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2015.07.04 19:56

(35강) 벗은 몸

조회 수 292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겔 16:35-43http://onlycross.net/videos/eze/eze-163543.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35. 그러므로 너 음녀야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36.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네가 네 누추한 것을 쏟으며 네 정든 자와 행음함으로 벗은 몸을 드러내며 또 가증한 우상을 위하며 네 자녀의 피를 그 우상에게 드렸은즉

37.내가 너의 즐거워하는 정든 자와 사랑하던 모든 자와 미워하던 모든 자를 모으되 사방에서 모아 너를 대적하게 할 것이요 또 네 벗은 몸을 그 앞에 드러내 그들이 그것을 다 보게 할 것이며

38.내가 또 간음하고 사람의 피를 흘리는 여인을 심판함 같이 너를 심판하여 진노의 피와 질투의 피를 네게 돌리고

39.내가 또 너를 그들의 손에 넘기리니 그들이 네 누각을 헐며 네 높은 대를 부수며 네 의복을 벗기고 네 장식품을 빼앗고 네 몸을 벌거벗겨 버려 두며

40.무리를 데리고 와서 너를 돌로 치며 칼로 찌르며

41.불로 네 집들을 사르고 여러 여인의 목전에서 너를 벌할지라 내가 너에게 곧 음행을 그치게 하리니 네가 다시는 값을 주지 아니하리라

42.그리한즉 나는 네게 대한 내 분노가 그치며 내 질투가 네게서 떠나고 마음이 평안하여 다시는 노하지 아니하리라

43.네가 어렸을 때를 기억하지 아니하고 이 모든 일로 나를 분노하게 하였은즉 내가 네 행위대로 네 머리에 보응하리니 네가 이 음란과 네 모든 가증한 일을 다시는 행하지 아니하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설교>

 

여러분은 하나님께 ‘살려 주십시오’라는 고백을 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우리에게서 그러한 고백이 나온다면 그것은 자신의 죽음의 위기를 감지했기 때문일 것이고, 그 위기는 오직 하나님으로만 해결될 수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환경의 악조건으로 인해 살려달라는 외침이 나올 수도 있지만 그것은 고통의 환경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간절함에 의한 것이라 할 수 있고 누구나 극한 환경에서는 자신이 믿는 신을 부르며 살려달라고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신앙과 연결된 고백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살려달라는 신자의 고백은 환경을 초월한 것입니다. 환경과는 무관하게 오직 십자가의 세계를 알게 됨으로 인해 나와질 수밖에 없는 고백입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모든 가능성과 의를 무너뜨립니다. 남을 것은 죽음 밖에 없습니다. 무엇을 해도 죽은 자에 지나지 않음을 알았고 죽음에서 건짐 받고 살 수 있는 길이 그리스도께만 있음을 알았다면 ‘살려 주십시오’라는 고백이 나와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옳은 신앙입니다.

 

 

