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016.10.22 18:21

(121강) 야곱의 장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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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50:1-6http://onlycross.net/videos/gen/gen-500106.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요셉이 그의 아버지 얼굴에 구푸려 울며 입맞추고

2.그 수종 드는 의원에게 명하여 아버지의 몸을 향으로 처리하게 하매 의원이 이스라엘에게 그대로 하되

3.사십 일이 걸렸으니 향으로 처리하는 데는 이 날수가 걸림이며 애굽 사람들은 칠십 일 동안 그를 위하여 곡하였더라

4.곡하는 기한이 지나매 요셉이 바로의 궁에 말하여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은혜를 입었으면 원하건대 바로의 귀에 아뢰기를

5.우리 아버지가 나로 맹세하게 하여 이르되 내가 죽거든 가나안 땅에 내가 파 놓은 묘실에 나를 장사하라 하였나니 나로 올라가서 아버지를 장사하게 하소서 내가 다시 오리이다 하라 하였더니

6.바로가 이르되 그가 네게 시킨 맹세대로 올라가서 네 아버지를 장사하라

 

 

<설교>

야곱은 자신을 막벨라 굴에 장사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습니다. 야곱의 유언에 따라 가나안 땅으로 가기 위해 요셉이 “우리 아버지가 나로 맹세하게 하여 이르되 내가 죽거든 가나안 땅에 내가 파 놓은 묘실에 나를 장사하라 하였나니 나로 올라가서 아버지를 장사하게 하소서 내가 다시 오리이다”(5절)는 말을 바로에게 전하게 합니다. 그리고 바로는 가나안 땅으로 가서 야곱을 장사할 것을 허락합니다.

 

 

야곱이 굳이 막벨라 굴에 장사하라는 유언을 남긴 것은 개인적으로 조상이 묻힌 곳에 장사되기를 원하는 것도 있었겠지만 그보다는 아들들에게 가르치고자 하는 것이 있기 때문으로 생각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은 반드시 하나님이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모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아니까 굳이 배워야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될지도 모르겠지만 아니까 배우지 않아도 된다면 신자가 배워야 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동안 설교와 성경공부를 통해 배워서 아는 것으로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여러분이 알고 있는 내용이 과연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신 그리스도께로 이끌어 가는가입니다. 과연 그렇습니까? 여러분이 안다고 하는 말씀이, 복음이 여러분을 그리스도가 가신 고난의 길로 이끌어 가고 여러분은 거기에 순종하고 계십니까? 만약 그렇다면 여러분은 더 이상 배워야 할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들은 복음에 반발이 있고 복음이 이끄는 길이 아니라 여러분이 원하는 길로 가기를 힘쓴다면 여러분은 인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배워야 하고 알아가야 합니다. 여러분이 얼마나 무능한 존재이며 죽음이 당연한가를 배우고 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요셉과 그 형제들은 야곱의 시신과 함께 애굽에서 막벨라 굴로 올라갑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언약의 시각에서 보면 야곱의 시신은 애굽에서 나와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으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즉 출애굽의 의미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언약을 믿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대로 후손에게 약속의 땅을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때가 되면 이스라엘의 후손들이 애굽에서 나와 약속의 땅으로 인도될 것을 믿었음을 의미합니다. 이것으로 야곱은 구원 안에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시신이 어디에 묻히든 구원의 문제와는 무관합니다. 그럼에도 막벨라 굴에 장사할 것을 유언한 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언약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백성으로 세워질 것을 소망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3절을 보면 “사십 일이 걸렸으니 향으로 처리하는 데는 이 날수가 걸림이며 애굽 사람들은 칠십 일 동안 그를 위하여 곡하였더라”고 말합니다.

 

 

애굽 사람이 70일 동안 죽은 야곱을 위해 곡을 합니다. 당시 애굽 왕을 장사할 때 72일을 곡했다는 말이 있음을 참고해 보면 야곱의 장사를 거의 애굽 왕을 장사하는 것처럼 생각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야곱의 죽음을 그렇게 대우한 것은 애굽 총리인 요셉과의 관계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죽은 야곱을 위해 며칠을 곡했든 야곱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70일이 아니라 100을 곡했다 해도 죽은 야곱과는 무관하고 야곱의 아들들과도 무관하다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언약의 시각에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애굽 사람은 죽음을 끝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언약을 알지 못하는 애굽의 시각에서 죽음은 단절이고 마지막입니다. 그들에게 죽음 이후는 없습니다. 죽음에 대해서는 슬퍼하고 곡하고 장사하는 것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언약 안에 있는 야곱은 몸은 죽었지만 죽음에 있지 않고 생명에 있습니다. 이것이 언약을 아는 자와 알지 못한 자의 엄청난 차이입니다. 이 차이를 믿지 않기 때문에 언약을 가볍게 여기는 것이고 언약을 알지 못해도 하나님만 잘 믿으면 된다는 종교적 사고방식만 드러내는 것입니다.

