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016.07.30 18:06

(110강) 야곱과 바로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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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47:7-12http://onlycross.net/videos/gen/gen-470712.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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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7.요셉이 자기 아버지 야곱을 인도하여 바로 앞에 서게 하니 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하매

8.바로가 야곱에게 묻되 네 나이가 얼마냐

9.야곱이 바로에게 아뢰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하고

10.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하고 그 앞에서 나오니라

11.요셉이 바로의 명령대로 그의 아버지와 그의 형들에게 거주할 곳을 주되 애굽의 좋은 땅 라암셋을 그들에게 주어 소유로 삼게 하고

12.또 그의 아버지와 그의 형들과 그의 아버지의 온 집에 그 식구를 따라 먹을 것을 주어 봉양하였더라

 

 

<설교>

47장은 요셉이 바로에게 자기 가족에 대해 소개하고 야곱을 바로에게 인도하여 야곱과 바로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내용으로 시작합니다. 야곱과 바로의 만남은 어떤 시각으로 보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집니다.

 

 

세상의 시각에서 보면 왕과 한 가정을 다스리는 가장의 만남이 전부입니다. 왕이라는 권력자와 왕에 비해 볼품없는 가장이라는 존재의 만남이고, 생존을 위해 바로의 도움을 받아야 할 처지에 있는 약자와 강자의 만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야곱이 바로에게 고개를 숙여야 할 위치에 있는 만남인 것입니다.

 

 

그런데 7절을 보면 “요셉이 자기 아버지 야곱을 인도하여 바로 앞에 서게 하니 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하매”라고 말합니다.

 

 

세상의 시각에서 보자면 야곱은 바로를 축복해줄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야곱은 바로에 비해 가진 것이 없고 낮은 자리에 있습니다. 바로가 복 받은 자고 야곱은 복을 받아야 할 자라는 것이 세상의 시각입니다. 야곱이 그것을 생각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럼에도 바로를 축복하는 것은 복에 대한 인식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만약 예전의 야곱이었다면 바로를 축복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바로를 자신보다 더 높은 자, 성공자, 복 받은 자로 여겼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감히 바로를 축복할 생각도 하지 못했을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면 지금 바로를 축복한다는 것은 뭘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복에 대한 인식이 새로워졌음을 뜻합니다. 복이 무엇인가를 알게 된 시각으로 바로를 만났을 때 세상의 소유와 권력을 초월하여 바로를 복을 받아야 할 자로 보게 된 것입니다. 그 말은 인간에게 자랑이 되고 힘이 되는 세상의 것에 가치를 두지 않게 되었음을 뜻합니다.

 

 

야곱이 살았던 예전의 세계는 지금 바로가 살아가는 세계와 다르지 않습니다. 그 세계는 자신의 욕망이 성취되는 것이 자랑이 되고 힘이 되는 가치관에 붙들려 있습니다. 그래서 야곱이 바로에게 고개를 숙이는 것이 질서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이 바로를 축복함으로써 전혀 다른 질서의 세계를 보여줍니다. 인간의 욕망의 성취가 묵살되고 하나님을 신앙하는 것이 새로운 가치가 되어 다스림 받는 다른 질서의 세계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세계이며 이 세계에서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 복으로 간주되기에 야곱이 바로를 축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세상은 하나님을 아는 자의 세계가 아니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오히려 멸시하는 자들의 세계입니다. 이 세계는 또 한편으로는 믿음의 흉내를 내면서 믿음을 빙자하여 자기 욕망을 성취하는 길로 가는 자들의 세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는 당연히 하나님을 알고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자랑이 되지 않습니다. 힘이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세상을 신자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요?

 

 

야곱과 바로의 만남을 하나님을 아는 신자와 하나님을 알지 못한 불신자의 만남이라는 시각으로 바라본다면 이러한 만남은 여러분도 매일 경험하는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스스로에게 물어볼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나는 하나님을 아는 신자로서 하나님을 알지 못한 사람과의 만남에서 무엇을 증거하는가?’입니다.

