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016.09.24 18:05

(117강) 저주 속의 축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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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49:1-7http://onlycross.net/videos/gen/gen-490107.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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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야곱이 그 아들들을 불러 이르되 너희는 모이라 너희가 후일에 당할 일을 내가 너희에게 이르리라

2.너희는 모여 들으라 야곱의 아들들아 너희 아버지 이스라엘에게 들을지어다

3.르우벤아 너는 내 장자요 내 능력이요 내 기력의 시작이라 위풍이 월등하고 권능이 탁월하다마는

4.물의 끓음 같았은즉 너는 탁월하지 못하리니 네가 아버지의 침상에 올라 더럽혔음이로다 그가 내 침상에 올랐었도다

5.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요 그들의 칼은 폭력의 도구로다

6.내 혼아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지어다 내 영광아 그들의 집회에 참여하지 말지어다 그들이 그들의 분노대로 사람을 죽이고 그들의 혈기대로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음이로다

7.그 노여움이 혹독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요 분기가 맹렬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내가 그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로다

 

 

<설교>

28절을 보면 “이들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라 이와 같이 그들의 아버지가 그들에게 말하고 그들에게 축복하였으니 곧 그들 각 사람의 분량대로 축복하였더라”고 말합니다.

 

 

49장은 야곱이 죽기 전에 아들들을 불러 모아 그들이 후일에 당할 일에 대해 말하는 내용인데 이것을 28절에서는 장차 이스라엘의 12지파의 조상이 될 아들들을 각기 분량대로 축복한 것으로 말합니다. 열 두 아들에 대한 야곱의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르우벤과 시므온과 레위를 향한 본문의 내용을 보면 도무지 축복을 한 것으로 말할 수가 없습니다.

 

 

더군다나 7절을 보면 “그 노여움이 혹독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요 분기가 맹렬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내가 그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로다”고 말합니다. 이 구절을 보면 본문은 야곱이 앞서 말한 세 아들에 대한 저주 선포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야곱은 열두 아들 중에 세 아들은 저주를 선포하고 나머지 아들들은 축복을 선포한 것이 됩니다. 하지만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28절은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 즉 야곱의 열 두 아들 모두에게 축복한 것으로 말합니다. 이처럼 앞뒤가 일치하지 않은 서로 모순적인 것 같은 이 내용을 어떻게 이해하는지가 본문의 중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르우벤, 시므온, 레위는 왜 저주의 말을 들어야 하는 것일까요? 르우벤은 야곱의 장자입니다. 야곱의 장자로서 그가 어떤 인물이었는지는 3절의 내용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야곱의 장자로서 야곱의 능력이었고 기력의 시작이며 위풍이 월등하고 권능이 탁월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장자로서 믿음직한 풍모를 갖췄던 것입니다.

 

 

하지만 야곱은 르우벤에 대해서 다시 “물의 끓음 같았은즉 너는 탁월하지 못하리니 네가 아버지의 침상에 올라 더럽혔음이로다 그가 내 침상에 올랐었도다”(4절)라고 말합니다.

 

 

르우벤은 야곱의 아내인 라헬의 여종이며 야곱의 아들 단과 납달리를 낳은 빌하와 동침을 한 일이 있습니다. 그 일에 대해 야곱은 아버지의 침상을 더럽혔다고 하며 그 행위를 저주한 것입니다.

 

 

그리고 5절에서는 시므온과 레위에게 ‘그들의 칼은 폭력의 도구’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시므온과 레위가 디나를 욕보인 히위 족속의 추장인 세겜과 히위 족속의 모든 남자들을 죽인 일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창 34장에 보면 야곱의 딸 디나가 히위 족속의 추장 세겜에게 강간을 당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디나를 욕보인 세겜이 디나에게 연연하여 아내로 삼게 해달라고 아버지 하몰에게 청합니다. 그리고 하몰이 야곱에게 말하기 위해 왔을 때 야곱의 아들들은 할례 받지 아니한 사람에게 디나를 줄 수 없다고 하면서 모든 남자가 할례를 받으면 디나를 주겠다는 조건을 세웁니다.

 

 

결국 히위 족속의 모든 남자가 할례를 행하고 아파할 때 시므온과 레위가 성읍을 기습하여 하몰과 세겜을 포함한 모든 남자를 죽이고 디나를 데려옵니다. 그리고 다른 아들들도 성읍에 있는 것과 들에 있는 것과 그들의 모든 재물을 빼앗고 자녀와 아내까지 사로잡는 일을 행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에 대해서 “내 혼아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지어다 내 영광아 그들의 집회에 참여하지 말지어다 그들이 그들의 분노대로 사람을 죽이고 그들의 혈기대로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음이로다”(6절)라고 말합니다.

