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2014.10.19 09:52

(1강) 하늘이 열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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겔 1:1-3http://onlycross.net/videos/eze/eze-010103.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 서른째 해 넷째 달 초닷새에 내가 그발 강 가 사로잡힌 자 중에 있을 때에 하늘이 열리며 하나님의 모습이 내게 보이니

2 여호야긴 왕이 사로잡힌 지 오 년 그 달 초닷새라

3 갈대아 땅 그발 강 가에서 여호와의 말씀이 부시의 아들 제사장 나 에스겔에게 특별히 임하고 여호와의 권능이 내 위에 있으니라

 

 

<설교>

 

◉ 에스겔서의 배경 ◉

 

 

에스겔은 대하기가 만만치 않은 성경 중의 하나입니다. 내용이 소위 묵시문학이란 형태로 상징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계시하는 것으로 주를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48장으로 구성되어 있는 까다로운 에스겔서를 바르게 해석하는 것은 에스겔의 시작부터 끝까지 설교자로서 긴장감을 놓을 수 없는 어려운 작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에스겔 또한 하나님이 주시는 계시이며 계시의 중심에 그리스도가 있음을 생각한다면 결국 에스겔서의 해석의 방향은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것으로 향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이점을 염두에 두고 에스겔이 선포한 말씀의 세계로 들어간다면 적어도 전혀 다른 방향으로 치우치는 일은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먼저 1절의 “서른째 해 넷째 달 초닷새에 내가 그발 강 가 사로잡힌 자 중에 있을 때에 하늘이 열리며 하나님의 모습이 내게 보이니”라는 내용을 보면, 에스겔은 사로잡힌 자 중의 한 사람입니다. 즉 에스겔은 바벨론에 의해서 예루살렘이 망하기 직전 포로로 끌려온 백성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에스겔이 활동한 시기는 기원전 594년에서 571년입니다. 예루살렘이 멸망당한 때가 기원전 587년임을 생각하면 에스겔은 예루살렘이 멸망하기 전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에 2차로 끌려 올 때 함께 끌려 왔으며 끌려 온지 수년 후에 하나님에 의해 환상을 보게 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제사장이었던 서른 살의 에스겔을 사로잡혀간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한 선지자로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방 나라의 포로가 되게 하고 70년이라는 고통의 세월을 보내도록 하셨지만 에스겔이라는 선지자를 준비해 놓으셨던 것입니다. 다니엘 또한 바벨론으로 끌려간 포로였음을 생각해 보면 예루살렘 멸망과 포로 생활이라는 암울한 환경에서도 하나님은 말씀을 준비하셨고, 말씀은 멈춘 적이 없고 여전히 힘 있게 역사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점을 근거하여 생각해 보면 예루살렘의 멸망과 70년의 포로 생활은 유다 백성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지기 위한 또 다른 통로였다는 답을 내릴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멸망과 포로 생활이라는 고통의 현실에서도 하나님의 은총은 배제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은총을 깨닫게 되는 것이 현실에 역사하는 하나님의 계시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참고로 에스겔서는 이사야서, 예레미야서, 예레미야 애가, 다니엘서와 함께 대선지자로 분류되고 있습니다. 선지서는 대선지서 소선지서로 분류하는데 대선지서는 소선지서보다 내용이 더 중요하고 선지자 역시 비중이 크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기록된 분량의 적고 많음에 따라 분류한 것뿐입니다.

 

 

◉ 사로잡힘 ◉

 

 

지금까지 에스겔서의 배경이라고 할 수 있는 에스겔이 처한 상황에 대해 말씀 드렸는데, 여기서 어려운 점은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오늘 우리의 현실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로잡힌 자 중에 있던 에스겔을 세워서 사로잡혀 있는 백성들에게 말씀 하십니다. 따라서 에스겔서의 말씀이 우리를 향한 말씀으로 다가오고 그 말씀 안에서 하나님을 알고자 한다면 우리가 사로잡혀 있는 이스라엘 백성과 동일한 처지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 전제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사로잡혀 있지 않습니다. 정치적, 경제적으로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과는 분명 다른 환경에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이 사로잡힌 자라고 생각하십니까? 어쩌면 ‘나는 무엇에도 사로잡혀 있지 않고 내 뜻대로 자유롭게 살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실상을 제대로 보지 못한 큰 착각일 뿐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자신을 사로잡힌 자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에스겔서는 여러분의 현실과는 무관한 내용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습니다.

