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2015.11.14 15:01

(52강) 오홀라와 오홀리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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겔 23:1-4http://onlycross.net/videos/eze/eze-230104.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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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2.인자야 두 여인이 있었으니 한 어머니의 딸이라

3.그들이 애굽에서 행음하되 어렸을 때에 행음하여 그들의 유방이 눌리며 그 처녀의 가슴이 어루만져졌나니

4.그 이름이 형은 오홀라요 아우는 오홀리바라 그들이 내게 속하여 자녀를 낳았나니 그 이름으로 말하면 오홀라는 사마리아요 오홀리바는 예루살렘이니라

<설교>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참된 신앙인이 되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참된 신앙은 무엇이고 참된 신앙인은 또 어떤 사람일까요? 또한 우리가 자신이든 타인이든 참된 신앙을 분별하고 판단할 능력이 있을까요? 결론은 인간에게는 참된 신앙을 분별하고 판단할 안목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참된 신앙인이 되고자 한다면 결국 참된 신앙의 기준에 대해 스스로 생각한 바가 있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리고 자신이 생각하는 참된 신앙의 기준에 스스로를 맞추려고 힘쓰게 되고 그 기준에 조금씩 맞추어져 가는 것으로 참된 신앙인이 되어가는 것으로 착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께 참된 신앙인이 되고자 하는 생각을 버리라고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이러한 말이 목사가 교인에 대한 합당한 말이 아닌 것처럼 들릴 수 있지만 어디까지나 여러분의 참된 신앙을 위해 드리는 말씀입니다. 제 말의 의미는 참된 신앙인이 되고자 하는 생각을 버리는 것이 참된 신앙의 길을 가는데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참된 신앙인이 되기 위해 참된 신앙인이 되려는 생각을 버리라는 뜻은 아닙니다. 참된 신앙인이 되고자 하는 생각이 참된 신앙과는 거리가 멀다는 뜻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스스로를 참된 신앙인으로 생각한다면 그 생각으로 자신이 음란한 창녀와 같은 존재임을 인정할 수 있을까요? 그럴 가능성은 없다고 봐야 합니다. 스스로를 참된 신앙인이라고 생각한다면 자신에게서 참된 신앙으로 인정할 수 있는 성품이나 행함을 봤다는 뜻이 됩니다. 이것은 자신이 예수님을 참되게 믿기 위해 힘쓰고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자신이 자신의 신앙을 인정하는 상태에서 스스로를 음란한 창녀와 같은 존재로 인정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된 신앙은 자신이 음란한 창녀와 같은 존재임을 인정하게 되는 가운데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에 참된 신앙인이 되고자 하는 생각을 버리지 않고는 참된 신앙의 길로 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참된 신앙을 위해 진심으로 필요한 유익이 되는 말은 “너의 신앙은 모두 가식이고 위선이다”입니다. 물론 여러분들이 서로 이러한 말을 주고받으라는 뜻은 아닙니다. 본인의 신앙부터 가식과 위선으로 뭉쳐 있는데 그런 우리가 어떻게 타인의 신앙을 판단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의 신앙을 가식과 위선으로 판단하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이 판단을 위해 남겨 놓으신 것이 성경이기에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너의 신앙은 모두 가식이고 위선이다”라는 판단을 받아야 합니다. 오늘의 말씀도 예외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말씀 앞에 세우시고 여러분이 어떤 존재인가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자 하심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본문이 말하는 우리의 실체는 남편을 두고 여러 남자와 행음하는 여인, 즉 음란한 창녀와 같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오홀라와 오홀리바라는 두 여인을 내세워 말씀합니다. 음란한 창녀와 같다는 것은 우리 자신에게서 쉽게 보지 못하고 인정하기도 싫은 말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우리의 현재 모습이라면 인정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리고 음란한 창녀와 같은 자신의 모습에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바라봐야 합니다. 여기에 하나님과의 바른 만남이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과의 바른 만남에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게 되고 그 하나님을 신앙하게 되는 것이 참된 신앙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요 4:18)라고 하시며 여인을 음란한 창녀와 같은 존재로 취급하시고 그 수치를 드러내셨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으로 인해서 예수님과의 바른 만남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취사선택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마음에 드는 내용만 골라 듣고 마음에 들지 않는 내용에 대해서는 외면해도 되는 말씀이 아닌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그 전부가 우리의 믿음 없음을 드러내고 그런 우리에게 하나님이 어떤 은혜로 인도하셨는가를 말씀함으로써 하나님의 은혜만을 바라보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이 여러분께 은혜가 된다면 여러분의 현재의 모습이 음란한 창녀와 같은 더러움과 가식과 위선으로 가득하다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예수님의 피로 덮여지고 거룩한 자로 여기신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은혜가 여러분께 있게 되는 것이 말씀의 역사이고 살아계신 하나님이 여러분께 함께 하시며 간섭하시는 증거입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신자라 여겼지만 신자처럼 살지 못하고 음란한 창녀와 다를 바 없이 살았습니다. 복음을 알고 예수를 안다고 생각했기에 참된 신자인 것처럼 여겼지만 우리의 관심의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세상이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난 아니다’라고 부인하고 싶고 지금까지 행해 온 신자로서의 행위를 증거 삼아 스스로를 변호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해도 하나님은 우리가 증거로 채택해 달라고 내미는 그 모든 것을 쓰레기라며 던져 버릴 것입니다. 그것을 말씀을 통해서 경험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경험이 여러분을 반발과 아픔과 혼란으로 끌어갈 것임을 잘 압니다. 하지만 제가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제대로 알 수 있는 기회가 된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를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깊은 세계로 이끄시기 위한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언니 오홀라와 동생 오홀리바는 각기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을 상징합니다. 즉 북쪽 이스라엘과 남쪽 이스라엘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을 한 어머니의 딸이라고 하는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자손인 이스라엘을 뜻하는 것입니다. 물론 오홀라와 오홀리바는 실제 인물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음란하게 행한 존재였음을 드러내기 위해 등장시킨 상징적 인물일 뿐입니다.

