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2015.09.12 19:31

(45강) 비유로 말하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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겔 20:45-49http://onlycross.net/videos/eze/eze-204549.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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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45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46 인자야 너는 얼굴을 남으로 향하라 남으로 향하여 소리내어 남쪽의 숲을 쳐서 예언하라

47 남쪽의 숲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내가 너의 가운데에 불을 일으켜 모든 푸른 나무와 모든 마른 나무를 없애리니 맹렬한 불꽃이 꺼지지 아니하고 남에서 북까지 모든 얼굴이 그슬릴지라

48 혈기 있는 모든 자는 나 여호와가 그 불을 일으킨 줄을 2)알리니 그것이 꺼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기로 히, 보리니

49 내가 이르되 아하 주 여호와여 그들이 나를 가리켜 말하기를 그는 비유로 말하는 자가 아니냐 하나이다 하니라

 

 

<설교>

 

복음을 듣고 이해했다 해서 복음을 안다고 할 수 없습니다. 복음을 들었을 때 이해가 되고 반발이 되지 않는다고 해서 ‘난 복음을 안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복음은 우리를 이해시키지 않고 이해를 요구하지도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복음을 들음으로 여러분 자신이 지금까지 하나님께 붙들려 끌려 왔고 남은 인생 또한 하나님에 의해 하나님이 의도하신 길로 끌려갈 것임을 마음 깊이 알게 되고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심으로 복음을 아는 신자입니다. 이처럼 복음을 알게 된 신자는 자연히 자신이 의도하는 인생에 뜻을 두지 않게 되고 주어진 모든 삶에서 하나님의 이끄심에 초점을 두고 하나님을 의지하게 됩니다.

 

 

설사 주어진 현실이 고난이라 할지라도 거기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되고 받아들이게 되는 것들 하나하나가 복음을 이해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일하심에 눈을 뜨게 됨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일하심에 눈을 뜨게 되는 것이 은혜이고 은혜를 통해서 ‘하나님은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가에 눈을 뜨게 하신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신자는 하나님으로 인해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되고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됨으로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을 끌고 가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이 목자 되심으로 부족함과 두려움이 없는 힘 있는 삶이 가능해집니다. 복음은 신자를 이러한 삶으로 끌어갑니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복음의 능력은 가장 먼저 우리를 철저히 해체시켜 버립니다. 복음을 안다는 것도 이해한다는 것도 내가 나를 판단하는 위선일 뿐임을 알게 합니다. 그리고 복음을 알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하고 오히려 강한 훼방꾼으로 존재하는 나를 보게 하심으로 다만 하나님의 은혜만 남게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가 성경을 보고 진리의 말씀을 들을수록 말씀이 나 자신을 부인하고 해체시킨다는 사실을 실감해야 합니다. 복음을 이해한다는 자기 이해조차도 교만이었다는 사실에 눈이 열려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 은혜가 있기 전이라면 아마도 하나님의 사랑과 도우심 등 하나님의 속성이라고 하는 모든 것들을 인간 중심에서 자기 유익을 기준으로 해석하고 사용했을 것입니다. 열심히 믿고 기도한 것을 하나님을 섬김 것으로 여기며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있는 신자로 스스로를 바라봤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열심 있는 하나님의 백성을 도우시고 사랑하시고 좋은 길로 인도하신다는 것이 하나님에 대한 보편적인 생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도 이러한 수준에서 하나님을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이스라엘을 다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일을 보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알지 못한 이스라엘이 어떤 잘못됨을 범했는가에 초점을 두기보다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어떻게 다루시며 그들에게 무엇을 남기고자 하시는가에 초점을 두는 것이 좋습니다.

 

 

44절에 보면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너희의 악한 길과 더러운 행위대로 하지 아니하고 내 이름을 위하여 행한 후에야 내가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고 말합니다.

 

 

“내가 여호와인줄 너희가 알리라”는 말씀은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알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이 알고 있는 여호와와 실제 살아계시고 이스라엘을 다스리시는 여호와가 다른 것입니다. 이 같은 내용은 에스겔에서 계속 반복되어 나옵니다. 이스라엘이 알고 있는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기에 결국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섬겼다고 하는 것들은 하나님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자신들을 위해서 자기 마음대로 한 것일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섬겼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섬겼으니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고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일하신다는 생각을 내려놓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현실이었음을 생각해 보면 “내가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리라”는 말씀의 깊은 뜻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자신의 모든 것이 부정되고 하나님의 섬김도 부정되며 아무것도 행한 것이 없고 행할 수도 없는 전적 무능력자로 하나님 앞에 세우고자 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기존의 앎이 앎이 아니었던 것으로 부정되고 새로운 앎이 자리함으로 비로소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고 그분을 감사하고 찬송하는 이스라엘 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담겨 있는 깊은 뜻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45절을 보면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라고 말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은 얼굴을 남으로 향하여 소리 내어 남쪽의 숲을 쳐서 예언하라는 것입니다. 예언의 내용은 “남쪽의 숲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내가 너의 가운데에 불을 일으켜 모든 푸른 나무와 모든 마른 나무를 없애리니 맹렬한 불꽃이 꺼지지 아니하고 남에서 북까지 모든 얼굴이 그슬릴지라”(47절)입니다.

