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2016.01.09 16:39

(60강) 두로를 위한 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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겔 27:1-4http://onlycross.net/videos/eze/eze-270104.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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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2.인자야 너는 두로를 위하여 슬픈 노래를 지으라
3.너는 두로를 향하여 이르기를 바다 어귀에 거주하면서 여러 섬 백성과 거래하는 자여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두로야 네가 말하기를 나는 온전히 아름답다 하였도다
4.네 땅이 바다 가운데에 있음이여 너를 지은 자가 네 아름다움을 온전하게 하였도다

 


<설교>

‘하나님 중심’‘성경 중심’이라는 말을 많이 들을 수 있습니다. 여기에 ‘교회 중심’을 더하여 표어로 정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중심’이라는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 증거는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과 함께 교회 중심을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중심의 의미를 바르게 이해한다면 교회 중심을 언급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대개의 기독교인은 교회 중심을 성경적인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교회 중심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신자라면 교회가 생활의 중심 되어야 하는 것 아니냐?’라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중심의 의미를 모르는 것이라고 단호하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이라는 말의 의미는 중심에 ‘나’가 없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신앙이 자기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님을 이해하고 받아들였음을 뜻하는 것이고, 나를 위한 하나님도 내 편이 되어 일하시는 하나님도 없으며 나를 감동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님도 알았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신자는 교회 중심을 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교회 중심이라는 말에는 교회가 중심이 된 신앙생활로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그로 인해 원하는 것을 받고자 하는 속뜻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즉 자기를 위한 교회 중심인데도 그 말이 잘못되었음을 알지 못하는 것은 항상 자신에게 가치를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으로 살면 복을 받는다는 말도 복음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복음에는 ‘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복음이 복음 되기 위해서는 언제나 나란 존재는 부정되어야 합니다. 그처럼 내가 부정되고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이 된 시각에서 성경을 본다면 이해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 전혀 없습니다. 성경이 이해되지 않는 것은 내용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나의 가치를 부정하는 복음의 세계가 용납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우리가 원하는 높음의 자리를 약속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원치 않은 낮은 자리로 끌어가시고 그 자리에서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를 용서하신 그 은혜만을 바라보게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가 복이 되고 기쁨과 감사와 만족이 되는 세상을 살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증거 하는 십자가 중심의 복음입니다.

 


여러분이 아셔야 할 것은 낮은 자리에서 예수님의 은혜를 바라보게 되는 것조차 우리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나’라는 존재를 절대로 내려놓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신앙을 명목으로 자기만족을 추구하는 것이 죄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그 모든 죄를 십자가의 피로 용서하신 주의 은혜를 바라보게 되는 것은 우리의 믿음이 아니라 주의 믿음으로 가능케 된 일입니다. 신자는 이것을 깨달았기에 예수님의 공로만을 주장하고 높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세계이고 겔 27장도 여러분을 오직 그리스도가 중심이 된 복음의 세계로 이끌기 위해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5-25절을 보면 두로를 크고 화려한 상선으로 비유하여 무역을 통해 두로가 누렸던 부요와 영화에 대해 말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부요와 영화도 두로라는 배의 침몰과 함께 사라지게 됨을 말함으로써 세상 부요와 영화의 헛됨을 보게 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부요와 영화는 다 헛된 것이고 결국 사라지는 것일 뿐입니다’라고만 말한다면 맞은 말이긴 하지만 결국 교훈이 되고, 성경도 다른 종교에서 가르치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판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크고 화려한 배로 비유된 두로가 결국 침몰하면서 배에 있는 모든 것이 바다 속에 수장 되고, 그런 두로를 보면서 놀라고 두려워하고 비웃기도 하는 주변의 반응이 기록되어 있는 27장이 우리에게 어떻게 복음으로 다가오는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먼저 4-7절을 보면 두로라는 배가 온갖 귀한 재료로 만들어 졌음을 말함으로 그 배의 화려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8-11절에서는 지혜롭고 용맹 있는 사람들이 배의 선장과 사공과 군사가 되어 그 배를 이끌고 보호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어떤 풍랑에도 끄떡없을 것 같은 크고 단단하고 화려한 배가 두로라는 것입니다.