 

 

언약을 믿은 야곱에게 막벨라 굴은 하나님이 이루실 영광의 자리였고 영원히 거할 안식처였습니다. 하나님이 언약을 이루실 것을 믿는 믿음의 증거였던 것입니다. 그런 시각에서 본다면 지금 우리에게 막벨라 굴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야곱이 막벨라 굴에 장사되기를 원한 것처럼 신자는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죽기를 소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주는 혜택은 영원합니다. 언약으로 우리에게 이루어지는 것은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언약의 완성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곧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시각에서는 비현실적이고 막연한 것일 뿐이지만 언약을 믿는 신자에게는 반드시 이루어질 분명한 현실입니다. 보이지 않는 이 현실을 현실로 여기며 주를 바라보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에서 누릴 영원한 영광의 날을 소망하며 현재를 인내하게 되는 것입니다.

 

 

야곱은 죽은 자로 애굽에서 나와 막벨라 굴에 장사되었습니다. 이것이 말해주는 출애굽의 의미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출애굽은 죽은 자로 애굽에서 나오는 것을 뜻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말해주는 애굽의 열 번 째 재앙입니다.

 

 

출애굽은 장자 재앙에서 살아남은 자들에게 이루어집니다.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발라 죽음의 사자가 그 피를 보고 넘어감으로 살아난 자들이 출애굽 한 것입니다.

 

 

장자 재앙에서 이스라엘을 따로 구별하지 않은 것은 이스라엘도 애굽과 동일하게 하나님께 죽임을 당해야 할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어린양의 피를 바름으로 그것을 알아야 했고 애굽에서 죽었어야 할 자신들이 어린양이 대신 죽음으로 살았다는 그 정신으로 애굽에서 나와야 했습니다. 그것이 진정한 출애굽입니다.

 

 

육신이 애굽에서 나온다고 해서 출애굽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애굽의 사고방식에서 나오는 것이 출애굽입니다. 어린양의 피가 우리를 애굽에서 나오게 했다는 믿음이 출애굽이고 자신의 힘과 가능성이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부인되는 그것이 출애굽인 것입니다.

 

 

애굽에도 신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신을 섬기는 방식은 자신의 열심과 정성을 신이 받아줌으로 그 보상으로 복을 받는 것입니다. 이들에게는 신의 무조건적인 은혜가 없습니다. 모든 것을 자신들이 일한 것에 대한 보상으로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신앙은 애굽이 신을 섬기는 방식과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자신을 아무것도 행할 수 없는 죽은 자로 여기는 것이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이것을 세상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육신을 위해 발버둥치는 자신의 모습에서 실감하게 됩니다. 그리고 스스로의 힘과 의지로 자신을 붙들고 있는 세상이라는 세력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자각하면서 주의 능력을 구합니다. 이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모든 현실을 은혜로 받아들이게 하는 것입니다.

 

 

출애굽은 예수님과 함께 동행 하는 것입니다.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에게는 하나님이 동행하셨습니다. 그 증거가 불기둥과 구름기둥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동행이 환경의 변화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동행의 의미는 하나님이 함께하셔서 살기 좋은 환경이 되게 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동행의 의미는 하나님이 붙들어 하나님이 뜻하시는 곳으로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끌어가시기 때문에 언약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동행은 수호신으로 우리를 도와주고 지켜주시는 의미가 아닙니다. 동행하시는 하나님으로 인해서 주어지고 되어진 모든 일을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사랑으로 바라보며 기뻐하고 감사하게 되는 것이 출애굽인 것입니다.

 

 

신자는 언약의 완성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언약의 백성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 깊이 생각하십시오. 단지 하나님이란 신을 믿는 것이 아니라 언약하시고 언약을 이루신 하나님을 믿는 것이 신자임을 생각하십시오.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우리가 할 일은 없습니다. 다만 언약을 이루신 하나님으로 인해 영원한 구원을 누리게 된 것을 감사하고 찬송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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