 

 

남쪽의 숲은 유다를 가리킵니다. 결국 유다를 불태우고 없애버리겠다는 의미의 말씀인데 하나님의 불은 꺼지지 않고 계속 타오를 것이고 그 불로 인해 혈기 있는 모든 자, 즉 육체를 가진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이 그 불을 지르셨음을 알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같은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질 때마다 항상 문제가 되는 것은 말씀을 들은 인간의 반응입니다. 유다가 이 말을 들었다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그것을 49절에서 “내가 이르되 아하 주 여호와여 그들이 나를 가리켜 말하기를 그는 비유로 말하는 자가 아니냐 하나이다 하니라”고 말합니다.

 

 

‘아하’라고 말하는 것은 탄식의 소리인데 유다 사람들이 선지자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거부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에스겔을 비유로 말하는 자로 치부하는 것입니다. 비유로 말하기 때문에 알아들을 수가 없다는 냉소적인 의미의 말입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과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왜 심판을 받아야 하는지를 여전히 알지 못합니다. 자신들을 심판하는 하나님은 없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입니다. 다시 말해서 에스겔이 말하는 그런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인정하면 하나님이 되고 인정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안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은 인간에 의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 자체가 이미 하나님 되심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해를 요구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세상에 나타내시고, 하나님의 일하심으로 인해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게 된 그들을 ‘나의 백성’으로 여기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게 되었다면 기존에 안다고 여겼던 하나님에 대한 모든 내용은 부정당하게 됩니다.

 

 

컴퓨터에 저장된 내용을 삭제하듯 머리에 저장된 모든 내용이 삭제되고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백지의 상태에서 말씀을 통해 여호와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게 되고 모든 삶이 그 분과의 관계에서 이해되고 해석되어 지는 것이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아가는 과정에서 나타나고 경험되는 신자의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결국 하나님의 은혜만 남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내가 너의 가운데에 불을 일으켜 모든 푸른 나무와 모든 마른 나무를 없애리니 맹렬한 불꽃이 꺼지지 아니하고 남에서 북까지 모든 얼굴이 그슬릴지라”는 말씀 또한 심판의 옷을 입고 다가오는 진노의 하나님을 보여주는 듯 하지만 이 말씀을 전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본래의 마음에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여호와가 누구신가를 알게 하심으로 자신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이 하나님이 아니라는 사실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제대로 알고 이해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이해했다고 해서 하나님을 안 것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신자가 하나님을 알게 되면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과 긍휼과 사랑만을 좇게 됩니다. 그것이 당연한 것 아닐까요?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자신을 알았다는 뜻이 됩니다. 자기 존재에 대해서는 눈을 뜨지 못하고 하나님에 대해서만 눈을 뜨는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자기 존재는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알았다고 하거나 복음을 이해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위선일 뿐입니다.

 

 

하나님을 알게 되면 내가 사랑하던 것들을 내려놓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과 그 말씀만 좇게 됩니다. 생명이 하나님께 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이 우리의 욕망을 충족시켜준다거나 눈물이 흐를 정도로 감동이 된다거나 하는 것은 없습니다. 말씀은 그렇게 인간의 감성을 자극하는 내용으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조롱과 비웃음을 살 수밖에 없는 내용으로 다가온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다가갔던 사람들 중에 환경 받은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이사야도 선지자도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 배척을 받고 오히려 그들이 거짓선지자 취급을 받았고 비웃음을 샀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롯이 자기 사위가 될 사람들에게 “여호와께서 이 성을 멸하실 터이니 너희는 일어나 이곳에서 떠나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사위들은 장인인 롯의 말을 농담으로 여겼을 뿐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농담으로 여기고 비웃고 밀쳐내고 분노로 반응했던 사람들이 우리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지금 설교를 이해한다고 해서 복음을 아는 것처럼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되면 ‘나는 복음을 안다’는 자기 인정만 남게 될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복음을 이해했다고 해서 복음을 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라는 말을 하면 기분 나빠할 것입니다. 결국 복음을 이해하나 이해하지 못하나 자신을 중심에 두고 있는 것은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를 비유로 말하는 자로 치부하는 이스라엘이나 오늘 우리가 다르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주지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실 설교를 하면서 ‘과연 여러분이 이 말을 어느 정도 알아들을까?’하는 생각이 항상 있습니다. 그래서 때때로 여러분이 알아듣게 하는 것에 중점을 두고 설교를 준비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늘 제 속에서 내려지는 결론은 ‘내가 알아듣게 하는 것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이만하면 알아듣겠지’라고 설교 했는데 알아듣지 못할 수가 있고 ‘이렇게 설교해서 알아듣겠나’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알아듣는 경우가 많습니다. 때문에 저의 생각은 말씀을 알아듣게 하는 것 또한 저의 일이 아니라는 것으로 향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남쪽의 숲에 불을 일으켜 모든 푸른 나무와 모든 마른 나무를 없애시고 그 불꽃이 꺼지지 않는다면 유다는 그만큼 하나님의 심판의 불에서 헤어날 수 없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말을 단지 비유로 치부하여 에스겔의 말을 이해할 수 없는 모호한 비유로 치부하여 거부하고자 하는 것이 곧 자신에 대해 눈을 뜨지 못한 인간의 반응인 것입니다.

 

 

만약 자신에 대해 눈을 뜨고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면 자신이 바로 하나님의 심판에 불로 인해 태워져야 할 존재임을 받아들이고 그 같은 불의 심판에서 건져주실 분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남겨 놓으시고자 하신 은혜입니다. 이 은혜가 남겨지고 은혜로 주장되는 신자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자신의 육신을 충족시켜주기 위한 것보다 자신을 부인하게 하고 해체시켜 아무것도 없게 하시고 오직 하나님이 일하신 은혜만 남게 하셔서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만 이야기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아는 신자로 만들어 가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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