 

 

이처럼 오홀라를 북 이스라엘의 수도인 사마리아로 말하고 오홀리바를 남쪽 이스라엘의 수도인 예루살렘으로 말하는 것은 남과 북으로 분열된 이스라엘을 지칭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3절을 보면 “그들이 애굽에서 행음하되 어렸을 때에 행음하여 그들의 유방이 눌리며 그 처녀의 가슴이 어루만져졌나니”라고 말합니다.

 

 

애굽에서 행음했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출애굽하기 전 애굽에서 노예로 생활했을 때를 말합니다. 그 때는 당연히 이스라엘이 남과 북으로 분열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다시 말해서 본문의 내용대로 말한다면 오홀라와 오홀리바가 아직 태어나기도 전이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자손 이스라엘로 형성되어 있었을 뿐이고, 남과 북으로 분열된 것은 오랜 세월이 지나고 솔로몬 왕 이후에 여로보암의 반역으로 인해 되어진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 즉 오홀라와 오홀리바가 애굽에서 어렸을 때에 행음하였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오홀라와 오홀리바의 행음이 그들이 태어나기도 전, 남과 북으로 분열되기 전 애굽에서 생활했을 때부터 이미 행해졌던 일이라는 뜻이 됩니다. 그 행음의 실체가 남과 북으로 분열됨으로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입니다.

 

 

다윗 왕국은 겨우 두 세대도 넘기지 못하고 분열되었습니다. 전능하시고 신실하신 하나님이 다윗을 택하시고 왕으로 세우심으로 설립된 왕국이 그렇게 빨리 분열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관심이 이스라엘이라는 국가나 민족에게 있지 않았다는 뜻이 됩니다. 다윗을 택하시고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신 것이 이스라엘을 번성케 하여 강한 국가가 되게 하고자 하신 것이라면 이스라엘이 분열되는 것을 그냥 두고 보지 않으셨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행음했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애굽에서 행음했다면 애굽과 행음했다는 뜻인데 알다시피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400년을 지내면서 노예가 되었습니다. 노예로 고통스러운 생활을 했기에 애굽에 대해 반감을 가지는 것이 당연한데 어떻게 애굽에서 행음할 수 있었겠습니까?

 

 

5,6절을 보면 “오홀라가 내게 속하였을 때에 행음하여 그가 연애하는 자 곧 그의 이웃 앗수르 사람을 사모하였나니 그들은 다 자색 옷을 입은 고관과 감독이요 준수한 청년이요 말 타는 자들이라”고 말합니다.

 

 

오홀라, 즉 북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신부로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을 때 이웃 나라 앗수르 사람을 사모하여 연애하였는데, 그 이유는 앗수르 사람이 자색 옷을 입은 고관과 감독, 준수한 청년, 말 타는 자들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많은 여자들이 꿈꾸는 백마 탄 왕자, 멋있는 남자로 보였다는 것입니다. 앗수르가 누리고 있는 부요의 삶을 멋있게 바라보고 부러워하는 것을 앗수르를 사모하는 것으로 표현하는 것이고, 그것을 행음하는 것으로 말씀한 것입니다.

 

 

그런데 11절을 보면 오홀리바의 눈에도 앗수르 사람이 멋있게 보였고 앗수르 사람을 연애함으로 두 여인이 한 길로 행하였다고 말합니다(13절). 이러한 두 여인의 행음이 이미 애굽에서 어렸을 때부터 있었다는 것입니다. 앗수르를 멋있게 바라보고 부러워하며 사모하는 행음이 애굽에서부터 있었던 것입니다. 그 말은 곧 이스라엘이 애굽의 노예로 있으면서 애굽을 사모하였다는 뜻이 됩니다.

