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016.10.29 16:50

(122강) 형제들의 불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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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50:15-18http://onlycross.net/videos/gen/gen-501518.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5.요셉의 형제들이 그들의 아버지가 죽었음을 보고 말하되 요셉이 혹시 우리를 미워하여 우리가 그에게 행한 모든 악을 다 갚지나 아니할까 하고

16.요셉에게 말을 전하여 이르되 당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명령하여 이르시기를

17.너희는 이같이 요셉에게 이르라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하셨나니 당신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인 우리 죄를 이제 용서하소서 하매 요셉이 그들이 그에게 하는 말을 들을 때에 울었더라

18.그의 형들이 또 친히 와서 요셉의 앞에 엎드려 이르되 우리는 당신의 종들이니이다

 

<설교>

야곱을 장사하고 난 뒤에 요셉의 형제들은 불안감에 빠지게 됩니다. 그것은 아버지가 죽었으니 요셉이 혹시 자신들을 미워하여 요셉에게 행한 모든 악에 대해 요셉이 갚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야곱이 죽고 없으니 요셉이 아버지 눈치 보지 않고 자기들에게 보복할 수 있다는 불안감에 빠진 것입니다.

 

 

사실 우리 역시 요셉 형제들의 처지에 있다면 요셉이 보복할 수 있다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요셉에게 행한 일은 결코 가볍다 할 수 없는 악행이었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자신들의 운명이 애굽 총리인 요셉의 생각과 말 한마디에 달려있음을 생각한다면 불안하게 되는 것이 당연하다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불안은 결국 요셉이 누구인지 요셉의 실체를 알지 못함으로 인한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창 45장에 보면 요셉이 형제들에게 자신의 정체를 밝히면서 자신에게 한 일로 인해 근심하지 말라고 합니다. 요셉이 자신에게 되어진 일들을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을 먼저 애굽에 보내신 것으로 믿었기 때문에 형제들을 미워하지도 않았고 따라서 보복할 생각도 없었던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라는 것이 요셉의 시각이었던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야곱 아들들의 잘못이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이 요셉을 시기하지도 않았고 죽일 생각도 없었는데 하나님이 요셉을 애굽으로 먼저 보내기 위해 야곱의 아들들에게 요셉을 시기하는 마음이 있게 하시고, 죽이고자 하는 악한 마음을 주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야곱의 아들들이 요셉을 시기한 것은 선악과 먹은 인간 본연의 마음에 의한 것입니다. 시기에 의해 요셉을 죽이고자 한 것 역시 아벨에 대한 가인의 마음에서 드러난 것처럼 인간 본연의 마음, 본성에 의해 드러난 것입니다. 따라서 요셉은 형제들의 악함으로 인해 버림을 받았고 애굽으로 팔려간 것입니다.

 

 

하지만 요셉은 그 모든 일을 하나님의 허용하심이라는 시각으로 바라봤습니다. 하나님이 허용하지 않았다면 형제들이 아무리 악행을 저질러도 애굽으로 팔리지는 않았다는 것이 요셉의 시각입니다. 그래서 요셉은 자신이 애굽으로 오게 된 것을 생명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일로 여겼고, 따라서 형제들에게 보복할 생각도 없었습니다.

 

 

요셉은 모든 일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바라봤습니다. 때문에 야곱의 생존 여부와 상관없이 형제들을 미워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야곱의 아들들은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들 스스로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지 못했고, 현실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바라보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요셉이 보인 것이 아니라 자신들을 미워하고 자기들이 행한 악에 대해 보복하는 요셉만 생각한 것입니다. 그들 의 사고방식으로는 그것이 당연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에 의해서 드러나는 기독교인의 불안감이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으로 살지 못하는 자신을 예수님이 미워하시고 징벌하시는 것은 아닌가?’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불안감이 있다는 것이야 말로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지 못하는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안다면 그러한 불안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행함이나 삶으로 인해 미워하시고 징벌하시는 분이라면 이 세상에 죄인의 몸으로 오지도 않았을 뿐더러 십자가에 피 흘려 죽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흘린 피 자체가 우리의 모든 악함을 덮으시고 용서하시는 사랑과 은혜인데 여전히 자기의 행함으로 인해 징벌 받을 것을 두려워하고 불안해한다면 단연코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요셉은 이미 형제들이 행한 일을 보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일만 생각할 뿐입니다. 애굽으로 팔린 것이 비록 요셉에게는 고난이었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기에 그 뜻에 순종할 뿐입니다. 그래서 요셉에게는 형제를 미워할 이유도 보복할 생각도 없었습니다. 이러한 요셉에게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으로써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자들을 용서하신 예수님을 엿볼 수 있습니다.

