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016.09.10 17:05

(115강) 야곱의 축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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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48:8-14http://onlycross.net/videos/gen/gen-480814.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8.이스라엘이 요셉의 아들들을 보고 이르되 이들은 누구냐

9.요셉이 그의 아버지에게 아뢰되 이는 하나님이 여기서 내게 주신 아들들이니이다 아버지가 이르되 그들을 데리고 내 앞으로 나아오라 내가 그들에게 축복하리라

10.이스라엘의 눈이 나이로 말미암아 어두워서 보지 못하더라 요셉이 두 아들을 이끌어 아버지 앞으로 나아가니 이스라엘이 그들에게 입맞추고 그들을 안고

11.요셉에게 이르되 내가 네 얼굴을 보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하였더니 하나님이 내게 네 자손까지도 보게 하셨도다

12.요셉이 아버지의 무릎 사이에서 두 아들을 물러나게 하고 땅에 엎드려 절하고

13.오른손으로는 에브라임을 이스라엘의 왼손을 향하게 하고 왼손으로는 므낫세를 이스라엘의 오른손을 향하게 하여 이끌어 그에게 가까이 나아가매

14.이스라엘이 오른손을 펴서 차남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고 왼손을 펴서 므낫세의 머리에 얹으니 므낫세는 장자라도 팔을 엇바꾸어 얹었더라

 

 

<설교>

본문은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축복하는 내용입니다. 13절을 보면 요셉이 두 아들을 야곱 앞에 세울 때 야곱의 왼손 앞에는 에브라임을 세우고 오른손 앞에는 므낫세를 세웁니다. 야곱이 오른손으로는 장남 므낫세의 머리에 얹고 왼손으로는 차남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어 축복하도록 한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오른손은 특별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특히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구원하시는 능력이나 창조의 권능을 표현할 때도 오른손을 언급한 것을 보면 고대 히브리인들에게 오른손으로 축복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권능과 축복이 부여되는 의미가 담겨 있으며 그것은 당연히 장남이 누려야 하는 것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요셉도 이러한 히브리 사고를 따라 장남인 므낫세를 야곱의 오른손 앞에 세운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이 손을 바꾸어서 축복합니다. 오른손을 왼편에 있는 차남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고 외손은 오른편에 있는 장남 므낫세의 머리에 얹은 것입니다. 이것을 본 요셉은 야곱이 눈이 어두워서 착각한 것으로 여기고 야곱의 손을 들어 자신이 원한 대로 오른손을 므낫세의 머리로 옮기고자 합니다. 그리고 야곱에게 “아버지여 그리 마옵소서 이는 장자이니 오른손을 그의 머리에 얹으소서”라고 말합니다.

 

 

요셉은 야곱이 오른손을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은 것을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요셉이 에브라임보다 므낫세를 더 사랑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오른손의 축복은 당연히 장남에게로 돌아가야 한다고 여겼기 때문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이 요셉이 알고 있는 질서였던 것입니다.

 

 

야곱이 손을 바꾼 것은 의도적이었습니다. 고의로 장남과 차남을 바꾸어 축복한 것입니다. 이처럼 야곱이 요셉의 생각을 무시하고 손을 바꾸어 축복한 것은 하나님의 축복에 대해 배우게 된 것이 있기 때문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축복은 인간이 생각하는 자격과 조건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요셉이 야곱이 손을 바꾸어 얹은 것을 기뻐하지 않은 것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조건과 자격이 므낫세에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장남이라는 것입니다. 야곱도 축복의 비밀을 알기 전에는 요셉과 동일한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팥죽 한 그릇으로 에서의 장자 명분이라도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했던 것입니다. 즉 자신의 수단과 방법으로 축복 받을 조건과 자격을 갖추고자 한 것입니다.

 

 

