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2016.05.28 17:51

(79강) 내 양을 찾으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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겔 34:7-16http://onlycross.net/videos/eze/eze-340716.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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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7. 그러므로 목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8.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내 양 떼가 노략 거리가 되고 모든 들짐승의 밥이 된 것은 목자가 없기 때문이라 내 목자들이 내 양을 찾지 아니하고 자기만 먹이고 내 양 떼를 먹이지 아니하였도다

9.그러므로 너희 목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10.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목자들을 대적하여 내 양 떼를 그들의 손에서 찾으리니 목자들이 양을 먹이지 못할 뿐 아니라 그들이 다시는 자기도 먹이지 못할지라 내가 내 양을 그들의 입에서 건져내어서 다시는 그 먹이가 되지 아니하게 하리라

11.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나 곧 내가 내 양을 찾고 찾되

12.목자가 양 가운데에 있는 날에 양이 흩어졌으면 그 떼를 찾는 것 같이 내가 내 양을 찾아서 흐리고 캄캄한 날에 그 흩어진 모든 곳에서 그것들을 건져낼지라

13.내가 그것들을 만민 가운데에서 끌어내며 여러 백성 가운데에서 모아 그 본토로 데리고 가서 이스라엘 산 위에와 시냇가에와 그 땅 모든 거주지에서 먹이되

14.좋은 꼴을 먹이고 그 우리를 이스라엘 높은 산에 두리니 그것들이 그 곳에 있는 좋은 우리에 누워 있으며 이스라엘 산에서 살진 꼴을 먹으리라

15.내가 친히 내 양의 목자가 되어 그것들을 누워 있게 할지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6.그 잃어버린 자를 내가 찾으며 쫓기는 자를 내가 돌아오게 하며 상한 자를 내가 싸매 주며 병든 자를 내가 강하게 하려니와 살진 자와 강한 자는 내가 없애고 정의대로 그것들을 먹이리라

 

 

<설교>

복음은 인간에게 이해될 수 있는 내용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듣고 배우고 경험하여 구축된 상식이나 이치와 전혀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중심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왜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가?’라며 반대 의견을 제시할 분도 있겠지만 만약 은혜가 인간의 상식과 기준과 이치로 이해된다면 그것은 은혜의 의미를 제멋대로 생각했다는 증거입니다.

 

 

은혜는 받을 조건이 없는 자에게 베풀어진 구원을 의미합니다. 세상으로부터 손가락질을 받는 악한 자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이라면 구원하시기 때문에 조건을 보시지 않고 요구하지 않으시며 온전히 하나님의 뜻에 의해 베풀어진 은혜의 구원입니다. 반면에 세상으로부터 칭송을 듣는 윤리적으로 선한 자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택하지 않았다면 이미 구원에서 단절되어 있습니다. 즉 그가 누구이며 어던 일을 행했는가와 상관없이 구원에서 멀어져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은혜를 세상은 절대 이해하지 못합니다. 세상은 세상 나름대로 복 받을 자와 벌 받을 자, 천국 갈 자와 지옥 갈 자에 대한 기준을 세워두고 있습니다. 그 기준은 인간의 행함입니다. 행함이 복과 구원에 대한 기준으로 자리하고 있고 행함의 정도와 수준에 따라 복의 무게가 결정되고 천국에서의 환경이 결정된다는 것이 세상의 상식이고 공평한 이치인데 그러한 모든 조건과 무관하게 오직 은혜라는 방식으로 복과 구원이 주어진다는 하나님의 원칙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이처럼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은혜는 세상으로부터 배척 받을 수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기독교인들이 아무런 반감 없이 은혜를 말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무조건적인 은혜를 조건적인 은혜로 변개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은 은혜 받을만한 자에게 주신다’는 것으로 변개해 버린 것입니다.

 

 