 

 

민 11:4-5절을 보면 “그들 중에 섞여 사는 다른 인종들이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이르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랴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오이와 참외와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라고 말합니다.

 

 

애굽에서 종의 신분으로 고통을 겪던 것은 잊어버리고 매일 먹는 만나가 지겹다며 예전에 애굽에서 먹던 음식들을 사모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들이 애굽에 있었을 때 비록 종의 신분으로 고통을 겪는다 해도 생선과 오이와 참외와 부추와 파와 마늘을 먹을 수 있다는 것으로 만족했을까요? 그럴 리가 없습니다. 광야에서 드러나는 이들을 본성을 보면 애굽에 있었을 때는 애굽 사람들이 누리는 삶이 멋있게 보였을 것이고 부러워했을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말씀하신 애굽에서의 행음이고 이 행음이 이스라엘이 남과 북으로 분열되는 것으로 더 확실하게 드러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 있든 광야에 있든 변할 수 없는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 아래 있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신분은 이스라엘이 사모했던 애굽이나 앗수르에게는 없는 것입니다. 어느 민족도 누리지 못한 신분을 이스라엘이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언약 백성 된 것은 그들이 그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갓 태어나 피투성이 상태로 버려진 상태에서 누구하나 불쌍히 여기지 않는 비참한 몰골이어지만 하나님이 거두어 왕후의 신분까지 누리게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그같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으로 그 크신 사랑만 사모하면 되었지만 부요를 누리는 주변의 나라들을 사모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행음하는 것으로 말씀합니다. 한 남자하고만 행음한 것이 아닙니다. 멋있게 보이는 모든 남자를 사모하였기에 음란한 창녀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을 알고 복음을 알며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도 안다고 하는 우리에게 과연 사모하는 것이 없다고 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하셨고 모든 죄와 허물을 덮으시고 거룩한 자로 여기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임을 모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은혜와 사랑에 대해 지루해합니다. 다 아는 이야기인데 계속 들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부요를 누리고 세상 일이 잘되는 사람들을 보면 그들을 사모하고 부러워하며 그들처럼 살지 못하는 자신의 삶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목사는 큰 예배당과 많은 수의 교인과 수십억 수백억의 재정을 가진 교회를 사모합니다. 그리고 자신도 그러한 교회에 담임 목사가 되어 과시하고 싶은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도구 삼아 자기 말을 합니다. 이러한 마음들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마음에 품고 사모하며 그 은혜와 사랑으로 만족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결론은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음란을 행한 창녀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참된 신앙인이 되고자 하는 것도 표면적으로는 건전하고 믿음이 있는 신자라면 당연히 있어야 할 생각으로 여기겠지만 그 내면에는 참된 신앙인이라는 자기 가치를 품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기 때문에 그 역시 음란을 행하는 창녀에게서 나오는 생각일 뿐입니다.

 

 

혹여 이러한 말에 반발이 된다면 자신을 음란을 행하는 창녀로 인정하기를 거부하고 싶기 때문이 아닌지를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곧 음란을 행하는 창녀라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4절에 보면 “그 이름이 형은 오홀라요 아우는 오홀리바라 그들이 내게 속하여 자녀를 낳았나니 그 이름으로 말하면 오홀라는 사마리아요 오홀리바는 예루살렘이니라”고 말합니다.

 

 

오홀라와 오홀리바가 하나님께 속하여 자녀를 낳았는데 그들이 사마리아고 예루살렘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속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나님의 신부로 자녀를 낳았다는 뜻입니다. 이상한 것은 하나님의 신부로 자녀를 낳았다면 하나님만 섬기는 거룩한 자녀를 낳는 것이 맞는데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을 낳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모두 음란을 행하는 창녀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주지해야 할 사실은 하나님이 낳은 하나님의 백성이라 할지라도 그 본질은 음란을 행하는 창녀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다만 다른 점은 누구도 인정하지 않을 자신의 본래의 모습을 말씀이 드러낸 그대로 인정하게 되고 ‘나는 죄인의 괴수입니다’는 고백과 함께 십자가를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로 확증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만이 유일한 희망임을 깨달으며 그 은혜와 사랑만을 사모하게 되기를 소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속한 사람에게서 자연히 맺어지는 열매입니다.

 

 

인간의 본질을 잊은 채 은혜와 사랑을 말하는 것은 모두 거짓일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본질이 모두 드러나고 내 자신이 감히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거짓 존재라는 것이 생생히 자각될 때 십자가가 구원의 길이라는 그 의미를 알게 되고 우리의 더러움을 덮어 주신 피의 은혜를 사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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