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016.08.27 19:53

(114강) 에브라임과 므낫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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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48:1-7http://onlycross.net/videos/gen/gen-480107.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이 일 후에 어떤 사람이 요셉에게 말하기를 네 아버지가 병들었다 하므로 그가 곧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과 함께 이르니

2.어떤 사람이 야곱에게 말하되 네 아들 요셉이 네게 왔다 하매 이스라엘이 힘을 내어 침상에 앉아

3.요셉에게 이르되 이전에 가나안 땅 루스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사 복을 주시며

4.내게 이르시되 내가 너로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여 네게서 많은 백성이 나게 하고 내가 이 땅을 네 후손에게 주어 영원한 소유가 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5.내가 애굽으로 와서 네게 이르기 전에 애굽에서 네가 낳은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내 것이라 르우벤과 시므온처럼 내 것이 될 것이요

6.이들 후의 네 소생은 네 것이 될 것이며 그들의 유산은 그들의 형의 이름으로 함께 받으리라

7.내게 대하여는 내가 이전에 밧단에서 올 때에 라헬이 나를 따르는 도중 가나안 땅에서 죽었는데 그 곳은 에브랏까지 길이 아직도 먼 곳이라 내가 거기서 그를 에브랏 길에 장사하였느니라 (에브랏은 곧 베들레헴이라)

 

 

<설교>

본문에 보면 요셉이 야곱이 병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두 아들인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데리고 병문안을 갑니다. 그리고 병문안을 온 요셉에게 야곱이 “요셉에게 이르되 이전에 가나안 땅 루스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사 복을 주시며 내게 이르시되 내가 너로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여 네게서 많은 백성이 나게 하고 내가 이 땅을 네 후손에게 주어 영원한 소유가 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3,4절)는 말로 축복합니다.

 

 

야곱의 축복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이삭이 야곱에게 했던 축복과 동일합니다. 그리고 예전에 야곱이 에서를 피하여 도망을 칠 때 찾아오셔서 하셨던 하나님의 축복의 내용이기도 합니다. 야곱이 147세라는 것을 생각하면 이미 100여 년 전에 들었던 축복의 내용인데 그것을 왜 죽을 날이 다 된 시점에서 요셉에게 말하는 것일까요?

 

 

하나님이 축복하신 내용에는 하나님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땅이 있습니다. 그것은 현재 야곱의 가문 모든 사람이 살고 있는 애굽 땅은 언젠가는 떠나야 할 땅이라는 것을 상기시키기 위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야곱의 가문이 거주하는 애굽 땅에 무엇을 얼마나 이루었든 상관없이 애굽은 떠나야 할 땅일 뿐입니다. 그렇게 보면 야곱은 후손들이 애굽을 떠날 곳으로 바라보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이 언약하신 내용을 요셉에게 말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5절에 보면 야곱이 “내가 애굽으로 와서 네게 이르기 전에 애굽에서 네가 낳은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내 것이라 르우벤과 시므온처럼 내 것이 될 것이요”라는 말을 합니다.

 

 

내 것이 된다는 것은 야곱의 아들로 삼겠다는 뜻입니다. 야곱은 왜 굳이 요셉의 두 아들을 자신의 아들로 삼는 것일까요? 야곱이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아들로 삼음으로 장차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에 그 이름이 들어가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땅에 들어갔을 때 그 땅을 기업으로 받게 됩니다.

 

 

요셉의 두 아들이 열 두 지파 중에 므낫세 지파와 에브라임 지파의 조상이 되고 하나님이 주신 땅에서 각기 기업을 받았다면 결국 요셉은 다른 형제들에 비해서 두 몫을 받은 결과가 됩니다. 그리고 이것은 장자권이 요셉에게로 넘어갔다는 뜻이 되기도 합니다.

 

 

이것을 대상 5:1,2절에서 “이스라엘의 장자 르우벤의 아들들은 이러하니라 (르우벤은 장자라도 그의 아버지의 침상을 더럽혔으므로 장자의 명분이 이스라엘의 아들 요셉의 자손에게로 돌아가서 족보에 장자의 명분대로 기록되지 못하였느니라 유다는 형제보다 뛰어나고 주권자가 유다에게서 났으나 장자의 명분은 요셉에게 있으니라)”고 말합니다.

