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2015.06.06 19:35

(31강) 재앙과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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겔 14:12-23http://onlycross.net/videos/eze/eze-141223.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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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2.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13.인자야 가령 어떤 나라가 불법을 행하여 내게 범죄하므로 내가 손을 그 위에 펴서 그 의지하는 양식을 끊어 기근을 내려 사람과 짐승을 그 나라에서 끊는다 하자

14.비록 노아, 다니엘, 욥, 이 세 사람이 거기에 있을지라도 그들은 자기의 공의로 자기의 생명만 건지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15.가령 내가 사나운 짐승을 그 땅에 다니게 하여 그 땅을 황폐하게 하여 사람이 그 짐승 때문에 능히 다니지 못하게 한다 하자

16.비록 이 세 사람이 거기에 있을지라도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그들도 자녀는 건지지 못하고 자기만 건지겠고 그 땅은 황폐하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7.가령 내가 칼이 그 땅에 임하게 하고 명령하기를 칼아 그 땅에 돌아다니라 하고 내가 사람과 짐승을 거기에서 끊는다 하자

18.비록 이 세 사람이 거기에 있을지라도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그들도 자녀는 건지지 못하고 자기만 건지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19.가령 내가 그 땅에 전염병을 내려 죽임으로 내 분노를 그 위에 쏟아 사람과 짐승을 거기에서 끊는다 하자

20.비록 노아, 다니엘, 욥이 거기에 있을지라도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그들도 자녀는 건지지 못하고 자기의 공의로 자기의 생명만 건지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21.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내가 나의 네 가지 중한 벌 곧 칼과 기근과 사나운 짐승과 전염병을 예루살렘에 함께 내려 사람과 짐승을 그 중에서 끊으리니 그 해가 더욱 심하지 아니하겠느냐

22.그러나 그 가운데에 피하는 자가 남아 있어 끌려 나오리니 곧 자녀들이라 그들이 너희에게로 나아오리니 너희가 그 행동과 소행을 보면 내가 예루살렘에 내린 재앙 곧 그 내린 모든 일에 대하여 너희가 위로를 받을 것이라

23.너희가 그 행동과 소행을 볼 때에 그들에 의해 위로를 받고 내가 예루살렘에서 행한 모든 일이 이유 없이 한 것이 아닌 줄을 알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설교>

 

‘자기를 위하여’라는 말 앞에 누구도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모든 인간은 자기에 대한 집착으로 살아가며 누구도 자기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살고자 하고 살기 위해 신을 찾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러한 종교 또한 인간의 ‘자기애’의 산물이라 할 수 있고 도를 깨우쳐 스스로를 구원하고자 하는 것 역시 ‘자기 집착’‘자기애’로 인한 욕망인 것입니다.

 

 

기독교는 이러한 ‘자기애’와 구분되어야 합니다. 기독교는 자기 판단과 자기 해석과 자기애와 자기중심 그 모든 것이 뽑혀지고 대신 그 자리에 하나님의 뜻만이 굳게 세워지며 그 뜻에 자기 소원을 두는 길로 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살고자 하는 신앙이 아니라 죽고자 하는 신앙의 세계입니다.

 

 

