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2015.11.28 17:23

(54강) 하나님의 질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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겔 23:22-27http://onlycross.net/videos/eze/eze-232227.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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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22.그러므로 오홀리바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나는 네가 사랑하다가 싫어하던 자들을 충동하여 그들이 사방에서 와서 너를 치게 하리니

23.그들은 바벨론 사람과 갈대아 모든 무리 브곳과 소아와 고아 사람과 또 그와 함께 한 모든 앗수르 사람 곧 준수한 청년이며 다 고관과 감독이며 귀인과 유명한 자요 다 말 타는 자들이라

24.그들이 무기와 병거와 수레와 크고 작은 방패를 이끌고 투구 쓴 군대를 거느리고 치러 와서 너를 에워싸리라 내가 재판을 그들에게 맡긴즉 그들이 그들의 법대로 너를 재판하리라

25.내가 너를 향하여 질투하리니 그들이 분내어 네 코와 귀를 깎아 버리고 남은 자를 칼로 엎드러뜨리며 네 자녀를 빼앗고 그 남은 자를 불에 사르며

26.또 네 옷을 벗기며 네 장식품을 빼앗을지라

27.이와 같이 내가 네 음란과 애굽 땅에서부터 행음하던 것을 그치게 하여 너로 그들을 향하여 눈을 들지도 못하게 하며 다시는 애굽을 기억하지도 못하게 하리라

<설교>

 

오홀라와 오홀리바로 비유된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가 사모했던 대상은 강대국이었습니다. 오홀라는 앗수르, 오홀리바는 앗수르와 바벨론 과 애굽을 사모했던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북쪽과 남쪽 이스라엘 모두는 동일하게 강한 국가에 대한 목마름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강한 국가는 돈, 즉 부요한 경제와 막강한 군사력을 조건으로 합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자신들을 강한 존재로 만들어 줄 돈과 군사력에 대해 목말라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현대인들은 무엇에 목말라 할까요? 이스라엘과 다르지 않습니다. 자신을 강한 존재로 만들어 줄 것에 대해 목말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뱀의 유혹 아래 있던 여자가 선악과를 바라봄으로 시작되었던 목마름이고, 이 목마름은 멈추지 않고 지금까지 모든 인간에게 계속 되어 온 것입니다.

 

 

창 3:5절에서 사탄은 여자에게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는 말로 미혹합니다. 그리고 사탄의 말에 붙들린 여자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창 3:17)는 하나님의 말씀은 더 이상 현실이 아니었습니다.

 

 

창 3:6절을 보면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고 말합니다.

 

 

여자는 선악과에 목말라했습니다. 이유는 선악과가 자신을 현재보다 더 나은 상태의 인간이 되게 할 수 있을 것으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이 목마름이 지금까지 멈추지 않고 각자 인간이 원하고 추구하는 바를 따라 지금까지 계속되어 온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목마름에는 만족이란 것이 없습니다. 목말라 했던 것을 얻었다고 해서 목마름이 해결되고 목말라 하지 않은 상태가 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것을 바라며 목말라하는 것입니다. 목말라 했던 것을 얻었다 해도 잠시 기뻐할 뿐 어느 순간 가치는 점차 상실되어 흥미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때문에 인간은 죽는 순간까지 목마름에 허덕이는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홀리바가 앗수르에서 바벨론, 바벨론에서 다시 애굽을 사모하게 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자신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더 강한 것에 대한 목마름 때문입니다. 그래서 앗수르를 사모하다가도 갈대아 사람의 형상을 보고 사랑하게 되어(14절) 사절을 갈대아로 보낸 것입니다. 그렇지만 또 다시 바벨론 사람을 싫어하는 마음이 생기게 되고(17절) 애굽 땅에서 행음하던 때를 생각하며 다시 그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의 사랑은 어느 한 대상으로 고정되고 만족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대한 재판을 이스라엘이 사랑하다가 싫어하던 자들에게 맡깁니다. 그들을 충동하여 이스라엘을 치게 함으로 그들의 법대로 재판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너를 향하여 질투하리니 그들이 분내어 네 코와 귀를 깎아 버리고 남은 자를 칼로 엎드러뜨리며 네 자녀를 빼앗고 그 남은 자를 불에 사르며 또 네 옷을 벗기며 네 장식품을 빼앗을지라”(25,26절)고 말씀하심으로 그 모든 일이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질투임을 말씀합니다.

