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016.07.23 17:38

(109강) 야곱과 요셉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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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46:28-34http://onlycross.net/videos/gen/gen-462834.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28.야곱이 유다를 요셉에게 미리 보내어 자기를 고센으로 인도하게 하고 다 고센 땅에 이르니

29.요셉이 그의 수레를 갖추고 고센으로 올라가서 그의 아버지 이스라엘을 맞으며 그에게 보이고 그의 목을 어긋맞춰 안고 얼마 동안 울매

30.이스라엘이 요셉에게 이르되 네가 지금까지 살아 있고 내가 네 얼굴을 보았으니 지금 죽어도 족하도다

31.요셉이 그의 형들과 아버지의 가족에게 이르되 내가 올라가서 바로에게 아뢰어 이르기를 가나안 땅에 있던 내 형들과 내 아버지의 가족이 내게로 왔는데

32.그들은 목자들이라 목축하는 사람들이므로 그들의 양과 소와 모든 소유를 이끌고 왔나이다 하리니

33.바로가 당신들을 불러서 너희의 직업이 무엇이냐 묻거든

34.당신들은 이르기를 주의 종들은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목축하는 자들이온데 우리와 우리 선조가 다 그러하니이다 하소서 애굽 사람은 다 목축을 가증히 여기나니 당신들이 고센 땅에 살게 되리이다

 

 

<설교>

드디어 애굽의 고센 땅에서 야곱과 요셉의 만남이 이루어집니다. 요셉이 죽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처럼 상심했던 야곱에게 요셉과의 만남이 얼마나 감격스러웠을지는 능히 짐작하고도 남습니다.

 

 

야곱의 이러한 심정은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이르되 네가 지금까지 살아 있고 내가 네 얼굴을 보았으니 지금 죽어도 족하도다”(30절)는 말에서 잘 드러납니다. 지금 죽는다 해도 아무 여한이 없다는 것입니다. 죽은 줄 알았던 요셉을 만난 일이 야곱에게는 아무 여한이 없는 기쁨과 만족이 된 것입니다.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었으니 요셉으로 인해 애굽에서 편안한 삶을 기대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요셉을 만남 야곱에게 그것은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요셉이 총리가 되었다는 것보다는 요셉이 살아있다는 것, 요셉의 얼굴을 봤다는 것만으로 족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약 요셉을 만난 야곱이 총리가 된 요셉의 힘을 이용해서 평안한 삶을 기대한다면 그것은 요셉을 만난 기쁨보다는 요셉으로 인해 누릴 삶에 더 관심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여러분은 야곱이 요셉과의 만남에서 그런 모습을 보였다면 어떻게 반응할 것 같습니까? 아마 야곱을 비난할 것입니다.

 

 

평소 자식과 헤어져 살면서 관심도 두지 않다가 자식이 사고로 인해 목숨을 잃게 되고 보상금이 나오게 되었을 때 자기 존재를 드러내면서 아버지, 또는 어머니라는 권리만으로 보상금을 가져가는 일들이 있습니다. 이런 일에 대해 사람들은 비난을 합니다. 자식이 목숨을 잃었다는 것보다 돈에 대한 관심이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야곱과 요셉의 만남에는 단순히 부모와 자식의 극적인 만남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의미가 담겨 있음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요셉을 애굽으로 보내신 분은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요셉에 의해서 야곱 가족이 애굽으로 이주하게 되고 요셉을 만나게 됩니다. 이처럼 요셉을 애굽으로 보내시고 야곱의 가족을 애굽으로 이주하게 하신 것은 야곱 가문의 생명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일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 방식은 누구도 예상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납득할 수 있는 구원 방식은 구원될 조건을 인간에게서 찾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실천과 행함을 보고 구원할 자를 구원하시는 것이 모든 인간이 받아들이고 납득할 수 있는 방식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구원은 방식은 인간의 조건을 보지 않습니다. 인간에게 그 어떤 요구 조건이 없습니다. 이처럼 인간의 조건을 보지 않으신다는 것은 누구도 하나님의 구원 조건을 충족시킬 사람이 없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인간의 조건을 보지 않는 하나님의 구원 방식은 은혜와 자비입니다. 자기 백성에게 무조건적으로 베풀어지는 은혜와 자비가 구원될 수 없는 자를 구원에 있게 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 방식을 알게 된 사람에게서는 어떤 반응이 있을까요?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하심을 높이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졌음을 믿으며 하나님의 행하심을 높이고 감사하는 것이 구원 받은 자의 본분인 것입니다.