 

 

만약 여러분보다 더 강하고 힘 있는 자와의 관계에서 그 힘에 굴복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한 세상의 질서에 순응하는 것 밖에 되지 않습니다. 야곱처럼 바로를 축복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에게 고개를 숙이고 그의 덕을 보고자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야곱이 바로의 세상에 굴복했다면 바로의 힘을 의지했을 것입니다. 바로의 힘을 부러워하고 그것을 복으로 여겼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로를 축복하지도 못했을 것이 당연합니다. 하지만 야곱은 바로를 축복함으로써 예전에 자신이 성취하고자 했던 세상이 참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고 하늘의 복을 누리는 자로 살아가는 것이야 말로 복된 세상임을 보여준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에 존재하는 신자의 역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지금의 교회는 그 역할을 하지 못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알지 못한 세상의 질서에 순응한 채 세상처럼 재물과 성공을 복으로 간주할 뿐입니다. 교회에서도 성공한 자가 복 받은 자로 인정되고 마치 그들이 성공하지 못한 자를 축복할 위치에 있는 것처럼 간증이라는 명목으로 자신의 성공을 과시할 뿐입니다.

 

 

교회가 부흥에 초점을 두고 소위 세상에서 성공했다고 하는 사람들이 교인으로 등록하는 것을 기뻐하면서 그들을 교회의 기둥으로 높이는 모습들 하나하나가 도무지 하나님을 아는 신앙공동체라고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복음을 알고 그리스도의 은혜로 기뻐하는 하나님의 사람을 만나고 그들이 말씀을 들으며 기뻐하는 것을 봄으로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재력이 있고 권력이 있는 자들이 내 교회 교인되는 것으로 기뻐하고 그것을 힘으로 여기는 것이 바로의 세계입니다.

 

 

신자는 이러한 바로의 세계를 살아가면서 하나님을 알게 되고 예수님을 만나게 된 것에 모든 가치를 두어야 합니다. 그것이 세상의 모든 것을 이기는 복이 되는 것임을 믿으며 그 복이 기쁨이 되고 감사가 되는 세계를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나의 세게는 너희의 세계와 다르다’는 것을 당당하게 보일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세상을 이기는 것입니다.

 

 

주변을 보면 교회가 많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출입합니다. 그런데 교회를 출입하는 많은 사람들 중에 과연 몇 사람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알고자 하고 예수님이 가신 그 길로 가고 싶은 열망으로 하나님을 찾을 까요?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세상으로부터 인정 받고 세상을 향해 자신을 자랑하고 과시할 수 있는 것에 목적을 두고 하나님을 찾는 것이 대부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표면적으로는 신앙인이지만 실상은 세상에 속한 자로 세상이 가는 길을 함께 걸어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예수님을 아는 신자라면 이러한 세상에 머물게 하신 하나님의 뜻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적어도 세상이 추구하는 것과 동일한 것을 추구하는 것은 신자 됨이 아님을 깨달아야 하고, 세상이 추구하지 않는 하늘의 것을 추구하고 소망하는 것으로 ‘나는 너희와 다른 길로 간다’는 것을 나타낼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세상에 지지 않는 것입니다.

 

 

6절을 보면 “애굽 땅이 네 앞에 있으니 땅의 좋은 곳에 네 아버지와 네 형들이 거주하게 하되 그들이 고센 땅에 거주하고 그들 중에 능력 있는 자가 있거든 그들로 내 가축을 관리하게 하라”고 말합니다.

 

 

바로가 야곱에게 큰 호의를 베푸는 내용입니다. 바로가 야곱에게 이러한 호의를 베푸는 것이 요셉 때문이긴 하지만 어쨌든 살던 곳을 떠나 남의 땅에서 기거해야 할 야곱으로서는 고마운 일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도 야곱은 바로의 호의에 대해 반응하지 않고 오히려 바로를 축복한 것입니다.

 

 

야곱이 바로를 축복하자 바로는 야곱의 나이를 묻고 야곱은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9절)라고 답합니다.

 

 

야곱은 자기 인생을 험악한 세월로 표현합니다. 험악한 세월은 단지 고생했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에 의해 산 인생임을 의미합니다. 인생이 우리의 뜻대로 된다면 그것처럼 평안한 인생은 없을 것입니다. 인생이 힘든 것은 내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대로만 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험악한 인생입니다.

 

 

그런데 험악한 인생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하고 세상을 제대로 보게 한다면 험악한 인생은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인생을 바라보는 야곱의 새로운 시각이었기 때문에 바로의 존재위치나 힘을 초월하여 축복하게 된 것입니다. 모든 것을 가졌다 해도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면 그 인생은 저주로 끝난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아십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을 알게 된 것이 높음이 되는 새로운 세계를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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