 

 

사랑의 관계에서의 질투는 자신만 사랑해주기를 원하는 대상이 자신만이 아닌 다른 누군가도 사랑할 때 나타나는 반응입니다. 따라서 사랑의 관계에서 질투가 없다면 그 사랑은 거짓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하나님의 질투는 지극히 당연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대개의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이 질투하신다는 것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거나 무시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하나님이 질투하신다는 것은 하나님이 신랑이시고 이스라엘이 신부의 위치에 있을 때 오직 신랑만 사모하고 의지하고 바라보기를 원하신다는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택하시고 부르시고 신부 되게 하신 하나의 신부만 사랑하십니다. 그런데 신부인 이스라엘은 한 신랑만 사모하고 바라보는 것이 안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여러 남편을 만들었습니다. 한 남편을 사랑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멋있게 보이는 남자를 봤을 때 기존의 남자는 버리고 그 남자에게 마음을 두는 것입니다. 마치 사마리아 우물에서 예수님을 만난 여인과도 같습니다. 이것이 멈추지 않은 목마름으로 살아온 우리의 현실입니다. 때문에 23장에서 지금껏 말씀드려온 오홀라와 오홀리바가 여러분과 상관이 없다는 생각은 버리시라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오홀라와 오홀리바가 아니라고 생각하신다면 그것은 ‘나는 하나님 한분만 사랑한다’는 뜻이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을 범죄 하지 아니하였다 하는 것과 같기 때문에 요일 1:10절의 말씀처럼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이 그 속에 있지 않다는 증거가 됨을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습니다. 그런데 앗수르, 바벨론, 애굽을 사랑하였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만족하지 못하였다는 뜻이 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하나님의 은혜로 만족하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의로운 하나님의 백성으로 여김 받게 된 것입니다. 그 은혜가 과연 여러분께 만족이 되는지 생각해 보시라는 것입니다. 만족이 안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로는 만족되지 않는 목마름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실상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다른 남자를 사모하고 사랑하는 관계를 모두 정리하고 한 남편, 하나님만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까? 물론 가능하다면 그것이 가장 최선의 방법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마음은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한 남편만 사랑하고 만족하는 것이 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해결책은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으며 그것이 ‘질투하시는 하나님’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질투하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은 오직 하나의 대상으로만 향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신부가 마음에 여러 남자를 둔 음란을 행한다고 해서 이혼하고 다른 신부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고자 한 그 대상을 끝까지 사랑하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하나님의 질투’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질투에서 우리가 엿볼 수 있는 것은 ‘사랑’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변하지 않고 끊어지지 않는 크고도 위대한 사랑이 하나님께 있음을 하나님의 질투에서 알게 되는 것입니다. 끝까지 사랑할 뜻이 없으시다면 ‘질투’는 무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질투를 이해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고 그 사랑은 오직 하나님으로만 가능한 구원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수 24:19절을 보면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여호와를 능히 섬기지 못할 것은 그는 거룩하신 하나님이시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니 너희의 잘못과 죄들을 사하지 아니하실 것임이라”고 말합니다.

 

 

이 구절 앞에서 여호수아는 백성들에게 여호와만 섬길 것을 말했고 백성들은 수 24:16-18절에서 자신들은 결단코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심을 섬기는 일을 하지 않겠다고 장담합니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은 여호수아가 너희가 여호와를 섬기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이시고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질투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여호와를 섬기지 못할 것이라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하나님의 질투는 백성들이 온전히 하나님만을 의존하고 사랑할 것을 요구한다고 했습니다. 마음에 또 다른 사모의 대상이 있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백성들은 자기 마음이 사모하는 것이 무엇인가는 생각하지 않고 여호와를 섬길 수 있다고 장담한 것입니다. 여호와를 섬기는 것은 여호와를 신으로 믿고 제사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여호와를 섬긴다고 하면서도 이방의 신에게 매력을 느끼고 성전에 끌어 들인 것입니다.