 

 

르우벤, 시므온, 레위의 행위를 생각하면 분명 축복보다는 저주가 당연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7절에서도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본문은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아들들을 축복한 후에 말씀드린 것처럼 28절에서 열 두 지파를 축복한 것으로 말한다는 것입니다. 저주한다고 말했고 저주가 분명한 데 축복으로 받아들이고 이해해야 하는 난감함이 있는 것입니다.

 

 

대개들 생각하고 기대하는 축복은 세상에서 잘되는 것이지만 여기에 대해서도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축복이 세상에서 잘되는 것이라면 축복의 세계에서도 차별이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동일한 축복을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비록 세상에서 잘된다 해도 격차는 반드시 존재합니다. 소위 성공했다고 하는 모든 사람들이 동일한 수준의 성공을 이루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축복의 세계에서도 축복을 많이 받은 자와 상대적으로 적게 받은 자르 비교하며 차별하는 것이 옳을까요? 그러한 축복의 세계는 없습니다.

 

 

8절에 보면 유다를 가리켜서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고 말합니다. 모든 형제들로부터 찬송 받는 존재가 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유다가 형제들보다 더 존귀한 위치에 있게 된다는 뜻인데, 이것만 봐도 야곱이 말한 축복은 세상에서 잘되고 성공하는 것과 무관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야곱은 험악한 인생을 살아오면서 비로소 축복이 무엇인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예전에 추구했던 세상에서의 성공은 축복이 아님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야곱의 축복은 세상의 기준과 잣대로 이해할 수 없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본문을 보면서 축복으로 다가오지 않는 것은 축복에 대해서 기존의 야곱처럼 고정된 생각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야곱이 추구했던 축복을 우리도 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의 내용이 저주로 밖에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르우벤과 시므온과 레위가 축복을 받을 수 없음은 그들의 행위에서 드러났습니다. 그러면 다른 아들들은 어떻습니까? 그들은 저주가 아닌 축복을 받을만한 사람들입니까? 그들은 요셉을 버렸습니다. 결국 행위를 기준 한다면 축복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잘살아도 못살아도 저주가 당연한 것이 인간이 처한 형편입니다.

 

 

그렇다면 르우벤, 시므온, 레위는 저주를 받아야 하고 다른 아들들은 축복을 받아야 한다는 것 또한 잘못된 것입니다. 따라서 야곱이 다른 아들들에게 단지 좋은 말을 했다고 해서 축복의 말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저주를 받는다는 것은 죽은 자라는 뜻이고 축복을 받는 것은 산자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진정한 축복은 저주에 속한 자가 사는 것을 뜻합니다. 즉 죽은 자가 산자가 되는 것이 축복인 것입니다. 이것이 유다와 요셉에 대한 축복에서 드러납니다.

 

 

유다와 요셉의 축복은 메시아의 오심을 담고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다음에 말씀드리기로 하고 본문에서 생각할 것은 저주에 속한 자에 지나지 않은 르우벤, 시므온, 레위가 축복의 사람이 된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오신 메시아 덕분입니다. 따라서 메시아의 오심이 복음으로 다가오는 사람은 자신이 저주에 속했음을 아는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본문의 저주의 선포는 저주 받을 자로 선언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저주 아래 있는 자신의 본질을 보게 하고자 하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저주를 봄으로써 생명으로 오시는 메시아가 진정한 하늘의 복임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저주 안에서 하나님의 축복이 무엇인가를 보게 하는 것이 본문의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히 6:9절을 보면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 너희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것 곧 구원에 속한 것이 있음을 확신하노라”고 말합니다.

 

 

이보다 더 좋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구원에 속한 것입니다. 즉 우리를 죄의 저주에서 구출하여 구원에 속하게 하는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이 세상의 무엇과 비교해도 ‘이 보다 좋은 것’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저주를 선포하는 것은 우리가 좋은 것으로 여기는 것들이 좋은 것이 아님을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저주라는 죽음의 현실에서 과연 ‘좋은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지 생각해 보십시오.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로지 죽음 아래 있는 죄인이 죽음에서 자유하게 되고 생명에 속한 자되는 것이 좋은 것입니다. 이 좋은 것을 예수님이 이루시고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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