무조건적인 은혜가 조건적 은혜로 변개됨으로 나타나는 현상은 자신의 조건을 보면서 은혜를 자기 신앙 노력의 결과로 여기는 것입니다. 열심히 기도하고 성경 묵상을 했기에 하나님이 은혜를 주신 것이고 헌신하고 봉사했기에 복을 주셨다고 생각해 버립니다. 때문에 교회 내에서도 은혜 받은 자와 받지 못한 자로 나눠지게 되고 은혜의 기준을 열심 있는 신앙생활에 두는 등 본인의 열심이 기준이 되어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돌고 도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조건적 은혜는 복음과 정면으로 충돌됩니다. 복음은 십자가 은혜로 인한 구원을 말하는데 십자가 은혜는 ‘누구도 자신의 조건으로 구원될 사람은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단 한 사람이라도 자신의 조건으로 구원될 수 있다면 하나님은 그 사람을 모델로 내세워 ‘이 사람과 같은 조건을 갖추면 구원 하겠다’라고 하셔도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필요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은혜는 무조건적이었을까요 조건적이었을까요? 당연히 조건적이었습니다. 그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이었고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았습니다. 그 어떤 민족도 이스라엘과 같은 조건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자신들이야 말로 하나님의 백성임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본문 11절에 보면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 곧 내가 내 양을 찾고 찾되”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내 양을 찾으신다는 것은 목자 되신 하나님께 잃은 양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잃은 양이 없다면 내 양을 찾으신다고 말할 이유가 없습니다. 따라서 본문에서 생각해 볼 내용은 ‘하나님이 잃어버린 하나님의 양이 누구인가?’하는 것입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이스라엘은 자신들을 하나님의 양으로 간주할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자신을 하나님의 양이라고 생각합니까? 아마 하나님의 양이길 바랄 것입니다. 하나님의 양이 아니라면 구원과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양이 어떤 존재인가?’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채 다만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의 양으로 지칭되고 싶어 하는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13-15절을 보면 “내가 그것들을 만민 중에서 끌어내며 열방 중에서 모아 그 본토로 데리고 가서 이스라엘 산 위에와 시냇가에와 그 땅 모든 거주지에서 먹이되 좋은 꼴로 먹이고 그 우리를 이스라엘 높은 산 위에 두리니 그것들이 거기서 좋은 우리에 누워 있으며 이스라엘 산 위에서 살진 꼴을 먹으리라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친히 내 양의 목자가 되어 그것들로 누워 있게 할찌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목자가 되셔서 양들을 좋은 꼴로 먹이고 좋은 우리에 누워 있게 하신다는 내용을 보면 누구라도 자신이 목자 되신 하나님의 양이기를 원할 것입니다. 이유는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의 양이라면 목자 되신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모든 혜택, 즉 좋은 꼴과 좋은 우리를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자기 구원을 중심으로 한 생각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중심이 된 신자의 생각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목자’‘나는 하나님의 양’이라는 조건만 조립해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시 23:1-3)와 같은 말씀이 자신의 현실이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자기중심으로 해석하면서 듣기에 좋은 구절만 자기 생각대로 이뤄지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곧 제 길로만 가는 양의 모습이며 우리가 이런 양으로 존재하는 것이 진짜 현실입니다. 믿음을 말하지만 믿음과 상관없이 자기의 길로만 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에 대해 사 53:6절에 보면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간 것이 양이며, 그 양이 바로 우리 자신으로 해석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양이 되고 하나님의 양으로 인정받고자 하기 전에 먼저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간 그 양이 바로 나 자신이라는 사실에 대해 눈이 열려야 합니다. 그러면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사 53:7)는 말씀에 등장하는 어린양의 모습에 비추어 우리가 하나님의 양이 될 수 없는 이유가 명백해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오신 예수님은 제 길로 가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온전히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길을 가셨을 뿐이고 그 길이 도수장으로 향하는 길이라 할지라도 잠잠히 순종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양의 참된 모습이라면 우리는 분명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양’으로 자처할 수 없음이 분명해 집니다.

 

 

자신이 오직 심판을 받아야 할 허물로만 가득함을 알게 된다면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사 53:8)는 말씀과 같이 자신의 모든 허물을 대신 지고 형벌의 길을 가신 어린양으로 인해 회개하게 되고 애통함이 있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찾으시는 잃은 양의 모습입니다.

 

 

눅 15장에 보면 여러분이 잘 아시는 ‘탕자의 비유’가 있습니다. 이 비유에 등장하는 둘째 아들은 아버지에게 자신에게 돌아올 분깃을 요구하여 집을 떠났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자기의 길로 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모든 재물을 낭비하여 탕진하고 돼지 먹는 쥐엄 열매조차 주는 사람이 없는 비참한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그는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이런 고백을 하게 됩니다.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눅 15:18-19)

 

 

둘째 아들은 자신이 아버지께 죄를 지었음을 알게 되었을 때 아버지의 아들로 일컬음 받기를 감당할 수 없음을 알게 됩니다. 처음에는 아버지의 아들로 자신에게 돌아올 분깃을 당당히 요구하여 아버지가 나눠 준 것을 자신의 것이라 생각하여 자신을 위해 자기 길로 갔지만 그 모든 것이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은 것임을 깨달았을 때 비로소 자신이 아들로 일컬음 받을 자격이 없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둘째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마음은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눅 15:32)는 말씀에서 잘 드러납니다.