살 수 있는 길이 그리스도께만 있음을 알았다면 그리스도를 믿으면 되는 것이지 ‘살려 달라’는 고백이 꼭 있어야 하느냐?라고 항변하고 싶다면 그것은 여전히 자기 의와 가능성이 무너지지 않은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십자가의 세계를 온전히 알았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세계를 알았고 자신의 가능성과 의가 완전히 무너진 신자라면 스스로의 의지로 그리스도께로 가거나 믿을 수 없음을 알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살려 달라는 고백은 십자가 아래 있는 신자에게서는 나와질 수밖에 없는 믿음의 행함인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이 있다 없다의 문제가 아니라 십자가를 믿는 믿음의 세계를 얼마큼 알고 있으며 그 세계를 살아가고 있는가의 문제입니다. 십자가의 세계는 미술품을 바라보고 즐기고 평을 하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니라 그 세계를 살아가야 하는 삶으로 다가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와 연결된 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신앙은 말씀드린 것처럼 자신의 가능성과 의를 부숴버리고 죽음만 남겨 놓기 때문에 자연히 살려달라는 고백과 함께 주를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로 말미암은 회개이며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라고 명시한 ‘상한 심령’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살려 달라는 간정한 고백이 나와지지 않는다면 그 이유를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요? 저는 그것을 미술품을 바라보듯 십자가 밖에서 은혜와 사랑을 감상하고 감탄하고 눈물 흘리되 십자가로 인해서 자신의 모든 것이 무너지고 벗겨지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여전히 자신의 가능성과 의가 살아있기에 자기 죽음을 보지 못하고 그렇기 때문에 살려 달라는 고백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한 두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공통적으로 있는 고질적 문제입니다. 이로 인해 사람은 자기 착각에 빠져 믿음에 합당하지 못한 길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문제라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떻게 일하실까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을 무너뜨리고 벗겨서 우리가 누구인가를 보게 하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본문의 말씀도 그러한 시각에서 바라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음녀에 빗대어 책망합니다. 천한 존재로 버려져 불쌍히 여김 받지도 못한 채 죽었어야 할 아이를 데려다 키우시고 자라게 하셔서 왕후가 되게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남편의 은혜와 사랑을 배신한 채 다른 남자들과 내통하여 간음한 아내가 이스라엘이었던 것입니다.

 

 

본문에서도 이스라엘을 음녀로 지칭하며 말씀을 계속 이어갑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남편의 은혜와 사랑을 배신하고 다른 남자와 내통하여 간음한 아내를 끌어다가 그 행위를 질책하며 남편으로서의 분노를 드러내며 음란의 죄에 대해 어떻게 심판할 것인가를 선포하는 내용입니다.

 

 

실제로 이러한 상황이 펼쳐졌다면 간음의 행위로 인해 끌려 나온 여자는 음녀로 칭함 받는 것이 당연한 것이고 음녀를 향한 남편의 분노와 심판 역시 당연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남편을 배신하고 다른 남자와 간음한 여인은 남편의 추상같은 질책 앞에서 감히 머리를 들 수 없는 부끄러움과 함께 자신의 더러운 행위로 인한 애통함으로 눈물을 흘리는 것이 우리가 예상할 수 있는 장면일 것입니다.

 

 

과연 음녀라는 말을 들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그런 반응을 보였을까요? 이스라엘은 차치하고서라도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본문의 말씀이 이스라엘이 아닌 여러분을 향한 선포라면 말씀드린 것처럼 남편의 질책을 모두 그대로 받아들이며 자신을 다른 남자와 내통하여 간음한 더러운 여인으로 인정하실 수 있겠습니까?

 

 