 

 

계 21:6절에 보면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목마른 자란 단순히 갈증을 느끼는 정도가 아니라 물이 없어 죽을 지경에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들에게 샘물은 생명수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도 값없이 주는 생명수라면 그 생명수를 주시는 분을 향한 감사함이 없을 수 없습니다. 또한 그 샘물이 자신을 살렸음을 실감할 것입니다.

 

 

그러나 목마름이 없다면 샘물은 관심의 대상이 아닙니다. 샘물이 생명수라는 사실도 잊게 됩니다. 결국 목마르지 않은 상태의 사람에게 샘물을 넘치도록 부어준다고 해도 땅으로 쏟아지고 땅에 스며들어 곧 말라버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로잡힘이라는 실상에 대해 눈을 뜨지 못한다면 우리는 목마르지 않은 자로 말씀을 대하는 것이 되고, 결국 에스겔서는 의미 없는 샘물이 되어 땅에 쏟아져 말라버리는 결과만 초래할 뿐입니다.

 

 

예수님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2)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말을 들은 유대인들은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롭게 되리라 하느냐”(요 8:33)라고 반문합니다.

 

 

예수님은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고 답하십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죄에 사로잡힌 죄의 종의 상태에 있음을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자신들이 죄의 종이라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면 우리 역시 죄의 종이라는 상태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매일 죄 속에서 죄를 범하는 것이 우리의 실상이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이 멸망하고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간 것 역시 죄를 범한 결과임을 생각하면 바벨론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죄의 세력에 사로잡혀 있는 그들의 실상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포로 됨은 단순한 징벌의 차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에스겔의 실상과 오늘 우리의 실상은 정치, 경제적인 시각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죄의 시각에서 바라봐야 하고, 그렇게 본다면 이스라엘과 우리의 처지가 서로 다르다고 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정리하자면 하나님은 제사장이었던 에스겔을 바벨론에 사로잡혀 가게 하셔서 사로잡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로 세우셨습니다. 즉 사로잡힌 자들을 위해 에스겔을 사로잡혀 가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이 같은 하나님의 일을 만날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의 사로잡힘을 보여줍니다. 죄에게 사로잡혀 있는 자기 백성의 구원을 위해 예수님이 친히 사로잡혀서 죽으시는 길로 가신 것입니다. 따라서 십자가는 자신이 사로잡힌 자라는 것을 알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단지 구원의 한 수단으로만 여겨질 뿐이지만, 자신이 사로잡혀 있음을 실감하는 사람에게는 십자가에서 자유를 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에스겔을 시작하면서 여러분이 스스로에 대해 분명히 자각하셔야 하는 것은 우리 모두가 죄에 사로잡힌 자라는 사실입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내 자신에게 사로 잡혀 있습니다. 때문에 나를 향한 욕망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래서 나의 현실과 무관하다고 여겨지는 말씀에 대해서는 마음이 끌리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의 모습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곧 사로잡힌 자라는 실상을 자각할 때 성경의 모든 말씀이 나에게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열린 하늘 ◉

 

 

1절에서 에스겔은 하늘이 열리며 하나님의 모습이 내게 보였다고 말합니다. 이 내용을 문자 그대로 상상해 본다면 에스겔은 참으로 신비롭고 놀라운 장면을 목격한 사람입니다. 하늘이 열리면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모습을 보게 된다는 것은 참으로 놀랍고 신비로운 체험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마 평생토록 잊지 못할 체험으로 남게 될 것입니다.

 

 

에스겔도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모습을 보게 된 것은 생전 처음 있는 경험일 것입니다. 우리 역시도 에스겔과 같은 신비적인 경험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모습을 보게 된 에스겔의 경험은 에스겔 한 사람의 경험으로 끝나는 것일까요? 그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모습을 보게 하신 것은 포로로 끌려와 고통 가운데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에스겔이 본 하늘의 세계로 이끌기 위해서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에스겔은 문자적 내용 그대로를 경험한 것은 아닙니다. 하늘이 열렸다고 하는데 과연 하늘이 어떤 식으로 열렸을까요? 마치 문이 열리는 것처럼 하늘이 둘로 나눠지면서 하늘 보좌에 앉아 계시는 하나님을 실제로 목격했다는 의미일까요? 하늘은 우리가 상상하는 그런 상태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상상하는 하늘에 대한 모든 것은 내가 보지 못한 세계를 나의 호기심과 기대와 욕망에 의해서 그려지는 하나의 그림과 같은 것일 뿐입니다.