헌데 지금의 기독교는 살기 위해 신을 찾는 종교로 전락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하나님은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것처럼 자기 우상을 마음에 들이고 죄악의 걸림돌을 자기 앞에 두었다고 하시며 그들이 묻는다 해도 조금도 용납하지 않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을 자신을 살리는 존재로 생각하는 그것이 우상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죽고자 하는 신앙의 세계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자기애로 살아가는 인간은 결코 죽고자 하지 않습니다. 죽기 위해 하나님을 찾는 사람 또한 없을 것입니다. 다른 종교와 다를 바 없이 살고자 하는 자기애로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의 기독교가 종교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살기 위해 하나님을 찾았으니 살려달라고 하나님을 부르며 아우성일 것이고 살려주는 것은 복, 죽이는 것은 저주라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종교이며 우상이라는 것입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기독교는 죽고자 하는 신앙의 세계라고 했지만 지금의 기독교는 살기 위해 하나님을 찾는 종교로 전락했습니다. 당연할 수밖에 없는 것이 스스로 죽고자 하는 것은 인간에게서 나와질 수 없는 속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죽음의 자리로 이끌어 가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난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고 백성이 되게 하고 백성으로 삼으신 자들의 하나님이 되어주기 위한 하나님의 일입니다. 다시 말해서 죽는 것이 곧 내가 사는 것이기 때문에 자기 백성을 죽음의 자리로 이끌어 가시는 것이 하나님의 긍휼이고 사랑이며 죽음의 자리로 이끌려 나와 자신의 죽음을 맛보게 되는 것이야 말로 복되다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제가 드린 이 내용들은 기존의 기독교가 말하는 내용과 상이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기존의 기독교의 시각에서 보면 이단의 말처럼 들릴 수도 있습니다. 당연한 것입니다. 진리에게는 비진리가 이단인 것처럼 비진리에게 진리는 이단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에게는 살고자 하는 자기애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죽고자 하는 신앙의 세계’라는 말이 귀에 거슬리는 것입니다. 만약 죽고자 하는 신앙의 세계를 이해하게 되고 따라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죽음이 있는 자리로 이끌어 가시는 분임을 알게 된다면 죽음이 오히려 위로로 다가오게 될 것입니다. ‘죽음에서 위로를 본다’바로 이것이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베푸시는 위로이며 이 위로를 아는 사람이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 위로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먼저 22절을 보면 “그러나 그 가운데에 피하는 자가 남아 있어 끌려 나오리니 곧 자녀들이라 그들이 너희에게로 나아오리니 너희가 그 행동과 소행을 보면 내가 예루살렘에 내린 재앙 곧 그 내린 모든 일에 대하여 너희가 위로를 받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에 큰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그 재앙에 대해 위로를 받는다면 재앙을 상쇄할만한 무엇인가가 주어져야 가능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욥이 재앙을 받은 후 나중에 이전 소유보다 갑절을 받은 것처럼 재앙으로 잃어버린 모든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받든지 해야 위로를 받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지금 이스라엘에게 달라진 것은 없습니다. 예루살렘은 재앙으로 인해 황폐해졌고 바벨론에서의 고통은 여전합니다. 그러한 처지에서 무엇으로 재앙에 대해 위로를 받을 수 있을까요? 그것을 22절에서는 재앙을 피하여 남은 자들이 끌려 왔을 때 그들의 행동과 소행을 봄으로 위로를 받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23절을 보시면 “너희가 그 행동과 소행을 볼 때에 그들에 의해 위로를 받고 내가 예루살렘에서 행한 모든 일이 이유 없이 한 것이 아닌 줄을 알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이유 없이 행동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리고 의로우시며 신실하신 분입니다. 예루살렘에 내린 재앙에도 하나님의 의와 신실하심이 있습니다. 바벨론에서 겪는 고통에도 역시 하나님의 의와 신실하심이 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그것을 알게 된다면, 즉 자신들이 겪는 모든 재앙과 고통에서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신실하심과 사랑을 보게 된다면 그것으로 위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죽음에서 위로를 보게 하시는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반복되는 구절이 있습니다. 그것은 “비록 노아, 다니엘, 욥, 이 세 사람이 거기에 있을지라도 그들은 자기의 공의로 자기의 생명만 건지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14절)입니다. 이 말씀과 같은 내용이 16절, 18절, 20절에서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 말씀들은 노아, 다니엘, 욥 이 세 사람이 아무리 의롭다 할지라도 각각 자기의 생명만 건질 수 있을 뿐 자기 자녀는 건질 수 없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일까요? 22절에서 언급한 것처럼 예루살렘 재앙에서 피한 자가 있습니다. 그들 또한 바벨론으로 끌려오긴 했지만 어쨌든 엄청난 재앙을 피하고 살아남았다는 것은 재앙에서 죽은 사람들보다는 신앙이 나은 것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재앙에서 피한 자가 있게 하시고 그들을 바벨론으로 끌려오게 하신 하나님의 취지가 가려지게 될 것이고 재앙에 대한 하나님의 위로 또한 받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재앙을 피하고 남았다는 것이 결코 의로운 사람이라는 증거가 아님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노아, 다니엘, 욥, 이들 세 사람을 살펴보면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들 모두 하나님의 심판, 즉 재앙 속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노아는 홍수 심판 속에 있었고, 욥 역시 하나님이 내리신 크나큰 재앙 속에 있었고, 다니엘도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오는 재앙 속에 있었습니다. 때문에 재앙을 겪으면 죄인이고 재앙을 피하면 의인이라는 공식은 성경에 없습니다. 비록 재앙 속에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는 것이 의로운 것이고 그 의로 인해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신자는 늘 하나님과의 관계에 초점을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비록 노아, 다니엘, 욥이 이스라엘에 있다 하더라도 이스라엘은 재앙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들의 의는 그들의 생명만 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예루살렘에 재앙이 내렸다는 것은 예루살렘에 의가 없다는 것이고 비록 재앙을 피하여 바벨론으로 끌려왔다 해도 그들 역시 의가 없는 자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 재앙을 피하는 남은 자들이 있게 하시고 그들을 바벨론으로 끌려오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 의도는 그들의 행동과 소행을 봄으로 하나님이 내리신 재앙에 대해 위로를 받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재앙을 피하여 끌려 온 자들을 통해 자신들이 누구인가를 보게 되고 그것으로 재앙에 대해 위로를 받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재앙에 대해 위로를 받게 된다면 재앙을 재앙으로만 바라보지 않게 되었음을 뜻합니다. 재앙에 담긴 하나님의 의도를 보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재앙을 피해 끌려온 자들의 행동과 소행을 통해 하나님의 재앙이 자신들에게 당연한 것임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죽음의 자리로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일입니다.