사실 16장의 내용은 우리의 입장에서는 현실감이 떨어진다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주어진 상황과 형편이 이스라엘과는 전적으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이방 강대국들에게 조공을 바치면서까지 동맹을 맺으려 하고 그들의 우상을 끌어 들인 것들이 분명 남편인 하나님을 배신하고 다른 남자와 내통하여 간음한 것으로 충분히 수긍된다고 할 수 있지만 그 이스라엘이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쉽게 수긍되지 않는 것입니다. 죄가 수긍되지 않는다면 죄에 대한 심판 또한 수긍할 수 없는 것이고 자신과는 별개의 문제로 보게 될 것입니다. 16장의 내용이 우리에게 그렇게 다가오기 쉬운 것입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이스라엘을 다른 남자와 내통하여 간음한 음녀로 말하는 것은 그들이 성적으로 문란해졌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남자들이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간음하고 여자들 또한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자와 내통하면서 총체적으로 성적으로 문란한 모습을 보이기 때문에 음녀라고 질책하는 것이 아니라 천한 이스라엘의 남편이 되어주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주변의 강대국을 의지하며 그들의 우상을 섬김으로 자신을 보호하고자 한 것을 두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지금의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아래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과 다를 바 없이 돈을 좇으며 부자 되는 것을 소원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돈을 좇고 부자 되고 싶은 소원이 있다는 것도 인정할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있는 열망이고 목표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자와 내통하여 간음한 음녀의 행위로 말한다면 인정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비록 돈을 좇는 마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부자 되고 싶은 소원도 버리지 못한 채 하나님을 찾고는 있지만 하나님을 버린 적도 없고 오히려 힘을 다해 하나님을 믿으며 섬기고 있다는 생각이 앞설 때가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향한 질책들이 지금의 나와는 무관한 것으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여전히 자신을 붙들고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자신의 가능성과 의를 붙들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살려 주십시오’라는 고백이 나와질 수 없는 것이고 음녀와 자신도 무관한 것으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남편은 아내를 끌어다 놓고 간음한 행위에 대해 분노하고 질책하며 그에 대한 보응을 선포하는데도 정작 다른 남자와 내통한 여인은 자신은 전혀 그런 적이 없다는 듯, 오히려 남편이 너무 과장하여 과민 반응을 보인다는 것처럼 고개를 들고 있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36절에 보면 “네가 네 누추한 것을 쏟으며 네 정든 자와 행음함으로 벗은 몸을 드러내며”라고 말합니다. 남편 있는 여인이 다른 남자 앞에서 옷을 벗고 벗은 몸을 드러내는 일은 행음 외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그처럼 다른 정든 자 앞에서 벗은 몸을 드러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어떤 행위를 벗은 몸을 드러내는 것으로 말씀하는 것일까요? 이것을 안다면 오늘 우리가 왜 벗은 몸을 드러낸 이스라엘과 동일하게 하나님 앞에서 음녀로 칭함 받을 수밖에 없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7절,8절을 보면 피투성이로 들에 버려져 죽어가는 아이를 하나님이 살리시고 잘 자라게 하였지만 여전히 벌거벗은 알몸으로 있던 것을 하나님의 옷으로 덮어 벌거벗은 것을 가리고 하나님께 속하게 하였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입은 긍휼의 은총이고 오늘 우리가 입은 은총입니다. 우리의 모든 수치를 하나님의 의로 가려주시고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셨다는 복음의 내용인 것입니다.

 

 

그러면 그 옷을 벗어 버리고 벗은 몸을 드러내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하나님이 입혀주신 옷이 자신의 더러움과 수치를 온전히 가리고 있음을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의 옷은 벗어 버리고 자신이 원하고 생각하는 다른 것으로 옷 입어 자신을 가리고 치장하고 드러내고 자랑하고자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갈 3:26,27절에 보면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고 말합니다.

 

 

신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은 자입니다. 그리스도로 옷 입기 전에는 벌거벗은 알몸이었다는 뜻입니다. 물론 나름대로 자신을 가리기 위해 손수 만들어 입은 옷이 있었습니다. 선악과를 먹은 아담과 하와가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입은 것처럼 손수 옷을 만들어 자신의 알몸을 가리고자 하는 것이 인간이지만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 입은 것은 그 어떤 것도 알몸을 가릴 수 없었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신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우리의 수치를 가릴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피 밖에 없음을 말합니다.

 

 

이 내용이 기독교의 믿음으로 정착되어 있다면 기독교는 신자의 의는 그리스도로 옷 입은 것으로 부족함이 없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로 의로운 자가 되었음을 믿는다 하면서도 세상이 의로 여기는 다른 것으로 옷 입고 치장하여 자신의 신자 됨과 의로움과 믿음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이 입혀주신 옷을 벗어 버리고 벗은 몸을 드러내는 것으로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른 남자와 내통하여 간음하는 행위는 당시 이스라엘과 다를 바 없이 지금의 우리에게도 고스란히 적용된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들 이스라엘을 향해서 하나님은 “내가 너의 즐거워하는 정든 자와 사랑하던 모든 자와 미워하던 모든 자를 모으되 사방에서 모아 너를 대적하게 할 것이요 또 네 벗은 몸을 그 앞에 드러내 그들이 그것을 다 보게 할 것이며”(37절)라고 말씀합니다.