 


또한 두로는 여러 사람, 여러 나라와 많은 무역을 하여 그 부요함 또한 대단했습니다. 이것을 25절에서 “다시스의 배는 떼를 지어 네 화물을 나르니 네가 바다 중심에서 풍부하여 영화가 매우 크도다”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이것이 두로가 누리는 영화였다면 두로는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3절에서 “너는 두로를 향하여 이르기를 바다 어귀에 거주하면서 여러 섬 백성과 거래하는 자여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두로야 네가 말하기를 나는 온전히 아름답다 하였도다”라고 말한 것처럼 두로는 자신들을 온전히 아름다운 존재로 여겼습니다.

 


누구라도 두로와 같은 현실에 있다면 스스로를 높은 위치에 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재물이 곧 힘이 되는 세상에서 다른 사람이 누리지 못한 부를 누리고 살아간다면 누구든 자신을 힘 있고 높은 자리에 있는 존재로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두로가 자신들을 가리켜 ‘나는 온전히 아름답다’라고 한 것으로 보여줍니다. 이것이 두로, 즉 세상의 속성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두로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4절의 “네 땅이 바다 가운데에 있음이여 너를 지은 자가 네 아름다움을 온전하게 하였도다”는 말씀처럼, 두로도 지음 받은 피조물이며 그들이 누리는 온전한 아름다움 또한 그들의 힘으로 이룬 그들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두로와 같은 부요와 영화를 누리고 싶어 하는 것은 모든 사람들의 꿈이며 열망입니다. 그것을 이룰 능력과 조건과 기회가 없는 것이 한스러울 뿐이지 인생에서 부요와 영화를 꿈꾸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이처럼 우리에게는 꿈에서라도 누려보고 싶은 열망인 그것을 하나님은 그들을 침몰로 이끌어 가는 악한 것으로 보신다는 사실을 주지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본문에서 드러나는 두로의 악함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그리고 두로의 악함으로 드러나는 우리의 악함은 또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부자가 되고 싶은 욕망이 악한 것일까요? “부자 되기에 애쓰지 말고 네 사사로운 지혜를 버릴지어다”(잠 23:4)는 말씀이나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렵다는 말씀들을 생각하면 부자 되고자 하는 것이 악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지금 두로는 부자 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부자가 되었고 그 부요를 누리고 있습니다. 부자가 부요를 누리는 것을 악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한 두로에게서 나타나는 악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누리는 부요와 영화에 대해 만족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이 현재 소유하고 누리는 것으로 만족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두로가 계속 무역에 힘을 쏟는 것은 더 많은 부의 축적에 있습니다. 어떤 사람, 어떤 나라가 현재의 부요에 만족할까요. 두로가 부요와 영화에 대해 만족한다는 것은 부요한 것을 곧 부족함이 없는 삶으로 이해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이 자신에 대한 두로와 세상의 시각이며 하나님은 이것을 악하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스스로를 부족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이 그러한 생각을 하게 합니까? 남들보다 능력이 없어서 돈을 벌지 못하고 가난한 것 때문입니까? 아니면 남들처럼 많이 배우지 못해서입니까? 세상은 늘 타인을 의식하며 타인이 누리는 것을 누리지 못할 때 자신이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악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시각에 있는 사람은 결국 타인보다 나은 것이 있을 때 그것으로 만족하고 우월감을 가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계 3:17절에 보면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라고 말합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한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세상의 시각에서 자신을 바라봤습니다. 그러자 부요한 자신들이 부족함이 없게 보입니다. 부요에 대해 자족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바라보는 라오디게아 교회는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은 상태였을 뿐입니다. 이것을 보면 두로가 곧 라오디게아 교회였고 라오디게아 교회가 곧 오늘 우리입니다.

 


이스라엘이 부요한 나라들을 사모한 이유도 다르지 않습니다. 앗수르와 바벨론, 애굽에 비해 부요하지 못한 자신들을 부족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도 부요해지는 것으로 부족함에서 부족함이 없는 존재가 되고 싶은 열망으로 우상을 끌어 들인 것입니다. 이처럼 이방나라와 동일하게 부해지는 것으로 부족함이 없는 온전한 상태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 악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인간의 현실이 부해지기만 하면 부족함이 없는 온전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까? 인간은 본래적으로 곤고하고 가련하고 벌거벗은 불쌍한 존재입니다. 이것은 무엇으로도 가려지지 않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인간의 진짜 현실로 내려가서 스스로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낮은 자리이고 그 자리에서 스스로를 보게 되고 주가 누구이신가를 알 때 주의 은혜만을 바라고 붙들고자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을 가리켜서 신자라고 이름 합니다.

