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016.10.01 17:55

(118강) 유다의 축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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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49:8-12http://onlycross.net/videos/gen/gen-490812.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8.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버지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

9.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내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갔도다 그가 엎드리고 웅크림이 수사자 같고 암사자 같으니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랴

10.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11.그의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며 그의 암나귀 새끼를 아름다운 포도나무에 맬 것이며 또 그 옷을 포도주에 빨며 그의 복장을 포도즙에 빨리로다

12.그의 눈은 포도주로 인하여 붉겠고 그의 이는 우유로 말미암아 희리로다

 

 

<설교>

축복의 권한은 하나님께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것은 하나님만이 복을 주신다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의미로는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요구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에게는 하나님께 복을 요구할 권한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복을 요구할 수 있는 사람이 되려고 힘을 씁니다. 즉 복을 받을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축복의 권한이 하나님께 있음을 무시하거나 간과한 것일 뿐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르우벤, 시므온, 레위에 대한 야곱의 축복은 축복이라기보다는 저주였습니다. 그럼에도 야곱이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를 축복했다고 말하는 것을 저주 속에 축복이 감춰져있는 것으로 말씀드렸습니다. 저주가 당연한 자신의 본질을 보게 됨으로 저주에서 건지시기 위해 행하신 하나님의 일을 하게 되는 것이 복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주가 없는 축복은 없습니다.

 

 

축복은 저주에 속한 자가 저주와 상관없게 되는 것입니다. 저주에서 구출되는 것이 구원이며 구원에 속한 것이 세상의 모든 것보다 더 좋은 것이기 때문에 저주를 알지 못한다면 축복의 참된 의미를 알 수 없습니다. 이것은 죽음을 모르고서는 부활의 영광과 복됨을 알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도 지금의 기독교인들은 저주는 생각하지 않고 축복만 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주로부터 구출되는 구원에 대한 관심에서 멀어진 채 생존에 필요하고 유리하다고 생각되는 세상의 것을 복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8절에 보면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버지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고 말합니다.

 

 

이 내용은 마치 유다가 다른 형제보다 더 잘된다는 뜻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때문에 유다가 다른 형제보다 더 나은 축복을 받았다고 생각될 수 있습니다. 본문의 내용 자체가 충분히 우리가 생각하고 바라는 축복을 말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유다의 축복을 단순히 다른 형제보다 잘 된다는 의미로 받아들인다면, 거지 나사로는 축복과 상관없게 됩니다. 오히려 거지로 고통 받으며 산 인생으로 인해 저주 받은 것으로 간주될 것입니다. 거지 나사로만이 아니라 생활비 전부를 연보하여 예수님께 칭찬 받은 가난한 과부도 다르지 않습니다.

 

 

성경에 보면 믿음으로 인해 예수님께 칭찬 받은 사람들이 많지만 그들이 부자 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 칭찬을 받을 정도로 믿음이 좋았다면 축복을 받고 잘되는 것이 옳은데 그들의 삶의 형편이 나아진 것은 없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믿음도, 축복도 세상에서 잘되고 삶의 형편이 나아지는 것과는 무관하다는 뜻이 됩니다.

 

 

8절에 보면 야곱의 아들들이 유다 앞에 절한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은 요셉에게 해야 합니다. 요셉이 형제들이 자기에게 절하는 꿈을 꾸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형제들이 유다에게 절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내용에서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 특정 인간에게 고정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축복이 인간에게 고정되지 않았다면 유다에 대한 야곱의 축복은 하나님의 축복이 무엇이며 어떻게 주어지는가를 나타내기 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야곱의 아들들이 왜 유다 앞에 절하게 되는 것일까요? 이것은 말씀드린 것처럼 유다가 다른 형제들보다 부자가 되었거나 성공했기 때문이 아니라 유다를 통해서 복의 근원 되시는 분이 오시기 때문입니다.

 

 

복의 근원으로 오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복의 근원이라면 복은 예수로 말미암을 뿐이라는 뜻이 됩니다. 그렇다면 복을 받기 위해서 우리가 뭔가 해야 할 것은 없게 되는 것이고, ‘이렇게 해야 복 받습니다’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복의 근원으로 바라보지 않는 다는 뜻이 됩니다.