 

 

벗은 몸을 그 앞에 드러내신다는 것은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신부라는 관계에서 끊어버리겠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은 본래 벌거벗은 알몸의 상태였지만 하나님이 옷으로 덮어 벌거벗은 것을 가리시고 왕후로 삼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벗은 몸을 드러내신다면 그것은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끊으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입혀주신 옷이 아닌 다른 것으로 옷 입고 수치를 가리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의 신부로 인정될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호 2:3절의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그를 벌거벗겨서 그 나던 날과 같게 할 것이요 그로 광야 같이 되게 하며 마른 땅 같이 되게 하여 목말라 죽게 할 것이며”라는 말씀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계 3:17절을 보면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해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라고 말합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실상은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은 처지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실상을 알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스스로를 부족함이 없는 부자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말한 부자는 재물의 많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의 많음을 뜻합니다.

 

 

이것은 현대 교회의 실상과도 같습니다. 지금의 교회를 보면 수많은 프로그램과 행사와 모임과 활동으로 차고 넘칩니다. 교인들은 그러한 교회 일에 참여하면서 스스로를 믿음이 부요한 자로 여기게 됩니다. 때문에 그리스도를 말하나 애통함이 없는 것이고 ‘살려주십시오’라는 고백과는 거리가 멀어지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가 세상의 무엇으로 옷 입는다 해도 실상은 벌거벗은 자일뿐입니다. 벗은 몸은 그리스도로만 가려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의 은혜만을 생각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만약 다른 것으로 옷 입고자 한다면 그것이 곧 하나님이 입히신 옷을 벗어 던져 버리는 음녀에 해당 될 뿐입니다.

 

 

우리가 기도와 봉사와 전도 등등으로 풍성하다고 해도 그리스도로 옷 입지 않으면 벌거벗은 자일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를 그리스도로 옷 입혔다는 것이 최고의 영광과 자랑과 부요가 되는 것입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48 에스겔 (47강) 신앙과 점 신윤식 2015.09.26 3085
47 에스겔 (46강) 성소를 향한 칼 신윤식 2015.09.19 3085
46 에스겔 (45강) 비유로 말하는 자 신윤식 2015.09.12 2896
45 에스겔 (44강) 하나님의 열심 신윤식 2015.09.05 3127
44 에스겔 (43강) 더럽혀진 안식일 신윤식 2015.08.29 2946
43 에스겔 (42강) 내 이름을 위하여 신윤식 2015.08.22 2805
42 에스겔 (41강) 애가 신윤식 2015.08.15 2884
41 에스겔 (40강) 주의 길의 공평 신윤식 2015.08.08 2893
40 에스겔 (39강) 잘못된 속담 신윤식 2015.08.01 3348
39 에스겔 (38강) 높은 나무를 낮추고 신윤식 2015.07.25 2822
38 에스겔 (37강) 하나님의 수수께끼 신윤식 2015.07.18 2811
37 에스겔 (36강) 영원한 언약 신윤식 2015.07.11 2851
» 에스겔 (35강) 벗은 몸 신윤식 2015.07.04 2920
35 에스겔 (34강) 음녀의 행위 신윤식 2015.06.27 2918
34 에스겔 (33강) 존재의 근본 신윤식 2015.06.20 3059
33 에스겔 (32강) 무가치한 포도나무 신윤식 2015.06.13 2917
32 에스겔 (31강) 재앙과 위로 신윤식 2015.06.06 3051
31 에스겔 (30강) 내 백성으로 삼고 신윤식 2015.05.30 2918
30 에스겔 (29강) 영혼을 사냥하는 자 신윤식 2015.05.23 3066
29 에스겔 (28강) 평강의 묵시 신윤식 2015.05.16 3152
Board Pagination Prev 1 ... 22 23 24 25 26 27 28 29 30 ... 31 Next
/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