 

 

 이스라엘에 남은 자나 바벨론으로 끌려온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죽음을 알지 못했습니다. 다만 살기 위해 하나님을 찾았고 선지자에게서도 역시 자신들을 살리기 위해 함께 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말을 듣고 싶어 했을 뿐입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죽음의 자리로 이끌어 가시고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고자 하심을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드러내고자 하시는 것은 우리의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단지 몸이 죽는 죽음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독한 자기사랑, 자기애로 살아가는 것 또한 죽음이고 살기 위해 하나님을 찾고 부르는 것 역시 죽음이기에 이 모든 것을 포함한 인간의 참된 죽음으로 이끌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살기 위해 하나님을 찾는 것은 신앙이 아니며 참된 기독교가 아닌 것입니다.

 

 

세상은 모두가 살기 위해 산다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 세상에 복음이 모든 인간이 원하는 사는 길로 주어진다면 결국 복음 또한 세상이 사는 길에 함께 하는 수단이고 방법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지금 분명히 하셔야 합니다. 그것은 살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죽고자 하는 것이 예수님이 가신 길이었고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그 길로 가게 하시며 그것을 위해 죽음의 자리로 이끌어 내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분명히 한다면 우상이 무엇이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과 미워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바르게 분별하게 될 것입니다.

 

 

복음이 왜곡되어 해석되는 이유는 살고자 하는 탐욕의 시각으로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으로 인해 누릴 수 있는 기쁨을 놓치고 복음을 외치면서도 세상이 가는 욕망의 길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욕망이 채워지는 것을 하나님이 주시는 복으로 여기지만 그것은 결국 인간의 헛된 환상일 뿐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 또한 복음입니다.

 

 

그래서 복음 안에 있게 되면 세상의 부와 영광이 부럽지 않게 됩니다. 참된 기쁨이 세상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되는 것에 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이러한 기쁨으로 인도하시는 분이고 그것을 위해 죽음으로 이끄시는 것이기에 이것이 신자에게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이 위로는 세상이 줄 수 없습니다. 어떤 부와 영광에도 없는 위로입니다.

 

 

여러분께는 복음이 기쁨이 되십니까? 복음을 기쁜 소식이라고 하는데 왜 기쁜 소식입니까? 우리를 구원할 분이 오셨다는 소식 때문입니까? 그것은 복음의 세계로 들어가지 못하고 다만 밖에서 복음을 바라보는 수준에 지나지 않습니다. 복음이 기쁜 소식이 되는 것은 죽음의 자리에 있는 우리에게 참된 생명이 무엇인가를 말해주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은혜를 자기 죽음에서 보게 됩니다. 의가 없는 자신의 모든 것이 폭로되고 드러난 현장에서 자신의 죽음을 보며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로 이끌려 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일하심을 이해할 수 있습니까? 이것이 이해되는 것이 복이 있는 것이며 새 영, 새 마음이 주어졌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러한 백성으로 삼으셨고 세워 가신다는 사실에 중점을 두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가 어떤 어려움과 고통에 있다 할지라도 그 모든 것에 대해 위로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에 이유 없는 일은 없습니다. 예루살렘의 재앙에도 이유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으로 삼아 구원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들은 의가 없는 죽은 존재이고 따라서 재앙도 당연하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게 되면 하늘에서 온 참된 의가 생명임을 깨달으며 의의 이름을 부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알기에 재앙에 대해서도 위로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 위로를 아는 것이 참된 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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