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2015.08.01 17:40

(39강) 잘못된 속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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겔 18:1-4http://onlycross.net/videos/eze/eze-180104.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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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2.너희가 이스라엘 땅에 관한 속담에 이르기를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그의 아들의 이가 시다고 함은 어찌 됨이냐

3.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너희가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다시는 이 속담을 쓰지 못하게 되리라

4.모든 영혼이 다 내게 속한지라 아버지의 영혼이 내게 속함 같이 그의 아들의 영혼도 내게 속하였나니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으리라

 

<설교>

 

“가계에 흐르는 저주 이렇게 끊으라”는 책을 쓴 사람이 있습니다. 이윤호 목사라는 사람인데 이 사람이 주장하는 것이 ‘가계저주론’입니다. ‘가계저주론’은 조상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가 가계를 통하여 후손에서 계속 유전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저주는 질병과 재앙, 가난, 사고 등을 포함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즉 질병, 재앙, 가난, 사고가 모두 저주로 인한 것이고 그 저주는 조상의 죄로부터 유전된다는 것입니다.

 

 

잠 26:2절에 보면 “까닭 없는 저주는 참새가 떠도는 것과 제비가 날아가는 것 같이 이루어지지 아니하느니라”고 말합니다. 이 구절을 인용하여 모든 저주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다고 하면서 그 이유를 조상의 죄에 두고 가계저주론이라는 것을 마치 성경적인 것처럼 정당화시키는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가계저주론을 연상시키는 속담 하나가 등장합니다.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그의 아들의 이가 시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으면 아버지의 이가 신 것이 당연한데 아들의 이가 시다는 것입니다. 아들을 입장에서는 신 포도를 먹지도 않았는데 이가 신 경우이기 때문에 억울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속담화 되어 이스라엘 안에 퍼졌던 것입니다.

 

 

그리고 3절에서는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너희가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다시는 이 속담을 쓰지 못하게 되리라”고 말씀함으로써 그 속담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런데 가계저주론을 말하는 사람들은 앞뒤 문맥은 무시하고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그의 아들의 이가 시다”는 문구만 인용하여 아들의 저주는 아버지로부터 유전한 것이라는 가계저주론을 말하는 것입니다.

 

 

가계저주론자들은 또한 렘 31:29절인 “그 때에 그들이 말하기를 다시는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아들들의 이가 시다”라는 문구만 인용하여 “야곱과 그의 자손들에게 원망과 분노의 쓴 뿌리를 품게 되었을 때, 그의 자녀들과 야곱의 자손들에게 쓴 뿌리를 품게 되었다"는 결론으로 유도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렘 31:29절의 끝을 보면 분명 “하지 아니하겠고”라고 말합니다, 이 의미가 무엇일까요?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으니 아들들의 이가 시다는 것은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들은 성경의 앞 뒤 문장은 잘라 버리고 자기들 주장에 부합된 문구만 발췌하여 자신들의 주장이 성경적이라는 것을 정당화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내용은 전혀 다릅니다. 이스라엘에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그의 아들의 이가 시다”는 속담이 있지만 그것은 잘못된 것이고 하나님은 아버지의 죄를 자식에게 묻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4절에 보면 “모든 영혼이 다 내게 속한지라 아버지의 영혼이 내게 속함 같이 그의 아들의 영혼도 내게 속하였나니 범죄 하는 그 영혼은 죽으리라”고 말합니다. 자식의 영혼이 아버지께 속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든 아들이든 그 영혼은 하나님께 속했기에 누구든 범죄 하는 영혼은 죽는다는 것이 징벌에 대한 하나님의 원칙임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겔 18:20절에서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지라 아들은 아버지의 죄악을 담당하지 아니할 것이요 아버지는 아들의 죄악을 담당하지 아니하리니 의인의 공의도 자기에게로 돌아가고 악인의 악도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고 말합니다.

 

 

이 구절들을 보면 앞에서 속담을 말씀하신 것은 이스라엘이 그러한 속담을 내세워서 자신들이 저주 받은 이유가 아비의 죄 때문으로 말하지만 하나님은 그 속담대로 일하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에 속담은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저주에 대한 하나님의 원칙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범죄 하는 그 영혼을 심판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아들은 아버지의 죄를 담당하지 않고 아버지는 아들의 죄를 담당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출 20:5-6절에 보면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고 말합니다.