 

 

르우벤, 시므온, 레위가 그들의 행위로 인해서 저주를 받았다는 것은 그들의 인생은 아무런 희망이 없다는 뜻이 됩니다. 비록 그들이 열심히 일해서 많은 것을 손에 쥐었다 해도 본질은 저주 받은 자이기 때문에 희망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이 희망이 없는 어둠에서 희망이 있는 빛에 있게 된다면 그것은 오직 저주에서 벗어나는 길 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복이라고 말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저주에서 복으로 옮긴바 되는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다는 것이 유다의 축복에 담긴 내용입니다. 유다가 저주에 있는 자를 건져서 빛의 세계에 있게 할 복의 근원이 오시는 통로로 사용되는 것이 축복인 것입니다.

 

 

10절에 보면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고 말합니다.

 

 

규는 왕의 지팡이를 뜻합니다.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않는다는 것은 영원한 왕이 유다 가문에 나타남으로써 유다가 영원히 왕의 다스림 아래 있게 됨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유다가 누리게 될 복의 상태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영원한 왕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따라서 영원한 왕이 되신 예수님의 다스림 아래 있게 된 상태를 가리켜서 복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실로가 오시기까지’라는 말이 있습니다. 실로는 이스라엘 백성이 처음 회막을 세운 곳입니다(수 18:1). 회막은 장막을 말하는데 장막에는 법궤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장막에서 제물을 잡아 그 피를 법궤 뚜껑에 뿌림으로 죄가 용서되었습니다.

 

 

따라서 실로가 오신다는 것은 우리를 저주 아래 있게 한 죄를 희생의 피로 용서하시는 우리의 왕이 오신다는 것을 말 합니다 모든 저주를 씻어 버릴 분이 오신다는 것입니다. 결국 유다를 통해서 다른 형제들이 저주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기 때문에 유다가 형제들의 찬송이 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유다는 야곱의 넷째 아들입니다. 그런데 왜 유다가 이런 축복을 받는 것일까요? 장자인 르우벤이 아버지의 침상을 더럽힌 것 때문에 저주를 받아야 했기 때문이라면 차라리 야곱이 사랑했던 베냐민에게 유다의 축복을 하는 것이 인간적으로 더 이해될 수 있습니다.

 

 

야곱이 유다를 축복하는 것은 유다에게서 나타난 속성 때문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창 43:9절을 보면 “내가 그를 위하여 담보가 되오리니 아버지께서 내 손에서 그를 찾으소서 내가 만일 그를 아버지께 데려다가 아버지 앞에 두지 아니하면 내가 영원히 죄를 지리이다”고 말합니다.

 

 

유다가 야곱에게 베냐민을 애굽으로 데려가게 해달라고 하면서 만약 베냐민을 애굽에서 다시 데려오지 못한다면 자신이 영원히 죄를 지겠다고 말합니다. 베냐민을 위해 자신이 담보가 되겠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며 희생을 자처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창 44:33절에서는 “이제 주의 종으로 그 아이를 대신하여 머물러 있어 내 주의 종이 되게 하시고 그 아이는 그의 형제들과 함께 올려 보내소서”라고 말합니다.

 

 

애굽의 총리이던 요셉에게 자신을 종으로 삼고 대신 베냐민을 돌려 보내달라는 것입니다. 베냐민을 잃었을 때의 아버지의 아픔을 생각하고 자신이 종이 되겠다고 자처한 것입니다. 이처럼 유다에게서 나타나는 속성은 희생입니다.

 

 

유다는 아마 다말에게서 희생을 배우게 되었을 것입니다. 다말이 가문을 이어가기 위해 창녀로 변장하고 유다와 동침한 것을 알게 된 유다가 자신으로 인해 희생하게 된 다말을 보면서 다말의 희생이 자신의 가문을 살렸음을 깨닫게 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유다 역시 르우벤, 시므온, 레위와 같이 저주를 받아야 하는 가문일 뿐입니다. 요셉을 버리는 일에 함께 했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저주로 끝나야 할 가문이 저주에서 건지실 영원한 왕이 오심으로 축복의 가문이 된 것입니다. 우리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의 우리의 축복이 되시는 이유도 그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저주에서 건지시고 거룩하신 피로 용서하셨기 때문입니다. 복을 복으로 아는 그가 진정 복된 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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