 


그러고 보면 “인자야 너는 두로를 위하여 슬픈 노래를 지으라”(2절)는 말씀은 두로를 위한 슬픈 노래가 아니라 바로 우리 스스로를 위한 슬픈 노래가 됩니다. 두로처럼 부요와 영화를 부족함이 없는 아름다운 인생을 누리기 위한 조건으로 바라보고 열망하고 기대하는 우리 자신을 위한 슬픈 노래가 아닐 수 없습니다.

 


두로의 영화와 화려함은 인간이 열망하는 세계입니다. 하지만 두로를 지으신 분은 하나님이시고 두로가 온전한 아름다움으로 생각하는 것 또한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두로의 부와 영화가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면 세상이 그토록 열망하고 오르고자 하는 부요라는 높음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어지는 복과 은총은 아니라는 것이 분명해집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한 두로에게도 주시는 아름다움이 하나님이 택하시고 예수님의 은혜 아래 있게 하셔서 예수님의 높음을 자랑하게 하는 하나님의 백성만 누리는 아름다움으로 자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참된 현실을 보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부요로 치장되고 그것을 온전한 아름다움으로 여기며 부러워하고 열망하는 바다에 침몰될 세상 현실이 아니라 영원히 참몰되지 않는 참된 현실을 보게 하시겠다는 것이 예수님의 뜻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복음의 취지입니다. 그래서 복음의 세계에는 부요해지는 것을 부족함이 없는 온전한 삶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되는 것을 부족함이 없는 온전함으로 여기는 신자만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 하나님 중심이며 성경 중심입니다.

 


스스로를 온전히 아름답다고 자족한 두로의 결국은 침몰입니다. 두로라는 배가 침몰할 때  배에 있던 사공과 선장들은 배에서 내려 언덕에 서서 통곡하고 재 가운데 뒹굴며 머리털을 밀고 굵은 베로 띠를 띠고 마음이 아프게 슬피 통곡할 것입니다(29-31절). 이들이 침몰한 배의 선원인지 다른 배의 선원을 말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중요한 것은 두로의 침몰로 슬퍼하고 통곡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36절을 보면 “많은 민족의 상인들이 다 너를 비웃음이여 네가 공포의 대상이 되고 네가 영원히 다시 있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고 말합니다. 두로의 침몰로 인해서 슬퍼하고 통곡하고 어떤 이는 비웃기도 하지만 그 모든 중심에는 ‘나’가 있습니다. 두로의 침몰이 주는 이익의 여부에 따라 나타나는 반응으로 볼 수 있습니다.

 


두로로 인한 이러한 반응에서 찾아볼 수 없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세상을 어떻게 보시는지, 그리고 왜 심판을 받아야 하는지가 없는 것입니다. 자기중심으로 사는 것이 인간이기에 하나님이 세상을 어떻게 보시고 어떻게 다스리시는가에 대해서는 관심 두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일이면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고 하나님의 뜻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두로를 지으시고 그들의 아름다움을 온전하게 하신 것은 두로에게 주어진 아름다움이 그들을 침몰에서 건져내는 능력이 되지 못함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세상이 추구하고 열망하는 아름다움이란 것이 영원하지 못하고 바다에 침몰되어 사라질 것에 불과할 뿐임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현실임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그것을 알지 못하고 부요로 온전히 아름다운 모습이 되기를 열망하고 쫓다가 결국 침몰하여 영원히 다시 있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두로를 통해서 그 같은 현실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두로처럼 세상의 아름다움에 눈이 가려 침몰하게 될 죄의 운명을 알지 못하고 화려한 영화를 끝없이 열망하는 우리 자신을 위해 슬픈 노래를 불러야 합니다. 침몰하여 영원히 다시 있지 못할 나 같은 자를 십자가의 은혜로 죽음의 자리에서 건져주시고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가 되게 하신 그 영화로움을 기뻐하고 감사하게 되는 그가 신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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