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016.08.13 17:51

(112강) 요셉과 애굽 토지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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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47:20-26http://onlycross.net/videos/gen/gen-472026.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20.그러므로 요셉이 애굽의 모든 토지를 다 사서 바로에게 바치니 애굽의 모든 사람들이 기근에 시달려 각기 토지를 팔았음이라 땅이 바로의 소유가 되니라

21.요셉이 애굽 땅 이 끝에서 저 끝까지의 백성을 성읍들에 옮겼으나

22.제사장들의 토지는 사지 아니하였으니 제사장들은 바로에게서 녹을 받음이라 바로가 주는 녹을 먹으므로 그들이 토지를 팔지 않음이었더라

23.요셉이 백성에게 이르되 오늘 내가 바로를 위하여 너희 몸과 너희 토지를 샀노라 여기 종자가 있으니 너희는 그 땅에 뿌리라

24.추수의 오분의 일을 바로에게 상납하고 오분의 사는 너희가 가져서 토지의 종자로도 삼고 너희의 양식으로도 삼고 너희 가족과 어린 아이의 양식으로도 삼으라

25.그들이 이르되 주께서 우리를 살리셨사오니 우리가 주께 은혜를 입고 바로의 종이 되겠나이다

26.요셉이 애굽 토지법을 세우매 그 오분의 일이 바로에게 상납되나 제사장의 토지는 바로의 소유가 되지 아니하여 오늘날까지 이르니라

 

 

<설교>

우리는 세상을 살아오면서 자연히 세상 질서와 가치관에 순응하게 됩니다. 세상에서 교육 받고 경험 하면서 ‘이것이 옳은 것이다’라는 결론이 구축되는 것입니다. 가령 학교에서 모범적인 학생은 공부 잘하고, 온순하고, 선생님 지시 사항 잘 따르는 것이라는 기준을 갖고 있는 것이 한 예입니다. 그러한 기준에 의해서 일단 공부를 못하면 모범 학생에서 제외됩니다.

 

 

이러한 시각은 교회에서도 여실히 드러납니다. 믿음 좋은 신자를 기도, 성경, 헌금, 봉사 등등 몇몇 행동으로 규정하는 것입니다. ‘믿음 좋은 것은 이런 것이다’라는 기준이 구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기준 역시 교회에서의 교육이나 인간의 내면에 자리하고 있는 종교성에 의해 세워진 것입니다. 이러한 기준에 의해 주일 예배에 자주 빠지고, 십일조 하지 않고 기도 생활도 하지 않으면 믿음 좋은 신자에서 제외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우리의 기준과 가치관으로 성경을 보게 되면 성경은 이해할 수 없는 내용으로만 다가오게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은 성경을 이해할 수 없다면 내용이 어려워서라기보다는 여러분의 기준과 가치관으로 성경을 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본문의 내용도 그 한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요셉을 하나님을 아는 신앙인으로 생각합니다. 형들에 의해 애굽에 팔려서 많은 고생을 하게 된 것을 하나님이 보내신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도 요셉은 하나님의 일하심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자연히 요셉에게 기대하게 되는 것은 신앙적인 행동입니다.

 

 

그런데 요셉이 기근에 처한 백성들에게 취하는 행동을 보면 신앙과는 거리가 먼 것처럼 보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요셉은 돈이 없는 백성들에게서 가축을 가져 오라 하고, 가축도 없게 되자 몸과 토지까지 받습니다. 무상공급이라는 좋은 방법도 있는데 마치 백성들의 몸까지 토색하는 것 같은 방법을 취하는 것입니다.

 

 

20절에 보면 애굽의 토지를 다 사서 바로에게 바침으로 땅이 바로의 소유가 됩니다. 그리고 23절에서 “요셉이 백성에게 이르되 오늘 내가 바로를 위하여 너희 몸과 너희 토지를 샀노라 여기 종자가 있으니 너희는 그 땅에 뿌리라”고 말합니다.

 

 

종자를 땅에 뿌리라고 하는 것을 보면 기근이 끝난 시점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24절에서 “추수의 오분의 일을 바로에게 상납하고 오분의 사는 너희가 가져서 토지의 종자로도 삼고 너희의 양식으로도 삼고 너희 가족과 어린 아이의 양식으로도 삼으라”고 말합니다.

 

 

요셉이 세운 애굽의 토지법은 추수한 오분의 일은 바로에게 상납하고 오분의 사는 백성이 가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추수의 오분의 일을 바로에게 바치라는 것은 사실 새롭게 세워진 법은 아닙니다.