하지만 야곱은 하나님이 간섭하시는 인생을 살아오면서 축복은 조건과 자격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한에 의해 일방적으로 주어지는 것임을 배우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축복을 은혜로 일컫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야곱이 축복에 대해 잘못 생각한 것이 있으면 천사를 보내서 말씀으로 가르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왜 굳이 그의 인생을 환난으로 끌어가시면서 배우게 하시는 것일까요?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순히 받아들이고 그 말씀에 따라 포기할 것을 포기하고 내려놓을 것을 내려놓는 자질을 갖춘 존재라면 굳이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에 죽지 않으셔도 될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인간도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두고 그 말씀대로 행할 수 없다는 것은 인간이 선악과를 먹음으로 드러났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정도의 것은 말씀으로만 하셔도 다 알아듣지 않겠는가’라고 생각하는 것은 인간의 악함에 대해 알지 못한 무지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마음을 완악하다고 말씀합니다. 완악하다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 위에 존재함을 업신여기고 자신의 열심과 힘으로 원하는 것을 얻고자 하는 습성으로 살아감을 뜻합니다. 그래서 완악한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열심과 수고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 위주의 구원관과 축복관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야곱이 그러했습니다. 야곱의 축복관은 지극히 자기 위주였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자기를 위한 것으로 여기고 그 축복을 위해 일정한 조건과 자격을 갖추면 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의 기독교인들의 축복관과 다르지 않습니다.

 

 

지금의 대다수의 기독교인들이 알고 있는 축복관도 온통 자기 위주입니다. 그리고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알아주실만한 조건과 자격을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자신의 열심과 수고로 이루려고 하는 것이 현대 기독교인들의 실상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자기 위주의 축복관을 무너뜨리십니다. 우리는 그것을 야곱의 인생에서 배울 수 있으며 야곱 또한 자기 인생을 통해서 자신의 축복관이 잘못되어 있음을 배우게 된 것입니다. 그 계기가 얍복강에서의 씨름에 있습니다. 얍복강의 씨름에서 드러난 것은 자신의 축복을 지키고자 하는 완악함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얻게 된 것은 힘을 잃고 절뚝거리는 몸이었을 뿐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진정한 축복을 주십니다. 그것은 야곱을 이스라엘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야곱이라는 이름 대신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주심으로 자신의 열심과 수고를 주장하는 완악함이 무너지고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게 되는 하나님의 능력이 임한 그것이 참된 축복임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간섭으로 인해서 야곱은 자신의 힘과 열심으로 축복을 얻고자 한 것이 정작 하나님께는 원수가 되는 사고방식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기에 그 같은 내용을 요셉에게도 알려주기 위해 손을 바꾼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삭도 에서가 장자라는 것 때문에 에서를 축복하려고 했습니다. 반면에 리브가는 자신의 마음에 드는 야곱이 축복 받기를 원했습니다. 이러한 모습들이 보여주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 자신의 의도에 따라 조종될 수 있다는 악한 생각입니다. 따라서 목사가 복을 빌면 복이 주어진다고 생각하는 것 또한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악한 생각일 뿐입니다.

 

 

복과 저주의 권한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복과 저주를 주관하고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인간도 자신의 열심과 수고로 복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러한 사고방식이 저주로 다가올 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할 자를 사랑하시고 미워할 자를 미워하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일방적인 방식 앞에서 복을 위한 인간의 수고와 노력은 헛된 것으로 드러날 뿐입니다. 야곱이 이것을 배우게 된 것이고 이러한 내막을 알게 하기 위해 손을 바꾼 것입니다.

 

 

야곱이 므낫세보다 에브라임을 더 사랑해서도 아니고, 에브라임이 축복을 받을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은 장남, 차남이라는 인간의 조건을 초월하여 온전히 하나님의 일방적인 뜻에 따라 주어지는 것임을 보게 하는 것입니다.

 

 

15,16절의 야곱의 축복의 내용을 보면 예전에 야곱이 원했던 복과 전혀 다릅니다. 야곱은 하나님이 자신을 인도하시고 기르신 것을 복으로 간주합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복을 자신의 후손에게도 주실 것을 간구합니다. 세상에서 힘을 가진 자로 크게 되고 번성하는 것을 복으로 여겼던 야곱은 사라지고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여 하나님의 인도를 구하는 이스라엘로 존재하는 그것이 야곱에게서 배우게 되는 참된 복의 세계입니다.

 

 

그런데 자신을 애굽으로 보내신 분이 하나님인 것을 아는 요셉이 왜 그것을 몰랐을까요? 우리는 믿음이 있으면 믿음의 세계 전부를 알게 될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성령을 받고 복음을 알았던 베드로가 하늘에서 부정한 것이 담긴 그릇이 내려오는 환상을 체험하기 전까지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별했던 것이 한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복음을 안다는 것은 모든 것을 다 알았다는 것이 아니라 심령이 십자가에 피 흘리고 죽으신 그리스도께로 향하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복의 세계입니다. 신자는 복의 세계에서 은혜와 사랑의 깊음을 알고 배워가면서 자기 위주의 삶의 방식이 무너져 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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