입니다. 그 표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입니다.

 

 

이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하나님이 남기신 표, 그리스도의 은혜가 있는지만 보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그리스도의 은혜가 있다는 증거를 스스로 만들어 내려고 합니다. 은혜 받았으면 봉사하고 헌신하고 충성하며 헌금도 해야 한다는 말에 속아서 은혜 받은 증거를 자기 행위로 남기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구원에 대한 불안감을 해소하고 믿음의 우월함을 표현하기 위해 우상을 붙드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진리가 우리를 은혜로 이끌어 간다면 우리 내면에 자리하고 있는 그 모든 것이 드러나 지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나의 가증함을 보게 되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이마의 표는 ‘너는 천국 간다’는 증표로 주신 것이 아니라 ‘너를 심판에서 건져 내는 능력은 오직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이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날마다 죄에 붙들려 있는 우리의 부끄러움을 보게 하게 하시며 은혜를 붙들고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며 그 길로 가게 하십니다.

 

 

다시 말하지만 은혜에 붙들린 신자는 무엇으로도 자신을 자랑할 수 없게 됩니다. 복음을 안다는 것으로도 자랑할 수 없게 됩니다. 모든 것이 은혜의 결과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있다면 그 지식은 여러분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세상에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나타내며 그가 가신 그 길로 가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이마에 표가 있는 신자에게서는 한 순간도 자신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행위대로 갚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과연 누가 행위에 대해 만점을 받고 심판을 피할 수 있을까요? 아무도 없습니다.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그 피로 우리의 모든 행위를 덮으신 것이야 말로 우리가 붙들어야 할 은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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