 

 

잃었다가 얻었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집을 나간 것이 잃은 것이고 돌아온 것이 얻은 것일까요? 단순히 집을 나가 독립한 것이 아들을 잃은 것이라면 오늘 우리는 자식이 부모를 떠나 독립하고자 하는 것을 허락할 수 없는 입장이 될 것입니다. 자식을 잃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를 떠나 자신의 길을 가기 위해 집을 떠났습니다. 아버지의 간섭 아래 있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고 누리며 살기 위해 분깃을 달라하여 집을 떠난 것입니다. 이것이 아들을 잃은 것입니다. 그러면 얻은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자신이 아버지의 아들로 인정될 자격이 없음을 자각하며 단지 품꾼의 하나라 할지라도 아버지의 다스림 아래 있는 것이 은혜임을 깨닫고 아버지를 찾게 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이 내 양을 찾으신다고 할 때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이 찾으시는 양이기를 바란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양으로서 누릴 수 있는 혜택에만 눈독을 들이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며 그것이 하나님이 찾으시는 양의 모습이 아닌 것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16절에 보면 “그 잃어버린 자를 내가 찾으며 쫓긴 자를 내가 돌아 오게 하며 상한 자를 내가 싸매어 주며 병든 자를 내가 강하게 하려니와 살찐 자와 강한 자는 내가 멸하고 공의대로 그것들을 먹이리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에 보면 하나님이 먹이시고 누워있게 할 양은 잃어버린 자, 쫓긴 자, 상한 자, 병든 자들입니다. 이들은 20절에서 언급하는 것처럼 ‘파리한 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파리한 양으로 존재할 생각이 있습니까? 목자 되신 하나님의 양이 되기를 바라는 것은 양이 되어 하나님이 주신 혜택을 누리고 싶은 생각이 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파리한 양으로 존재하는 것보다 살진 양으로 존재하는 것에 마음을 두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설령 파리한 양으로 존재할 의도가 있다 하더라도 그 역시 파리한 양을 하나님이 도우시고 싸매어 주고 강하게 하신다는 말씀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파리한 양이 되고자 한다 해도 그 속셈은 살찐 양이 되는 것에 있음을 부인할 수 없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포기하지 않는 나의 길입니다. 그리고 매일 같이 내가 원하는 나의 길로만 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우리가 하나님의 양으로 인정되고자 하는 것부터가 잃어버린 경험이 없다 할 것입니다.

 

 

눅 19;9-10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잃어버린 자를 위해 오셨음을 말씀하며 잃어버린 자가 누구인가를 삭개오를 내세워서 보여주십니다. 왜 삭개오가 잃어버린 자일까요? 그가 비록 세리장이고 부자이긴 했지만 이웃들로부터 죄인으로 비판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다 해도 그것이 잃어버린 자라는 조건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웃에게 비판을 받는 것이 잃어버린 자의 조건이라면 신자는 하나님이 찾으시는 잃어버린 자가 되기 위해 비판을 받기 위해 행동을 해야 한다는 의미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무 위에 올라가 있는 삭개오에게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고 말씀합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예수님을 영접합니다. 삭개오가 그토록 즐거워하는 것은 이웃으로부터 배척 받는 자신의 집에 예수님이 유하신다는 것 때문입니다.

 

 

이것을 보면 잃어버린 자는 예수님이 찾아오시고 부르시고 함께 해주시는 모든 일들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 즐거움이 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에 의해서 잃어버린 자로 드러나는 신자는 평소에 ‘나는 예수님과 함께 할 자격도 없다’는 것을 자각하는 자라고 할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할 수 없는 우리에게 예수님이 오시고 우리의 허물을 대신 지고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 은혜입니다. 구원은 오직 이 은혜로만 가능합니다. 조건이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삭개오와 같은 죄인도 능히 구원하는 무조건 적인 은혜입니다. 이 은혜가 우리를 잃어버린 자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현대 교회가 잘못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명백히 드러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은혜를 강조하면서도 은혜를 받으면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게 되고 참된 신앙인이 되어서 복을 받게 된다고 가르치는 것이야 말로 잃어버린 자를 찾지 않고 강포로 다스리는 교회의 횡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횡포에 의해서 교회에 살찌고 강한 양이 존재하는 것이고 이들에 의해 파리하고 약한 양들은 쫓기고 상하고 병들어 배척을 받게 됩니다. 목자 되신 하나님은 이들을 찾아 예수 그리스도로 먹이시고 예수님 안에 누워 있게 하십니다. 이것이 잃어버린 자를 찾아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여러분이 착각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여러분이 어떻게 행동하는가에 따라 참된 신앙인의 여부가 결정된다는 생각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행동하든 우리는 참된 신앙인이 될 수 없습니다. 이유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제 길로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설령 참된 신앙인이 우리의 노력으로 가능하다 해도 참된 신앙인이 되고자 하는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분명 여러분의 구원이 중심에 자리하고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목자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잃은 양을 찾으십니다. 예수님을 보내신 것도 잃어버린 양을 찾아 구원하기 위함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양은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다는 증거는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게 되면서 자신이 알았던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며 우상이었음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부르며 나름 신앙생활을 한다고 했던 모든 것이 자신을 위해 자기의 길로 갔던 죄였음을 자각하게 되면서 스스로를 하나님의 양으로 일컬음 받을 자격조차 없는 존재로 보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 같은 자를 위해 예수님을 보내시고 모든 허물을 대신 담당하게 하신 은혜로 감사하고 기뻐하게 되며 그리스도가 만족이 되는 새로운 세계를 접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잃은 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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