 

 

아비의 죄를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겠다는 것 역시 가계저주론자들에게는 좋은 인용문구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신다고 말씀합니다. 삼사 대는 천대에 비교할 바가 못 됩니다. 천대는 영원을 뜻합니다. 반면에 삼사 대는 빠르게 지날 세월일 뿐입니다. 하지만 과연 천대까지 은혜를 받은 가문이 있던가요?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하나님께 순종한 선한 왕으로 기록되어 있는 히스기야 왕의 후손은 1대와 2대에서 여호와를 배반한 악한 왕들이 나타났습니다. 반면에 악한 왕이라고 할 수 있는 므낫세 왕의 2대인 요시야 왕은 종교개혁을 일으킨 여호와께 순종하는 왕이었습니다. 이것을 보면 삼사 대, 천 대를 문자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참으로 어리석은 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조상의 죄가 후손에게도 영향을 미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많다고 할 수 있습니다. 쉽게 들을 수 있는 말이 ‘부모가 덕을 쌓으면 자식이 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생각이 기독교에도 만연합니다. 부모가 신앙생활 잘하면 자식이 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사주팔자를 푸는 일을 하는 어떤 사람은 업보를 말하면서 “업보는 조상이 지은 것도 공동운명의 인연 때문에 후손이 또한 갚아야 하는 빚으로 그 업보를 갚지 못하면 자녀의 후손 중에서 불구자나 걸인, 기타 불치의 병을 가지고 태어나게 된다. 그래서 태어날 때부터 불구자는 자신의 죄가 아니고 부모와 조상의 업보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된다.”고 말합니다.

 

 

이처럼 조상의 죄로 후손이 벌을 받는다는 것은 당시 이스라엘의 잘못된 생각만이 아니라 사회에 만연되어 있는 사상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불교, 무당, 점술가 등 모든 종교인들이 말하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이런 말로 현재의 삶과 행동을 주의하여 살피고 좀 더 덕을 쌓는 착한 삶이 될 것을 경고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처럼 조상의 죄가 후손에게까지 미친다고 생각하는 것은 후손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재앙이라고 생각되는 일을 겪고 있을 때 그 책임을 조상에게로 전가하는 좋은 빌미가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담이 선악과 먹은 책임을 하와와 하와를 준 하나님에게 전가시키고 하와는 뱀에게 전가시킴으로 자신은 잘못이 없다고 주장하는 악함이 아담 안에서 태어난 모든 인간에게서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고통을 겪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도 속담을 인용하여 자신들이 징벌을 받는 이유가 조상들의 죄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현재의 고통이 부당하다고 불평 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29절에서 “주의 길이 공평하지 아니하다”고 한 그들의 말에서 드러납니다.

 

 

속담을 앞세워 자신들이 겪고 있는 징벌의 부당함을 말하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모든 영혼이 다 내게 속한지라 아버지의 영혼이 내게 속함 같이 그의 아들의 영혼도 내게 속하였나니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으리라”(4절)는 말씀으로 속담이 잘못되었음을 말씀합니다.

 

 

속담을 그대로 인용하자면 아들의 영혼은 아버지께 속한 것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의 죄가 아들에게 전가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아버지도 아들도 모든 영혼은 하나님께 속했음을 말합니다. 때문에 아버지든 아들이든 자신의 범죄에 의해 죽는다는 것이 하나님의 원칙입니다.

 

 

범죄하는 영혼이 죽는다면 죽지 않는 영혼은 있을까요? 없습니다. 범죄하지 않는 영혼은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모든 영혼은 자신의 죄로 말미암아 죽는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인간은 죽음에 갇힌 것이 되고 하나님의 원칙 아래서 도무지 탈출할 방법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겔 14:19,20절을 보면 “가령 내가 그 땅에 전염병을 내려 죽임으로 내 분노를 그 위에 쏟아 사람과 짐승을 거기에서 끊는다 하자 비록 노아, 다니엘, 욥이 거기에 있을지라도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그들도 자녀는 건지지 못하고 자기의 공의로 자기의 생명만 건지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고 말합니다.

