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2015.07.11 17:05

(36강) 영원한 언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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겔 16:60-63http://onlycross.net/videos/eze/eze-166063.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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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60.그러나 내가 너의 어렸을 때에 너와 세운 언약을 기억하고 너와 영원한 언약을 세우리라

61.네가 네 형과 아우를 접대할 때에 네 행위를 기억하고 부끄러워할 것이라 내가 그들을 네게 딸로 주려니와 네 언약으로 말미암음이 아니니라

62.내가 네게 내 언약을 세워 내가 여호와인 줄 네가 알게 하리니

63.이는 내가 네 모든 행한 일을 용서한 후에 네가 기억하고 놀라고 부끄러워서 다시는 입을 열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설교>

 

성경은 인간을 죄인으로 규정하고 죄인이라는 사실을 집요하다고 할 정도로 끊임없이 폭로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겉으로만 죄인으로 인정하는 척 하는 위선적 죄인까지 등장합니다. 예수님도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고 하기 때문에 자신을 의인이 아니라 죄인으로 인정하면서 오히려 그것을 자기 의로 여기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음녀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어떻게 받아들이시겠습니까? 우리가 16장에서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음녀’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음녀, 즉 행음하는 여인으로 선언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애굽과 앗수르와 바벨론에게 조공을 바치며 화친을 하여 그들의 힘을 의지하고자 했던 것을 음행하는 것으로 보신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배반하고 다른 힘을 찾아 의지하려고 한 음녀인 이스라엘에게 재앙이 내려 예루살렘에 무너지고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것은 당연한 징벌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겪고 있는 고통을 당연한 것으로 순순히 인정했을까요?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변함없이 하나님을 섬겼다고 생각했고 따라서 고통의 현실을 납득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 겉으로는 죄인이라고 하지만 음녀라는 것에 대해서는 마음속으로 반발이 있을 것입니다. ‘죄인이긴 하지만 음녀까지는 아니다’라는 반발이 있는 것입니다. 죄인과 음녀가 다른 것입니까? 죄인보다 더 악한 것이 음녀입니까? 아닙니다. 죄인이 음녀이며 음녀가 곧 죄인입니다. 죄인은 인간의 행동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규정되어지는 것이고 음녀란 남편을 두고 다른 남자에게로 간 것이기 때문에 역시 남편과의 관계에 의해 음녀로 규정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음녀로 규정되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 밖에 있는 이방인에 대해서는 아예 음녀라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남남의 관계에 있기 때문에 다른 남자에게로 간들 하나님과 상관없는 것입니다. 즉 남편 없는 여자와 같기 때문에 음녀라는 말 자체가 성립이 안되는 것입니다.

 

 

반면에 이스라엘은 남편이 있었습니다. 들에 피투성이로 버려진 것과 같은 이스라엘을 죽음에서 건져주시는 은혜를 베푸시고 벌거벗은 수치를 하나님의 옷으로 가리시고 맹세하고 언약까지 하여 거룩한 하나님께 속하게 하시는 긍휼을 베푸셨습니다. 그리고 신부로 삼아 왕후의 지위까지 누리게 하시는 영화를 주신 것입니다. 이러한 은혜와 영화를 팽개치고 다른 힘 있는 남자를 찾아 자신을 의탁하려고 한 것이야 말로 행음하는 여인, 음녀와 다를 바 없는 악한 행위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받은 은혜와 영화를 업신여겼습니다. 그것이 힘 있는 나라의 보호를 받고자 하는 것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이방 나라가 누리고 있는 것이 더 큰 은혜와 영화로 다가온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심판하시고 그들이 의지하고자 했던 이방 나라 앞에서 이스라엘의 벗은 몸을 드러내게 하시겠다는 것으로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끊으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지난주까지 말씀드린 16장 내용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어떤 존재인가를 계속해서 폭로하십니다. 심지어는 어머니가 헷 사람이고 아버지가 아모리 사람이라고 한 것으로도 부족해서 형은 사마리아고 아우는 소돔이라고 하십니다. 사마리아는 북쪽 이스라엘의 수도였지만 우상을 섬기고 음행한 연고로 이미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했습니다. 소돔 또한 그 악함으로 인해 심판을 받은 땅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들보다 더욱 부패하였다고 합니다(47절).