 

 

이것으로 장자의 명분은 혈통의 순서대로 이어지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장자의 명분은 인간의 조건과 상관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야곱은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축복할 때 오른손을 차남인 에브라임 머리 위에 얹는 것으로 보여줍니다.

 

 

이것은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야곱의 자식으로 삼는 것에서도 드러납니다. 41:45절에 보면 바로가 요셉에게 애굽 제사장의 딸 아스낫을 주어 아내로 삼게 합니다. 그리고 아스낫에게서 므낫세와 에브라임이 태어납니다. 그렇게 보면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순수한 이스라엘의 혈통이 아닌 것이 됩니다.

 

 

그런데도 야곱이 그들을 자식으로 삼았고 결국 이스라엘 지파의 조상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일컫는 이스라엘 또한 인간의 혈통이나 조건과는 무관함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는 정통성이나 참된 신앙을 계승 받은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제외한 다른 지파의 조상이 되는 요셉의 형제들도 요셉에 대해 할 말이 없는 부끄러움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은 하나님 앞에서 할 말이 없는 존재로 출발합니다. 하지만 이 같은 사실을 잊어버리고 자신들의 정통성과 신앙을 자랑하는 길로 가게 된 것이 이스라엘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에게서 우리 자신의 현재를 확인해야 합니다. 우리 또한 이스라엘과 다를 바 없이 부끄러운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자랑할 조건이 뭐가 있습니까? 기독교 교단들 가운데는 오래된 역사를 자랑하며 자신들의 정통성을 주장하기도 하지만 100년이 되고 200년이 된 교단이라 해도 그 역사가 보여주는 것은 죄밖에 없습니다.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교단이 몇 년이 되었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개인의 신앙 이력도 다르지 않습니다. 몇 대를 이은 기독교 집안이라는 것, 몇 대가 목사이고 장로라는 것, 몇 십 년을 신앙생활 했다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 보시기에는 죄일 뿐입니다. 죄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신자에게는 이러한 시각이 요구됩니다. 그래야 인간의 어떤 조건도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무의미할 뿐임을 알 것이기 때문입니다.

 

 

에브라임과 므낫세 입장에서 생각해도 다르지 않습니다. 혈통을 따진다면 그들은 이스라엘에 속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요셉에게 속한 요셉의 아들이라는 것으로 야곱에게 ‘내 것이라’는 선언을 듣는 것입니다

 

 

사 43:1절에 보면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을 내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도 이스라엘을 하나님으로 것으로 삼을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구속하셨고 지명하여 불러내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을 생명을 얻게 된 방식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내용 앞에서 신자가 자각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인간은 심판이 당연한 존재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신에 대한 깊은 자각으로 머물러 있어야 하며 이러한 시각으로 자신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롬 1:16-17절을 보면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고 말합니다.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복음으로 말합니다. 따라서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자신의 능력이나 조건은 모두 내려놓게 됨을 뜻합니다. 이것이 한국교회에서 바르게 정립이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믿음을 행함의 능력으로 이해하는 것이고 결국 행함에 따라 믿음이 차별되는 것입니다.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야곱의 자식이 될 수 없었던 것처럼 우리 역시 하나님의 자녀로 여김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자녀로 여김 받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우리를 지명하셨고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내용으로 자리한다면 신자는 하나님의 사랑을 높이고 자랑하게 될 뿐입니다.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을 내 것이라고 할 때 요셉이나 에브라임, 므낫세의 동의를 구한 것이 아닙니다. 야곱 또한 일방적인 선언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오심도 십자가의 죽으심도 우리를 부르신 것도 구원하신 것도 모두가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일으키신 사건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일으키신 사건이 우리의 사건이 되어서 생명이라는 구원의 자리에 속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이 되어 하나님이 일으키신 사건을 신뢰하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을 여러분의 열정, 노력, 의지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믿음은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덮어 주시고 그 자리를 기쁨과 감사로 채우시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리고 신자는 하나님의 사랑 앞에 항복한 자로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다른 요구가 있을 수 없습니다. 사랑으로 인해 할 말이 없는 부끄러운 자로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 같은 사랑을 알지 못하고 사랑을 받기 위한 조건을 갖추고자 하는 것이 어리석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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