 

 

출 20:3절에 보면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고 말합니다. 십계명의 첫 번째 요구가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신자라면 누구든 이 규례에 대해 자신감을 가질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다른 신의 개념을 표면적으로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출 34:14절에 보면 “너는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하는 질투의 하나님임이니라”고 말합니다.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의 질투는 마음에 다른 사모의 대상을 두는 것조차 용납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우리의 속은 이미 다른 신으로 가득합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여러분 자신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만이 자리하셔야 할 신의 자리를 피조물인 우리가 차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우리가 여호와를 섬긴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구원은 우리로서는 가능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으로만 가능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의 구원이시고 생명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앗수르, 바벨론, 애굽과 같은 경제적 부요와 힘을 제공하지 않는 하나님으로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방을 사모하며 그들의 신을 하나님과 겸하여 섬긴 것입니다. 이방인이 섬기는 신을 통하여 그들이 누리는 삶의 부요를 자신들도 누리며 그 기쁨을 찾고 싶었던 것입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구원과 생명이 하나님께만 있음을 잊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질투하시면서 이스라엘을 그들이 사모했던 이방인의 손에 넘겨서 재판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사랑하기 때문에 질투하시는 것이라면 이스라엘을 심판하셔서 고초를 겪게 하는 것보다는 용서하시고 기회를 주셔서 모든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만 섬길 수 있도록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에 부합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만 섬기는 백성으로 변화할 가능성이 있을 때 통용될 수 있는 말입니다. 결코 변할 수 없는 것이 이스라엘이고 인간의 실상인데도 불구하고 죄를 묻지 않고 무조건 사랑으로 용서하고 받아준다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에도 어긋날뿐더러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고자 하는 인간의 탐욕일 뿐입니다.

 

 

슥 8:2절에 보면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내가 시온을 위하여 크게 질투하며 그를 위하여 크게 분노함으로 질투하노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스가랴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 포로 생활을 끝내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성전 재건을 시작하였으나 여러 가지의 방해로 2년 만에 공사가 중단 되었을 때 성전 재건을 완성하도록 독려하는 내용입니다.

 

 

바벨론 포로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이스라엘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성전을 재건할 때 자신들의 어려운 형편을 이유로 성전 재건에 불만이 생겼고 그로 인해 공사가 중단된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 생활은 그들을 변화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존재인가를 명확히 드러내기 위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은 범죄로 인해 심판을 받아야 할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을 사랑하시고 복을 주신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일방적이고 무조건적인 은총인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이스라엘을 포로 되게 하시고 다시 돌아오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슥 8:2절을 보면 이스라엘이 아닌 ‘시온을 위하여’라는 말을 합니다. 시온은 성전을 뜻하고 성전은 하나님의 용서의 은총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질투는 이스라엘을 세워서 하나님의 용서가 복의 근원이 되는 생명의 세계를 나타내게 위함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모든 죄가 용서 받았음을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복의 근원이시고 생명이심을 믿습니다. 그럼에도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로 만족할 수 없는 목마름이 여전히 있습니다. 이 목마름은 세상으로 인한 것일 수도 있고 종교적인 것으로 인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세상의 것으로 자기 가치를 높이고자 하고 종교적으로도 가치 있는 존재가 되고자 하는 탐심이 목마름을 멈추지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특히 신앙인이라 자처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기쁨과 능력을 크게 체험하고 싶어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용서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목마름은 있게 되는 것이고 결국 그 목마름을 자신의 열심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것이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한 길을 예수님께 두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것이고, 그것이 곧 다른 남자를 사모하는 음란인 것입니다.

 

 

요 4장에서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생수에 대해 말씀하셨을 때 여인은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셨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마셨는데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요 4:12)라고 말합니다.

 

 

여인은 자신들에게 야곱의 우물이 있고 그 물을 마시는 것으로 됐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치 지금의 기독교인들이 자신들에게는 기도가 있고 성경이 있고 여러 가지의 행위가 있으니 그것으로 됐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곧 예수님을 믿는다 하고 용서를 말하면서도 예수가 누구신지를 모르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이 야곱의 우물에서 물을 길러 먹어도 다시 목마르다고 하신 것처럼 우리가 무엇을 행한다 해도 그것이 목마름을 해결해주지는 못합니다. 우리를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하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곧 하나님 앞에서 심판의 대상임을 알게 되고, 무엇을 행한다 해도 죄를 덮고 심판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임을 안다면 음란한 우리에게 오셔서 신랑이 되신 예수님이 참된 남편이시며 예수님의 은혜가 우리를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질투는 우리 안에 참된 신랑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남겨둡니다. 이것이 질투의 의미입니다. 여러분이 그 어떤 열심을 행한다 해도 여러분의 열심이 목마름을 해결해 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열심으로 인한 만족은 순간의 기분이며 느낌일 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하나님의 은혜를 보게 된다면 애굽을 기억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애굽 또한 허상일 뿐이며 그리스도가 생수이심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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