 

 

51절에서는 사마리아는 이스라엘 죄의 절반도 범하지 않았다고 말씀합니다. 이스라엘에 비해서는 사마리아나 소돔이 더 의롭다고 할 정도로 이스라엘이 악을 행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누가 더 악한가를 저울질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북쪽 이스라엘에 비해서 자신들이 더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던 이스라엘이 사마리아나 소돔에 비해 나을 것이 없으며 오히려 더 악하다고 하심으로 이스라엘의 의를 철저히 부수고자 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소돔과 사마리아보다 더 가증하다고 하는 이스라엘의 죄는 무엇입니까? 그것이 지금까지 말씀드린 음란입니다.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와 영화를 업신여기고 세상의 힘으로 자신을 보호하려고 하고 의지하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는 소돔과 사마리아보다 더 가증한 죄였던 것입니다.

 

 

이제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죄를 이토록 치밀하게 드러내시고 폭로시키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죄인임을 인정하게 하려는 뜻일까요?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예 맞습니다. 우리가 사마리아와 소돔보다 더 악한 죄인입니다”라고 고백만 하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시는 것입니까? 많은 신자가 죄의 고백을 이렇게 오해하기도 합니다. 죄인으로 인정하는 것을 믿음이라고 생각하고 자신의 죄에 대한 깊은 생각이 없이 단지 죄인으로 고백함으로 신앙의 정당성을 갖고자 하는 것입니다.

 

 

죄인임을 알게 되고 고백한다고 해서 의인되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에 필요한 조건이지도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죄인임을 알지 못해도 구원 받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구원은 죄로부터의 용서인데 자신의 죄를 알지 못한 사람이 용서의 은혜를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용서의 은혜를 알게 하고자 죄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용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로 하나님은 만족하시는 것입니까?

 

 

59절을 보면 “나 주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네가 맹세를 멸시하여 언약을 배반하였은즉 내가 네 행한 대로 네게 행하리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맹세를 멸시하고 언약을 배반하였으니 그들의 행한 대로 하나님이 행하시는 것이 당연합니다. 하나님도 이스라엘을 버리시고 재앙과 고통으로 심판하시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처한 현재의 처지는 그들로서는 도무지 항변할 수 없는 당연한 것입니다.

 

 

신자가 죄인임을 안다는 것은 바로 이것을 의미합니다. 죄인이라는 것은 평소에는 잘하다가 작은 실수를 범한 수준이 아니라 하나님은 은혜와 긍휼을 베푸셔서 우리를 영화로운 자가 되게 하셨는데 우리는 늘 하나님이 입히신 은혜와 영화를 업신여기고 우습게 여기며 살아갑니다. 그것은 우리가 의지하고 붙들고자 하는 것이 세상의 힘이라는 것으로 명백히 드러납니다.

 

 

따라서 죄인임을 알게 된 신자는 자신에 대해 할 말이 없어집니다. 하나님 앞에 어떻게 행했는지 자신의 행함을 알기에 하나님이 심판으로 행하셔도 할 말이 없음을 알게 됩니다. 이것이 진심으로 죄인임을 아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 누구보다 더 봉사하고 헌신한다고 해도 자신의 실체는 언약을 배반한 자라는 것을 알기에 자기 행함을 높이지를 못합니다. 오히려 자신의 수치로 인한 부끄러움으로 하나님께 나오게 될 뿐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자신이 어떤 고통에 처해진다고 해도 그것은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그 또한 자신을 회복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입니다.

 

 

이스라엘은 언약을 배반한 자들입니다. 그런데 60절에 보면 “그러나 내가 너의 어렸을 때에 너와 세운 언약을 기억하고 너와 영원한 언약을 세우리라”고 말씀합니다.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 언약을 세웠는데 왜 또 영원한 언약을 세우시겠다고 하시는 것일까요?