 

 

요셉이 형들의 미움과 시기로 인해 애굽으로 팔리고, 야곱에게는 죽은 자식으로 남게 되는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그리고 요셉을 만나게 하심으로 죽은 아들을 살리시고, 그 아들이 기쁨이 돠는 생명의 사건을 경험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험은 아브라함에게도 있습니다.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말씀에 순종하여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는 아브라함에게 이삭은 이미 죽은 자식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이삭 대신 숫양을 제물로 준비하심으로 죽은 것과 다를 바 없는 이삭이 살아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죽은 아들이 살아난 아브라함의 기쁨은 숫양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린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고 한 것으로 증거 됩니다.

 

 

이것을 보면 하나님은 이삭과 요셉에게 죽은 자를 살리신 하나님의 은혜를 담아 그 은혜를 알게 하시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에게 죽은 자를 살리신 하나님의 은혜를 전달하시고 알게 하신 분은 그리스도가 됩니다. 죽음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게 하심으로 죽은 자인 우리를 살리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가 그리스도를 만났다면 그 만남에는 다만 하나님의 구원방식인 무조건 적인 은혜로 인한 기쁨과 감사만 있게 되는 것이 당연합니다. 생명이라고 하는 기적을 가지고 우리를 만나신 예수님 앞에서 다른 요구 사항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만약 다른 요구사항이 있다면 그것은 생명이 되시는 예수님의 만남으로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이용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고자 하는 것이기에 믿음이 아닌 것입니다.

 

 

신자가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죽은 줄 알았던 요셉을 만난 야곱에게는 요셉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고 기쁨입니다. 야곱에게는 요셉이 죽어도 족하다고 할 만큼 기쁨으로 충만한 은혜의 선물인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것을 기대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을 하나님이 만나게 하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과의 만남에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신자는 예수님을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한 수단이나 방법으로 바라보지 않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만남이 곧 자신에게 생명이 됨을 알기에 ‘죽어도 족하다’는 고백이 있을 뿐입니다. 생명이신 예수님을 만난 것으로 여한이 없는 것이고 아쉬울 것이 없게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에 집착하지 않으며 나그네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33,34절에 보면 “바로가 당신들을 불러서 너희의 직업이 무엇이냐 묻거든 당신들은 이르기를 주의 종들은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목축하는 자들이온데 우리와 우리 선조가 다 그러하니이다 하소서 애굽 사람은 다 목축을 가증히 여기나니 당신들이 고센 땅에 살게 되리이다”고 말합니다.

 

 

바로는 요셉의 가족을 애굽의 좋은 땅에서 살게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요셉은 고센 땅을 가족이 거할 땅으로 결정합니다. 그런데 28절에 보면 “야곱이 유다를 요셉에게 미리 보내어 자기를 고센으로 인도하게 하고 다 고센 땅에 이르니”라고 말합니다.

 

 

요셉이 고센 땅을 말하기 전에 야곱이 이미 고센 땅으로 가고자 한 것입니다. 고센 땅은 좋고 나쁨을 떠나서 애굽의 변두리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만약 야곱이 예전처럼 세상의 복에 집착 했다면 고센 땅을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왕이면 애굽의 중심지에서 애굽의 풍요와 문화를 누리는 것을 복으로 여겼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야곱의 새로움입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지금의 기독교인들의 문제는 예수님을 알고 믿는다고 하면서도 예수님의 생각과 전혀 일치 되지 않은 다른 생각으로 살아가는 것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생각에 자신의 생각이 일치되어야 한다는 것보다 자신의 생각과 소원에 예수님이 함께 해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생명으로 오신 예수님으로 족한 충만의 세계를 놓치는 것입니다.

 

 

다윗이 밧세바의 남편 우리아를 죽이고도 자신의 죄를 의식하지 못한 것처럼 우리도 죄에 대해 의식하지 못하고 삽니다. 이런 우리를 말씀 앞으로 끌어 당겨서 죄를 보게 하시고 영원한 죽음에 갇힌 우리의 본질을 보게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생명이 심을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을 요셉과 만나게 하셔서 죽어도 족할 정도의 기쁨을 주신 것처럼, 오늘 우리에게 예수님을 만나게 하심으로 죽어도 족한 기쁨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만난 신자는 오늘 죽어도 기쁨이 되고 감사가 되는 복된 날을 살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과의 만님이 기쁨이 되는 신자에게 다른 요구사항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만 있을 뿐이고 그 은혜를 잃지 않는 기쁨과 감사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자 하는 소원으로 기도하게 될 뿐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받을 것은 없음을 아시고 예수님과의 만남에서 삶의 기쁨과 충만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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