 

 

야곱의 아들들은 불안을 해결하기 위해 한 가지 방법을 찾습니다. 그것은 요셉에게 아버지가 마지막 죽기 전에 남긴 명령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요셉에게 전하는 야곱의 마지막 명령은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명령을 빙자해서 요셉으로 하여금 자신들의 죄와 허물을 용서하게 하려는 의도입니다.

 

 

그들은 요셉이 아버지의 마지막 명령이라고 하면 거역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물론 야곱은 그러한 명령을 남긴 적이 없습니다. 단지 야곱의 아들들이 불안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아버지의 명령을 멋대로 만들어 이용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중요하고 자기 인생이 중요하기 때문에 자기를 위해 아버지의 명령도 제멋대로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를 중심으로 성경을 보는 지금의 기독교인들과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고 보면 시대와 상관없이 인간 본연의 모습을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주일날 식당가는 것이 죄입니까? 기독교인이 술 마시고 담배 피는 것이 죄입니까?라고 묻기도 합니다. 성경 어디에도 이러한 문제를 두고 ‘죄다 죄가 아니다’라고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그러한 질문을 하는 것은 주일에 밥 사먹고 술 담배 하는 것에 대해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자기 편함을 위해서 자기중심으로 살아가는 것이고 이것 자체가 죄가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무엇을 하고 안하고와 상관없이 자기중심적인 존재이며, 그것으로 인간 자체가 죄라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주일에 음식을 사먹든 사먹지 않든, 술 담배를 하든 안하든 관계없이 악한 자일뿐입니다. 결국 인간은 모두가 심판을 받아야 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은 누구나 예수님의 용서를 말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용서를 받음으로 심판의 두려움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의도일 수 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원하지 않은 힘든 일을 겪게 되면 ‘예수를 믿으면 죄가 용서된다고 하셨는데 왜 이런 고통을 겪게 합니까?’라고 항변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 또한 자기중심적인 믿음입니다. 믿음을 빙자해서 자기 안전과 이익을 추구하는 것에 지나지 않기에 믿음이 아닌 것입니다.

 

 

야곱의 아들들은 자기 불안에서 벗어나는 것에만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행함을 두고 본다면 요셉의 미움을 받고 자신들이 행한 악을 요셉이 갚는다 해도 할 말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오히려 그들이 요셉에게 행한 일의 악함을 깊이 생각하다면 불안해하기보다는 자신들이 행한 일을 들고 요셉에게 나와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행한 악에 대해 어떻게 갚는다 해도 모든 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진심으로 요셉에 대한 자기의 악을 아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오로지 요셉이 악을 갚을 수 있다는 불안에서 벗어나는 것에만 관심을 두었습니다. 끝까지 자기중심의 모습만 보일 뿐이고 아버지의 명령 역시 자신들의 안전을 위해 마음대로 만들어 이용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벌 받지 않고 복만 받기를 원하지만 잊고 있는 것은 인간은 복을 누릴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오직 심판의 대상일 뿐입니다. 이것이 자신에게 주어져야 할 현실로 생각하고 예수님을 찾을 때 모든 죄와 허물을 용서해주심에 대해 감사함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명령을 빙자해서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고 한 아들들은 비록 요셉이 모든 허물과 죄를 용서한다고 해도 기쁨과 감사함보다는 자신들의 의도대로 된 것에 대한 안도감이 앞설 것입니다. 요셉이 형제들의 말을 듣고 운 이유가 그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들의 자기중심적 모습이 생명을 구원하시기 위해 요셉을 애굽으로 먼저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한 것이고 그로 인한 요셉의 애통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에게 불안할 것은 없습니다. 심판이 당연한 나 같은 자의 죄와 허물을 용서하신 예수님만 의지하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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