 

 

창 41:34-35절을 보면 “바로께서는 또 이같이 행하사 나라 안에 감독관들을 두어 그 일곱 해 풍년에 애굽 땅의 오분의 일을 거두되 그들로 장차 올 풍년의 모든 곡물을 거두고 그 곡물을 바로의 손에 돌려 양식을 위하여 각 성읍에 쌓아 두게 하소서”라고 말한 것을 보면 요셉은 바로의 꿈을 해석하면서 기근을 대비하기 위해 일곱 해 풍년에 애굽 땅의 오분의 일을 거둘 것을 말합니다. 이것을 기근을 대비해서 세웠던 법을 기근이 끝나고 땅에 종자를 뿌려 추수를 하게 되었을 때 실행해야 할 토지법을 세운 것입니다.

 

 

요셉의 말을 들은 백성들은 “주께서 우리를 살리셨사오니 우리가 주께 은혜를 입고 바로의 종이 되겠나이다”(25절)라고 말합니다. 요셉이 세운 토지법에 대해 불평, 불만이 없이 요셉 당신이 우리를 살렸으니 바로의 종이 되겠다는 것입니다.

 

 

사실 백성들은 정당하게 값을 치르고 곡식을 샀습니다. 심지어 토지도 팔고 자신들은 바로의 종이 되기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요셉이 팔았던 곡식도 엄밀히 말하면 백성들이 오분의 일씩 바쳤던 것입니다. 백성들이 바친 것을 요셉은 돈을 받고 판매한 결과가 됩니다. 그런데도 불만이 없이 주께서 우리를 살렸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 요셉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자신들은 기근을 견디지 못하고 죽었을 것을 알았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렇게 보면 요셉이 토지법을 세워서 추수의 오분의 일을 상납하게 하는 것은 땅에 종자를 뿌려 추수하게 된 것은 땅의 주인이 된 바로 덕분이라는 것을 잊지 말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런 내용을 보면 마치 요셉이 애굽 백성들에게 뭔가를 가르치고자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애굽에 거주하고 야곱 가문을 위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언약 안에 있는 야곱 가문을 향해 있습니다. 하나님은 야곱 가문의 생존을 돕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백성으로 존재하게 하고자 합니다. 그것을 위해 요셉을 애굽으로 먼저 보내신 것입니다.

 

 

애굽 백성들은 자신들이 요셉이 아니었다면 기근으로 인해 죽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기근이 끝나고 종자를 뿌리게 되고 추수를 하게 된 것 모두가 자신들과는 무관하게 요셉 덕분임을 알았습니다. 이것은 애굽 백성들의 사람됨을 높이고자 한 것이라기보다는 애굽에 있는 야곱 가문이 애굽 백성들을 보면서 자신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존재한다는 것을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함인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시각에서 본분을 본다면 예수님이 아니었다면 우리 모두 죽은 자라는 것을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게서 오분의 일을 가져가든 오분의 이를 가져가든 개의치 않고 ‘주께서 나를 살리셨으니’라는 고백으로 예수님 앞에 나오게 되지 않을까요? 이것이 ‘주의 은혜로 산다’는 고백이 그 심령에 머물러 있는 신자에게서만 가능한 고백일 것입니다.

 

 

그런데 애굽의 모든 땅이 바로의 소유가 되는데 유독 바로의 소유가 되지 않은 땅이 있습니다. 바로 제사장의 땅입니다.

 

 

22절을 보면 “제사장들의 토지는 사지 아니하였으니 제사장들은 바로에게서 녹을 받음이라 바로가 주는 녹을 먹으므로 그들이 토지를 팔지 않음이었더라”고 말하고 26절에서도 “요셉이 애굽 토지법을 세우매 그 오분의 일이 바로에게 상납되나 제사장의 토지는 바로의 소유가 되지 아니하여 오늘날까지 이르니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언급되는 제사장은 애굽의 제사장을 말합니다. 이들은 바로에게서 녹을 받았습니다. 제사장으로서 바로에게 혜택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로 인해 기근에서도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토지를 팔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바로가 그들의 생존을 책임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로에게 녹을 받았다는 것을 그런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런 내용도 표면적으로 보면 야곱 가문과 무관한 일입니다. 제사장도 야곱과 관계가 없고 무엇보다 우상을 섬기는 애굽 제사장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백성들의 경우처럼 하나님은 야곱 가문을 애굽으로 가게 하시고, 애굽 안에서 애굽에게 일하시는 하나님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르치고자 하신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출 19:6절을 보면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고 말씀합니다.

 

 

제사장은 백성을 대신해서 신을 만나는 사람입니다. 그들의 생존은 하나님이 책임지고 계셨습니다. 백성들에게 십분의 일을 바치라는 규례를 세운 것이 그것입니다. 백성들이 바치는 십분의 일이 제사장들에게는 생존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 말은 제사장은 자기 생존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은혜가 흘러나오는가를 백성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신자는 생존을 위해 존재하지 않습니다. 물론 우리가 일을 해야 먹고 살아가지만 생존이 삶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혜택을 받은 자로서 생존보다 중요한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를 살리시고 존재하게 하는 은혜가 그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생존에 붙들린 자가 아니라 은혜에 붙들린 자여야 합니다. 하나님을 자신의 현실로 바라보는 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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