 

 

하늘은 세상이 알 수 없는 참된 생명이 감추어져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런 점에서 하늘은 세상과는 다른 세계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하늘은 하나님이 계신 곳입니다. 물론 ‘곳’이라고 말하는 것은 장소적인 개념에 의한 표현은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다스리시는 상태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하늘은 세상과는 다른 나라입니다. 세상의 방식과는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기에 세상은 전혀 알 수 없고 짐작조차 할 수 없는 나라입니다. 그처럼 하나님이 계신 그 하늘이 열려서 에스겔에게 보여진 것입니다. 이것이 과연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스라엘은 스스로 하나님을 신앙한다는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은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나라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도 생각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이방나라처럼 사는 것이었을 뿐입니다. 그것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이방의 우상을 받아들여 섬긴 것입니다. 이들에게는 하나님의 함께 하심 또한 자신들이 원하는 나라로 만들어 주는 것일 뿐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세워지는 그 나라가 어떤 나라인가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이스라엘다움이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도 관심도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 역시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처럼 하나님이 나의 일을 도우시고, 문제가 있을 때 해결해 주시고, 나의 소원을 이루어주기 위해 함께 하시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까?

 

 

 대개의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을 신앙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란 이름의 우상을 끌어안고 있는 것일 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는 하나님을 열심히 신앙한다고 착각하는 것이야 말로 자신에게 사로잡혀 있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다스리신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다스림에 순종함으로 나타나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한 세상과는 전혀 다른 삶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세상과는 다른 나라의 삶을 세상에 나타내기 위해 자기 백성을 택하시고 부르시며 그들 가운데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세계에 마음을 둔 것이 아니라 이방인을 보면서 세상 나라의 삶을 살고자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이방인보다 더 악을 행한 것으로 여기시고 이스라엘을 이방 나라의 포로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겔 5:5-6).

 

 

그렇게 볼 때 에스겔에게 하늘을 열어 하나님의 모습을 보게 하신 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하늘이 세상 나라와 어떻게 다른 나라인가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타내고자 하시기 위해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늘나라를 보게 하심으로 그들이 원했던 세상 나라의 헛됨을 깨닫게 하시고 마음을 온전히 하나님께로 돌이키며 하나님께만 소망 두는 백성으로 세우고자 하신 것이 에스겔을 선지자로 세우신 이유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 특별한 일 ◉

 

 

3절을 보면 “갈대아 땅 그발 강 가에서 여호와의 말씀이 부시의 아들 제사장 나 에스겔에게 특별히 임하고 여호와의 권능이 내 위에 있으니라”고 말합니다.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모습이 보였을 때 에스겔에게는 여호와의 말씀이 임했습니다. 나 에스겔에게 특별히 임했다는 것은 자신이 특별한 존재이기 때문에 자신에게만 특별히 말씀이 임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는 것 자체가 특별하다는 뜻입니다. 말씀이 임하여 말씀을 깨닫고 하나님이 하늘을 여시고 보여주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알게 되는 그것보다 특별한 일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자가 말씀을 대하고 말씀에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아가며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나라에 대해 눈이 열리고 그 나라를 마음에 두게 되고 소망하게 된다면 하나님께서 이미 그에게 특별한 일을 경험하게 하신 것이 됩니다. 즉 에스겔의 경험과 동일한 위치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늘 보이는 세상에 사로 잡혀 있기에 하나님의 특별한 일 조차 세상일을 통해서 확인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신자 됨은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 됨은 흔히 생각하는 도덕적인 삶과는 무관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도덕적인 삶을 산다면 지금처럼 기독교가 비난받지는 않을 것이고 ‘신자답다’는 인정을 받을 수는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알지 못한 세상은 무엇이 신자다운 것인가를 모릅니다. 신자다움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백성의 모습이 무엇인가를 통해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겔 37장에 보면 에스겔서에서 가장 유명하다고 할 수 있는 마른 뼈가 살아나는 환상에 대한 내용이 있습니다. 마른 뼈가 살아난 것은 살 가능성이 없는 죽은 자가 살아난 것을 의미합니다. 마른 뼈의 환상이 의미하는 것은 자기 이름을 위해 살아가는 것 밖에 몰랐던 이스라엘이 자신들이야 말로 죽은 존재였음을 알고, 죽은 존재인 자신들을 살리신 하나님의 그 이름을 높이는 자 되게 하는 것에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하늘나라입니다.

 

 

말씀은 우리에게 하늘을 열어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하늘나라를 보게 합니다. 그 나라는 나의 이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만 높여지고 하나님만 영광 받으시는 나라입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사로잡힌 우리를 자유하게 하시고, 죽은 우리를 살리신 하나님의 권능 보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만을 노래하게 되는 그것이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하늘의 세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