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2013.08.18 10:10

(87강) 기록된 말씀

조회 수 3195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렘 36:1-10http://onlycross.net/videos/jer/jer-360110.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 유다의 요시야 왕의 아들 여호야김 제사년에 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말씀이 임하니라 이르시되

2 너는 두루마리 책을 가져다가 내가 네게 말하던 날 곧 요시야의 날부터 오늘까지 이스라엘과 유다와 모든 나라에 대하여 내가 네게 일러 준 모든 말을 거기에 기록하라

3 유다 가문이 내가 그들에게 내리려 한 모든 재난을 듣고 각기 악한 길에서 돌이키리니 그리하면 내가 그 악과 죄를 용서하리라 하시니라

4 이에 예레미야가 네리야의 아들 바룩을 부르매 바룩이 예레미야가 불러 주는 대로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신 모든 말씀을 두루마리 책에 기록하니라

5 예레미야가 바룩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나는 붙잡혔으므로 여호와의 집에 들어갈 수 없으니

6 너는 들어가서 내가 말한 대로 두루마리에 기록한 여호와의 말씀을 금식일에 여호와의 성전에 있는 백성의 귀에 낭독하고 유다 모든 성읍에서 온 자들의 귀에도 낭독하라

7 그들이 여호와 앞에 기도를 드리며 각기 악한 길을 떠나리라 여호와께서 이 백성에 대하여 선포하신 노여움과 분이 크니라

8 네리야의 아들 바룩이 선지자 예레미야가 자기에게 명령한 대로 하여 여호와의 성전에서 책에 있는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낭독하니라

9 유다의 요시야 왕의 아들 여호야김의 제오년 구월에 예루살렘 모든 백성과 유다 성읍들에서 예루살렘에 이른 모든 백성이 여호와 앞에서 금식을 선포한지라

10 바룩이 여호와의 성전 위뜰 곧 여호와의 성전에 있는 새 문 어귀 곁에 있는 사반의 아들 서기관 그마랴의 방에서 그 책에 기록된 예레미야의 말을 모든 백성에게 낭독하니라


 

 

<설교>

 

선지자에게 요시야의 날부터 오늘까지 이스라엘과 유다와 모든 나라에 대하여 일러준 모든 말을 두루마리 책을 가져다가 거기에 기록하라는 말씀이 임합니다. 요시야 날부터 기록하라고 하신 것은 예레미야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 때가 요시야 왕 13년부터이기 때문입니다. 그때부터 1절에서 말한 여호야김 4년까지의 기간은 23년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23년간 선지자에게 이스라엘과 유다와 모든 나라에 대해 말씀한 것을 두루마리 책에 기록하라는 것입니다.

 

 

23년 동안의 하나님의 말씀을 모두 기록하려면 그 양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지금까지 예레미야에게서 들었던 말씀들이 무엇입니까? 이스라엘과 유다의 죄악과 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멸망에 대한 것이 전부입니다. 3절에서도 “유다 가문이 내가 그들에게 내리려 한 모든 재난을 듣고”라고 말한 것을 보면 예레미야가 기록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은 유다를 향한 멸망과 재난에 대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바룩을 불러 예레미야가 불러주는 대로 모든 말씀을 두루마리 책에 기록하게 합니다. 그리고 예레미야 자신은 붙잡혀 있는 몸이어서 여호와의 집에 들어갈 수 없는 처지이기 때문에 바룩에게 금식일에 성전에 들어가서 성전에 있는 백성의 귀에 기록한 말씀을 낭독하고 유다의 모든 성읍에서 온 사람들의 귀에도 낭독하라고 합니다.

 

 

말씀을 낭독하라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7절의 “그들이 여호와 앞에 기도를 드리며 각기 악한 길을 떠나리라 여호와께서 이 백성에 대하여 선포하신 노여움과 분이 크니라”는 말씀을 보면 유다 백성들이 말씀을 들음으로 자신들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가 크다는 것을 깨닫고 악한 길을 떠나게 하기 위함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말씀을 들은 자에게서 나타나는 실천이며 행함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23년간 말씀하신 것을 모두 기록하게 하시고 낭독하게 하시는 것일까요? 하나님은 23년 동안 예레미야를 세워서 유다에게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들의 죄를 통보하시고 회개하고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이킬 것을 촉구하셨습니다.

 

 

하지만 유다는 악한 길에서 떠나기는커녕 말씀을 듣기 싫어했고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를 죽이려고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유다가 23년 동안의 말씀을 기록하여 낭독한다고 해서 새삼 죄를 깨닫고 악한 길에서 돌이키겠는가 하는 의문이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말씀이 어떤 기능을 가지고 역사하는가를 생각해 보면 말씀을 기록하여 낭독하라는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기록된 말씀에는 유다 가문에 내리고자 하시는 재난이 담겨 있습니다. 즉 유다의 범죄와 그에 따른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유다 백성은 낭독되는 말씀을 통해서 자신들의 죄의 역사를 보게 될 것이고 현재의 모든 재난의 이유도 자신들의 죄에 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기록된 말씀의 기능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유다는 왜 처음부터 하나님의 말씀에서 자신의 죄를 보지 못했을까요? 그것은 유다가 포로 되기 전에는 자신의 죄를 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바벨론에 의해 고초를 겪을 때에도 거짓 선지자의 말을 따라 하나님이 도와주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자신들이 이미 하나님의 심판 안에 있음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한 유다에게 예레미야를 통해서 하신 모든 말씀을 기록해 낭독할 때 유다는 자신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대했으며 어떤 악을 행했는가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악에서 돌이키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레미야에게 기록하여 낭독하라는 말씀이 유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님을 의미합니다. 말씀이 유다의 죄의 역사가 되고 죄의 실상을 드러내는 것이라면 그 말씀은 오늘 우리들의 죄의 역사이기도 하고 실상이기도 합니다. 말씀을 거부하고 배척하며 말씀을 전한 선지자를 미워했던 그 모든 죄가 말씀에 기록되어 있다면 그것은 유다의 죄만이 아니라 유다를 통해서 볼 수 있는 우리의 죄가 되기 때문입니다.