 

 

노아, 다니엘, 욥이 하나님이 내리시는 징벌의 현장에 함께 한다고 해도 그들의 공의로 자기 생명만 건진다는 이 말을 14장에서 세 번이나 반복하는 것을 보면 본문의 속담에 담긴 잘못된 생각이 뿌리 깊이 만연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노아, 다니엘, 욥의 공의로 자기의 생명만 건진다는 것은 그 사람들이 자신의 공의로 구원 받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공의는 타인의 생명을 구원할 가치나 권세가 있지 않음을 말씀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노아, 다니엘, 욥만이 아니라 아브라함, 모세, 여호수아, 다윗 등의 모든 인물을 다 모은 공의라 해도 그들의 공의로는 타인의 생명을 건질 수 없습니다. 인간의 공의는 아무리 선하게 보인다 해도 결국 범죄하는 인간의 공의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온전한 공의로 우리에게 오신 것입니다.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는다는 것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법입니다. 롬 3:9절에서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고 말한 것처럼 모든 영혼은 죄 아래 있습니다. 범죄한 영혼인 것입니다.

 

 

   따라서 온 세상은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으며 심판에서 건져낼 인간의 공의는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조상의 죄로 후손이 벌을 받는 것이 없는 것처럼 조상의 공의로 후손이 건짐 받는 것도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에게 예수님이 오셨고 예수님의 오심을 바울은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 3:21-22)고 말한 것입니다.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로 나타나신 예수님에게로 나올 자가 누구일까요? 율법이 의가 될 수 없음을 아는 자라 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율법에 의해서 자신이 범죄 한 자고 ‘범죄한 영혼은 죽는다’는 하나님의 법에 의해 자신이 죽은 자임을 아는 사람만이 죽음의 세계에 유일한 구원의 길로 오신 예수님께 마음이 향해 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속담을 인용하며 자신들의 죄를 알지 못하고 주어진 재앙에 대해 억울함을 토로하며 불평하는 이스라엘은 자신들을 죄인이 아니라 조상의 죄로 인해 희생하는 입장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으로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나아올 수 없는 자들이라는 것이 명백히 드러났을 뿐입니다.

 

 

5-18절을 보면 한 가정의 삼대를 예로 들어 말합니다. 아버지는 하나님의 율례를 따라 살았고 의인이니 반드시 살리라는 판결을 받습니다. 그런데 아들은 아버지와 다르게 악을 행하고 살았습니다. 아버지가 의롭게 살았다고 해서 아들이 아버지를 본받고 의롭게 산다는 보장이 없는 것입니다. 결국 아들은 자신이 행한 가증한 일의 책임을 지고 반드시 죽는다는 선언을 받습니다.

 

 

다음에 손자는 또 아버지가 행한 죄를 보고 두려워하여 그대로 행하지 않고 할아버지처럼 하나님의 율례를 지킴으로 ‘그의 아버지의 죄악으로 죽지 않고 반드시 산다’는 선언을 받습니다. 이것이 죄와 의에 대해 처리하시는 하나님의 원칙인데 이스라엘은 “아들이 어찌 아버지의 죄를 담당하지 아니하겠느냐”라고 불평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답은 변함이 없습니다. ‘사람은 자기 죄로 죽는다’는 것입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재앙을 조상의 죄 탓으로 돌리는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죄로 인해 죽은 자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들이 하나님의 한 의로 오신 예수님을 죽인 것입니다. 끝까지 죄인이 아닌 의인의 자리에서 자신의 존재가치를 지키고자 했던 인간의 욕망에 의해 예수님이 죽으신 것입니다.

 

 

인간은 범죄 한 영혼이라는 선언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어떤 법을 지킨다고 해도 범죄 한 영혼이 의로운 영혼이 되는 길은 없습니다. 여전히 범죄 한 영혼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건강하게 잘 살고 자식이 잘되는 모든 것들이 여러분이 잘해서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이 곧 예수님을 못 박은 마귀의 생각임을 알아야 합니다.

 

 

구원은 십자가로만 가능합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길로 가게 된 사람은 모두가 ‘범죄 한 영혼은 죽으리라’는 선언 아래서 자신의 죽음을 본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죄에서 건지기에 부족함이 없는 예수님의 공의를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전하신 복음입니다. 예수님의 공의는 죽은 자인 우리를 살리는 능력이 됩니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예수님의 공의에 붙들린 인생보다 좋은 것은 없습니다. 죽음의 존재가 산 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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