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016.11.05 02:20

(123강) 요셉의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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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50:19-21http://onlycross.net/videos/gen/gen-501921.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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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9.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20.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21.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설교>

솔로몬이 일천 번제를 드렸을 때 하나님이 ‘내가 너에게 무엇을 줄까 내게 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솔로몬이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구했을 때 하나님은 “자기를 위하여 장수하기를 구하지 아니하며 부도 구하지 아니하며 자기 원수의 생명을 멸하기도 구하지 아니하고”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사람은 세 가지를 추구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장수와 부와 함께 원수의 생명을 멸하는 복수가 그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3대 욕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원수를 멸하고 싶은 것이 누구에게나 있는 감정이고 욕구이기도 하기에 원수 관계에 있는 상대 또한 자신을 해할 것으로 짐작하고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야곱의 아들들에게서 이러한 모습을 확인했습니다.

 

 

야곱의 아들들은 자신들이 요셉에게 행한 악행으로 인해 미움을 받고 보복 받을 것을 두려워 했습니다. 그들은 야곱을 요셉의 보복으로부터 보호해줄 유일한 존재로 여겼는데 야곱이 죽고 사라지자 요셉의 보복을 막아 줄 방패가 없다는 생각으로 불안해 한 것입니다.

 

 

이들은 요셉이 그동안 야곱 때문에 자신들에게 보복을 하지 않았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요셉에 대한 오해일 뿐입니다. 요셉은 야곱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인해 보복을 하지 않은 것입니다. 보복을 하고 싶은데 참은 것이 아니라 아예 보복이라는 생각조차 없었습니다. 형제들의 악행으로 애굽에 팔렸다고 여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애굽으로 먼저 보낸 것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었기 때문에 형제들을 미워하고 악으로 갚을 이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신자가 세상을 요셉과 같은 시각으로 봐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요셉은 세상이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있음을 믿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애굽으로 가게 된 것도 형제들의 악행에 의한 것으로 보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으로 보게 된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신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되어진 일에 대해서는 지극히 세상적 시각으로 이해하고 판단합니다. 그렇게 때문에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과 동일한 방식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만약 누군가가 여러분을 비난한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반응할 것 같습니까? 당연히 미움이 생기고 악으로 갚고 싶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야곱의 아들들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생각하지 않고 눈에 보이는 현실을 전부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요셉의 시각으로 바라본다면 누군가가 자신을 비난할 때 그것을 자신을 보게 하는 기회로 여길 수 있습니다. 즉 자신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더욱 깊이 붙드시기 위한 하나님의 일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기에 미워하고 악으로 갚을 이유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20-21절에 보면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고 말합니다.

 

 

요셉은 형제들이 자신을 해하려고 한 일을 하나님은 선으로 바꾸셨다고 말합니다. 이 말을 잘못 이해하면 요셉에게 행한 형제들의 악한 일이 하나님에 의해서 선한 일이 되었다는 뜻이 됩니다.

 

 

그러면 야곱 아들들의 행위는 악한 일입니까 선한 일입니까? 야곱의 아들들이 요셉을 애굽에 팔았기 때문에 생명을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진 것이라면 야곱의 아들들이 한 일은 잘한 일일까요?

 

 

이러한 의미로 생각하게 되면 결국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판 것도 결과적으로 선한 일이라는 결론이 됩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았기 때문에 예수님이 붙들리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구원이 이루어졌다는 논리도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일이라면 신자는 안심하고 악을 행해도 되는 것일까요? 악을 행해도 하나님이 선으로 바꾸실 것이니까 자신의 악한 일에 대해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고 할 수 있습니까?

 

 

물론 하나님은 우리의 악함을 도구로 사용하여 일하시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하여 우리의 악함이 정당화 될 수는 없습니다.

 

 

인간은 존재 자체가 악하다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이것을 잊기에 특별히 악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고 생각되는 자신을 악인으로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의 아들들의 시각으로 자신과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모습에서 이미 악함이 드러납니다. 나를 미워하고 악으로 갚지 않을까 불안해하는 것도 죄의 모습이고 보복하고자 하는 것도 죄의 모습인 것입니다.

 

 

에베소서에서는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시고 부르신 이유를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삶의 이유와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는 것으로 향해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몸의 행복으로만 향해 있습니다. 이것이 악함입니다. 끊임없이 나의 사랑으로 나를 위해 살아가는 악함을 하나님은 선으로 바꾸십니다. 그것은 우리의 악함까지도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알아가는 일의 도구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은 생명의 구원입니다. 그리고 생명의 구원은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로 되어집니다. 생명의 구원을 위해 우리의 악함을 보게 하시며 하나님의 용서의 세계로 이끌어 가십니다. 이것이 우리의 악함을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일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악을 조장하지도 묵인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악을 심판으로 갚지 않으시고 선을 바꾸어서 용서의 은혜를 배우는 기회가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요셉은 간곡한 말로 형제를 위로하였습니다. 요셉의 위로는 단지 듣기 좋은 말을 한 것이 아닙니다. 요셉의 위로는 하나님의 사랑에 의한 것입니다. 악을 선으로 바꾸시며 생명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기에 형제들을 사랑으로 대한 것입니다. 따라서 요셉의 위로는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신자가 받는 위로도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죄인 된 나를 용서하시고 구원에 있게 하신 하나님의 크신 사랑이 위로입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선으로 바꾸어 생명을 구원하시는 크신 사랑이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야곱의 아들들처럼 자신의 행위가 미움과 악으로 갚아질 것을 염려한다면 당연히 위로는 없습니다. 불안과 두려움만 있을 뿐입니다.

 

 

현대의 기독교인들이 이러한 불안과 염려에 붙들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보지 못하고 자신의 행위만을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미움 받고 벌 받을 것을 예상하고 불안해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의 악함도 하나님은 선으로 바꾸신다는 것이 위로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해 우리 인생은 결국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는 길로 인도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19절을 보면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라고 말합니다. 형제들의 악을 도구 삼아 요셉을 애굽으로 보내시고 생명을 구원하시는 하나님만이 악에 대해 심판하실 수 있습니다. 악의 세력도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요셉은 자신이 하나님을 대신할 수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일은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섭리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겪게 되는 모든 일 또한 하나님의 섭리라는 시각에서 보게 되면 우리에게 해가 되고 고통이 되는 일들도 하나님은 선으로 바꾸신다는 시각으로 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러한 사람으로 만들어 가십니다. 그래서 신자에게 모든 일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에 붙들린 신자이기에 모든 일에서 사랑이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위로를 얻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세상에는 위로가 없습니다. 신자에게 위로는 오직 하나님의 용서의 사랑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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