 

 

창 17:13,14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 집에서 난 자든지 너희 돈으로 산 자든지 할례를 받아야 하리니 이에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포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

 

 

하나님이 세우신 할례는 잘라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남자의 생식기 전부를 잘라 버린다는 의미로 끝을 자르게 함으로 육적인 방법으로 번성하지 않고 하나님에 의해서만 번성되는 것이 이스라엘임을 할례언약에 남기신 것입니다. 따라서 누구든 육적인 방법, 즉 세상의 힘을 의지하여 자신들이 원하는 모습으로 번성하고자 한다면 그것이 언약을 배반하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언약을 배반하였다고 하신 것입니다.

 

 

언약을 배반하였으니 영원히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끊어버리는 것이 마땅한데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 세운 언약을 기억하고 그들과 영원한 언약을 세우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언약의 의미는 끝까지 책임지시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 세운 언약을 기억하신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부터 그들을 책임지고 계셨음을 뜻합니다. 비록 이스라엘이 언약을 배반하였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들을 책임지신다는 것이 하나님이 세우시는 영원한 언약의 취지입니다.

 

 

창 15:16절에 보면 “네 자손은 사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가득 차지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라고 말씀합니다. 아브라함의 자손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400년간 종으로 살게 하다가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가득하게 되었을 때 가나안,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으로 돌아오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왜 아모리 족속과 다른 여러 족속이 있는 가나안 땅이 죄악이 가득차기를 기다리시는 것입니까?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한 일은 그들의 신을 섬기고 함께 한 것입니다. 즉 이방 나라와 똑같은 죄를 즐겼던 것입니다. 죄로 가득한 가나안 땅에 이스라엘을 들어가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오히려 이방의 죄를 즐기는 것을 드러나게 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죄가 소돔이나 사마리아보다 크다고 하신 것도 같은 취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62절을 보면 “내가 네게 내 언약을 세워 내가 여호와인 줄 네가 알게 하리니”라고 말합니다. 어떤 하나님을 알게 하고자 하시는 것일까요? 63절을 보면 용서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이스라엘의 죄를 낱낱이 폭로하시는 하나님의 일은 용서로 모아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알게 하고 용서의 은혜가 자신을 살게 하고 있음을 깨닫고 감사하는 거룩한 백성으로 모으고자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입니다.

 

 

63절을 보면 “이는 내가 네 모든 행한 일을 용서한 후에 네가 기억하고 놀라고 부끄러워서 다시는 입을 열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아는 신자는 용서에 놀라고 용서로 인해 부끄러워 다시는 입을 열지 못하게 됩니다. 자신이 무엇을 했노라는 자기 일을 말할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했다는 모든 일이 실상은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임을 알았기 때문에 자신이 한 일로 감히 말할 수 없어서 입을 열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영원한 언약은 결코 파하여지지 않습니다. 말 그대로 영원히 계속될 언약입니다. 겔 37:26,27절을 보면 “내가 그들과 화평의 언약을 세워서 영원한 언약이 되게 하고 또 그들을 견고하고 번성하게 하며 내 성소를 그 가운데에 세워서 영원히 이르게 하리니 내 처소가 그들 가운데에 있을 것이며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고 말씀합니다.

 

 

화평의 언약이 곧 영원한 언약입니다. 왜 화평의 언약이라고 할까요? 16장에서 나타난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생각하면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언약을 배반한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끊으셨습니다. 더 이상 신부로 여기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언약을 기억하시고 이스라엘이 책임지십니다. 그것이 화목제물의 희생으로 이스라엘과 화평의 관계를 이루시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붙드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화평의 언약이며 영원한 언약입니다. 화목제물이 그리스도라는 것은 잘 아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처럼 하나님의 영원한 언약에 의해서 끝까지 하나님이 책임지시는 관계로 붙들려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알게 된 것이 신자라면 신자는 하나님 앞에서 입이 있어도 입을 열 수 없는 부끄러운 자에 지나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복음을 아신다고 생각합니까? 죄인 됨을 아신다고 생각합니까? 은혜와 사랑을 아신다고 생각합니까? 진심으로 아신다면 ‘나는 안다’라는 말조차도 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애당초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 나 밖에 모르는 자로 언약을 배반하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우리가 화목제물 되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여김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겐 은혜 아닌 것이 없습니다. 우리의 행한 일을 기억하고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안다면 부끄러워서 다시는 입을 열 수 없습니다. 이것이 죄를 폭로하시는 하나님의 취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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