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016.11.12 16:59

(124강) 요셉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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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50:22-26http://onlycross.net/videos/gen/gen-502226.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22.요셉이 그의 아버지의 가족과 함께 애굽에 거주하여 백십 세를 살며

23.에브라임의 자손 삼대를 보았으며 므낫세의 아들 마길의 아들들도 요셉의 슬하에서 양육되었더라

24.요셉이 그의 형제들에게 이르되 나는 죽을 것이나 하나님이 당신들을 돌보시고 당신들을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하고

25.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당신들을 돌보시리니 당신들은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

26.요셉이 백십 세에 죽으매 그들이 그의 몸에 향 재료를 넣고 애굽에서 입관하였더라

 

<설교>

창세기는 요셉이 110세에 죽는 것으로 끝납니다. 30세에 총리가 되고 80년 동안 총리로 지냈다면 부귀와 권세를 누렸음을 생각할 수 있고, 더불어 요셉의 형제들도 애굽 땅에서 편한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비록 야곱이 죽은 후에 요셉이 자신들을 미워할 것으로 생각하여 불안한 마음도 있었지만 그 또한 요셉이 형제들을 위로함으로 해결되었기에 평안한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형제들의 입장에서는 요셉이 자신들보다 오래 사는 것이 유익이었을 것입니다. 요셉이 생존해 있는 동안에는 총리의 권세 아래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요셉을 형제들보다 먼저 데려가십니다. 이처럼 요셉의 형제들은 전혀 배려하지 않으시는 것 같은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면서 하나님의 생각은 언제나 우리의 생각에서 벗어나 있음을 실감하게 됩니다.

 

 

24절에 보면 “요셉이 그의 형제들에게 이르되 나는 죽을 것이나 하나님이 당신들을 돌보시고 당신들을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하고”라고 말합니다.

 

 

형제들의 입장에서는 총리인 요셉이 자기들 곁에 있는 것이 든든한 힘이었을 것입니다. 총리인 요셉이 자기들 곁에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는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애굽에서의 자신들의 입지로 인해 불안감이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요셉은 형제들에게 자신이 죽을 것이라고 하면서 하나님이 당신들을 돌보시고 애굽에서 인도하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실 것을 말합니다.

 

 

요셉은 어떤 의미로 하나님이 당신들을 돌보신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남기는 것일까요? 어찌 생각하면 신앙인으로서 당연한 말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요셉의 말이 여러분께는 어떻게 다가옵니다. 신자라면 누구나 하나님이 나를 돌보신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대개의 경우 그것은 막연한 생각에 그칠 뿐 하나님의 돌보심을 믿는 믿음에 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당신들을 돌보신다는 말은 지금까지는 요셉에 돌봐줬지만 요셉이 죽은 후에는 하나님이 돌보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요셉이 살아있든 죽었든 상관없이 요셉의 형제들을 돌보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도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 곁에 누가 있건 상관없이, 우리의 수중에 무엇이 있든 상관없이 우리를 돌보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돌보심을 현실에서 실감하십니까?

 

 

우리는 하나님이 돌보신다는 것을 내가 원하고 바라는 대로 일이 잘 되는 것에서 찾습니다. 때문에 자신의 모든 삶에서 하나님의 돌보심을 실감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일이 있거나 타인보다 잘 됐다고 생각되는 일에서 하나님의 돌보심을 생각하는 수준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곁에 있던 것들이 없어지면 염려하게 되고 불안감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돌보심을 믿지 않은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돌보심에 대한 이해입니다. 대개는 하나님의 돌보심을 삶을 돌봐주시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아무 어려움 없이 잘 살도록 도와주시는 것을 돌보심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해 때문에 평안히 잘 살면 하나님이 돌보신다고 생각하지만 평안치 못한 형편에서는 하나님의 돌보심을 실감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돌보심은 육신의 삶에 국한되어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원한 편안한 삶을 살도록 돌봐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하나님의 돌보심이 편한 삶으로 나타난다면 인생은 편히 살았다는 것이 전부일 것입니다. 편히 산 것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증거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믿음과 상관없이 편한 삶을 누리는 것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또한 하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이 편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님을 생각한다면 하나님의 돌보심은 육신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결국 믿음을 육신의 문제와 연결하여 이해하려는 것이 문제입니다. 교회도 기독교인들도 하나님이 이루시는 하나님의 일에 마음을 두는 것이 아니라 자기 문제에만 관심을 집중하고 있기 때문에 성경의 모든 말씀들을 육신의 유익에 대입하여 해석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요셉의 형제들을 돌보시는 것은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약속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돌보심인 것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오게 되고 약속하신 땅에 들어가게 된 모든 일에 이스라엘의 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잘함을 보시고 언약을 이루신 것이 아니라 언약을 보시고 언약을 이루신 것뿐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역할은 약속의 땅에 들어갈 자격이 없는 존재가 하나님의 돌보심으로 들어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25절을 보면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당신들을 돌보시리니 당신들은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고 말합니다.

 

 

요셉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돌보심으로 약속하신 땅에 이르게 하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갈 때 자신의 해골을 메고 올라갈 것을 맹세시킵니다. 그리고 이 맹세대로 이스라엘 자손에 요셉의 해골을 메고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게 됩니다(수 24:32).

 

 

야곱은 죽은 후에 막벨라 굴에 장사 지내달라고 했는데 요셉은 약속의 땅으로 갈 때 해골을 메고 가서 거기에 묻어 달라고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죽은 몸이 어디에 묻히든 구원과는 상관없습니다. 그런데도 굳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에 묻히고자 하는 것은 죽은 몸일지라도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고 싶은 소망으로 해석해 볼 수 있습니다.

 

 

요셉은 인생을 죽으면 끝나는 것으로 보지 않은 것입니다. 죽은 몸으로라도 하나님의 언약이 이루어질 날을 소망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야곱이나 요셉의 죽음 이후에라도 포기할 수 없는 소망입니다. 따라서 야곱이나 요셉의 소망은 하나님의 언약 성취로 향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육신의 문제가 해결되고 잘 되는 것이 소망이 아니라 언약이 이루어지고 완성된 그 날을 죽음이후에도 여전히 기다리는 소망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를 바라보고 믿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언약의 성취에 대해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확인하지도 못한 상태에 그대로 될 것을 믿고 기다리고 소망하는 것이기에 간단하지 않은 것입니다. 무엇보다 우리에게는 육신으로 부딪히고 살아가는 현실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지금 당장 급하고 필요한 것은 현실의 문제이지 언약의 성취가 아니라는 것이 우리의 생각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하늘로 가신 시대에 존재합니다. 즉 언약이 성취된 시대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언약의 성취로 이루어진 영원한 생명의 영광이 온전히 드러나는 그 날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 날은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날이고 반드시 그 날은 올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불확실한 것을 맹목적으로 믿고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성취된 언약을 믿으며 가장 확실한 것을 마음에 두고 그 날을 소망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죽음 이후에까지 계속되는 소망입니다.

 

 

그러므로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를 하나님이 돌보시는 것은 현재의 삶에 붙들리지 않고 세상에 취하지 않고 언약대로 될 끝 날을 바라보게 하시며 예수님의 생명 사건에 붙들어 놓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에 영광의 나라에 이르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돌보심입니다. 신자는 이러한 하나님의 돌보심 아래 있기에 현재의 삶에 대해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창세기를 마치면서 우리 모두 언약하신 대로 이루시는 하나님의 돌보심 아래 있음을 믿게 되고, 그 믿음이 우리를 다스리고 이끌어 가심으로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하게 되는 것에 모든 소망을 두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복 있는 신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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