 

 

말씀으로 인한 실천은 다시 말하지만 죄로 인한 애통과 함께 악한 길에서 돌이키는 것입니다. 기도하고 성경보고 봉사하는 것을 말씀의 실천으로 여기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책으로 기록하여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뜻을 깊이 파악하지 못한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앙은 결코 죄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죄를 무시한 상태에서는 아무리 신앙생활에 특출한 열심을 보인다고 해도 하나님은 그것을 신앙으로 인정하신 적이 없습니다. 죄를 무시한 상태에서의 신앙 열심은 결국 자신의 의와 자랑으로 연결될 뿐입니다. 자기 열심을 근거로 해서 원하는 것을 받고자 하는 것만 있을 뿐이기에 신앙으로 간주될 수 없는 것입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은 오히려 그런 자들을 불의를 행하는 것으로 말씀했고 모른다고 부인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인생을 평가하자면 죄로 가득하다는 말 외에 다른 말은 해당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죄로 가득한 인생을 보면 예수님의 은혜가 크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이 우리를 이처럼 크신 은혜로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말씀을 듣고 실천하게 된다면 그것은 애통하는 것과 함께 은혜를 깨닫고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룩을 통해서 말씀을 들은 유다 백성은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11절에 보면 미가야가 바룩이 낭독한 말씀을 듣고 서기관의 방에 들어가서 거기 있는 고관들에게 바룩에게 들은 말을 전합니다. 그러자 고관들은 바룩에게 사람을 보내어 말씀이 기록된 두루마리를 가져오라고 하고, 바룩이 두루마리를 가져와 낭독하자 놀라며 그 말을 왕에게 말하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왕에게 가서 자기들이 들은 말을 전합니다.

 

 

다시 왕은 여후디라는 사람을 보내어 두루마리를 가져 오게 하고 여후디가 두루마리를 가져와서 왕과 거기 있는 고관들 앞에서 낭독을 할 때 왕이 면도칼로 두루마리를 베어서 화롯불에 던져 버립니다. 24절에 보면 “왕과 그의 신하들이 이 모든 말을 듣고도 두려워하거나 자기들의 옷을 찢지 아니하였고”라고 말하는 이것이 기록된 말씀에 대한 왕과 신하들의 반응이었습니다.

 

 

두루마리를 왜 베어서 태워버리는 것입니까? 그것은 말씀이 나타내는 현실이 싫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장차 예수님이 오셨을 때 세상으로부터 환영받지 못하고 죽으실 수밖에 없음을 미리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속성이 애당초 말씀의 세계를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왕과 신하는 하나님이 지켜주심으로 평안을 누리게 된다는 말씀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말씀은 늘 인간의 기대를 무너뜨리면서 다가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만약 내가 원한 현실을 포기하지 않고 고집 부린다면 우리 앞에 기록되어진 하나님의 말씀은 찢어 버리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나 왕이 불태웠다고 해서 말씀이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28절을 보면 말씀을 다시 기록하라고 하십니다. 이처럼 말씀은 인간이 배척하고 거부한다고 해도 세상에 존재하며 자기 백성을 찾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 의해서 예수님을 알고 찾게 되는 것입니다. 이 말씀 앞에서 우리가 취해야 할 행동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428 예레미야 (106강) 버리지 않음 신윤식 2014.01.19 3079
427 예레미야 (105강) 여호와의 계획 신윤식 2014.01.12 3182
426 예레미야 (104강) 다른 운명 신윤식 2014.01.05 3081
425 예레미야 (103강) 각 나라의 멸망 예언 신윤식 2013.12.29 3410
424 예레미야 (102강) 모압의 멸망 예언 신윤식 2013.12.22 3157
423 예레미야 (101강) 블레셋의 멸망 예언 신윤식 2013.12.15 3195
422 예레미야 (100강) 애굽 멸망에 대한 예언 신윤식 2013.12.03 4228
421 예레미야 (99강) 하나님의 큰 일 신윤식 2013.11.24 3234
420 예레미야 (98강) 신앙과 종교 신윤식 2013.11.10 3179
419 예레미야 (97강) 계속되는 말씀 신윤식 2013.11.03 3109
418 예레미야 (96강) 말씀보다 애굽 신윤식 2013.10.27 3065
417 예레미야 (95강) 애굽으로 가지 말라 신윤식 2013.10.20 3174
416 예레미야 (93강) 좋든지 좋지 않든지 신윤식 2013.10.06 21508
415 예레미야 (93강) 그다랴 암살 신윤식 2013.09.29 3215
414 예레미야 (92강) 총독 그다랴 신윤식 2013.09.22 5466
413 예레미야 (91강) 하나님의 입장에서 신윤식 2013.09.15 3176
412 예레미야 (90강) 멸망과 구원 신윤식 2013.09.08 3195
411 예레미야 (89강) 에벳멜렉 신윤식 2013.09.01 3187
410 예레미야 (88강) 변함없는 말씀 신윤식 2013.08.25 3020
» 예레미야 (87강) 기록된 말씀 신윤식 2013.08.18 3195
Board Pagination Prev 1 ... 5 6 7 8 9 10 11 12 13 14 ... 31 Next
/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