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2014.11.02 09:53

(3강) 네 생물과 바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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겔 1:15-21http://onlycross.net/videos/eze/eze-011521.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5 내가 그 생물들을 보니 그 생물들 곁에 있는 땅 위에는 바퀴가 있는데 그 네 얼굴을 따라 하나씩 있고

16 그 바퀴의 모양과 그 구조는 황옥 같이 보이는데 그 넷은 똑같은 모양을 가지고 있으며 그들의 모양과 구조는 바퀴 안에 바퀴가 있는 것 같으며

17 그들이 갈 때에는 사방으로 향한 대로 돌이키지 아니하고 가며

18 그 둘레는 높고 무서우며 그 네 둘레로 돌아가면서 눈이 가득하며

19 그 생물들이 갈 때에 바퀴들도 그 곁에서 가고 그 생물들이 땅에서 들릴 때에 바퀴들도 들려서

20 영이 어떤 쪽으로 가면 생물들도 영이 가려 하는 곳으로 가고 바퀴들도 그 곁에서 들리니 이는 생물의 영이 그 바퀴들 가운데에 있음이니라

21 그들이 가면 이들도 가고 그들이 서면 이들도 서고 그들이 땅에서 들릴 때에는 이들도 그 곁에서 들리니 이는 생물의 영이 그 바퀴들 가운데에 있음이더라

<설교>

 

에스겔은 열린 하늘을 통하여 하나님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것은 에스겔에게 하나님의 존재를 확인시켜주신 것과도 같습니다.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주신 것은 당시 이스라엘의 상황에서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는 하나의 국가가 멸망하면 그 국가가 섬기던 신의 존재성 또한 무너지게 됩니다. 신의 존재 자체가 부정되는 것입니다. 이유는 자신을 섬기는 국가를 보호하지 못하고 멸망하게 하는 신은 신으로 인정될 수 없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고대 사회에서 신은 수호신으로 섬김 받았습니다. 현대 사회에서도 많은 사람들은 신을 수호신의 의미로 섬깁니다. 자신과 자신의 가정을 지키고 보호해주기를 원하는 목적으로 신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정에 큰 환난이 있게 되면 그동안 섬겨왔던 신의 존재에 대해 혼란이 있게 되는 것은 자연스런 반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을 섬기면서 가졌던 기대가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에스겔 당시 예루살렘이 황폐화되고 백성은 포로로 사로잡혀 바벨론으로 끌려와 있는 상황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강한 신뢰를 유지한다는 것은 힘든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이 이방 나라의 포로가 되었다는 것은 큰 충격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상황을 본 이방 나라 역시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무시할 것이 당연합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주신 것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확신할 수 없는 상황에서 하나님은 존재하시며 이스라엘에게 함께 하셨음을 보여주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당시 바벨론에는 여호야긴 왕도 사로잡혀 와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비록 예루살렘에 시드기야가 왕의 자리에 있었지만 그는 바벨론에 의해 세워진 왕이었기 때문에 포로로 잡혀 온 유다 귀족들은 여호야긴을 여전히 왕으로 인정하는 분위기였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을 제대로 다스리고 인도할 왕이 없는 상태에서 하나님의 모습을 보게 된 것은 하나님이 여전히 이스라엘을 다스리고 계셨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즉 5년여 세월 동안 포로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에 대해 가졌던 의문들이 모두 해소되는 하나님의 확실한 응답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존재가 확인되었다면 남은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이 존재하시고 이스라엘의 왕으로 다스리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왜 이 같은 사태가 발생하게 된 것인지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누구시고 어떤 뜻을 가지고 이스라엘을 다스리시는지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을 바벨론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단순히 바벨론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면 고통이 끝났다는 기쁨으로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을 감사하고 찬양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고통에서 해방되었다는 것으로 인한 기쁨이고 감사이기 때문에 또 다시 고통을 접하게 된다면 기쁨과 감사는 사라지고 원망과 불평으로 되돌아갈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존재하시고 이스라엘의 왕으로 다스리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포로가 되고 예루살렘이 황폐화 되게 하신 내막에 대해 알아야 했던 것입니다. 그래야 이스라엘이 그동안 하나님을 잘못알고 있었으며 하나님을 섬긴다고 했지만 실상은 하나님을 반역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지기 때문입니다.

 

 

에스겔은 바벨론의 그발 강가에서 하나님의 모습을 보게 되고 말씀이 임하는 것과 여호와의 권능이 자기 위에 함께 하고 있음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지난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네 생물의 형상을 보게 됩니다. 이 또한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대한 전통적 생각에 어긋나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오직 성전의 지성소에만 임재 해 계시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성전이 하나님이 임재 하여 계시는 영광의 장소였습니다. 그런데 그발 강가에서 하나님의 모습을 보게 되고 네 생물의 형상을 본 것은 이방 나라 바벨론에 하나님이 임재 하셨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네 생물은 그룹, 즉 천사입니다. 그룹은 지성소 언약궤의 속죄소를 감싸고 있는 천사이며, 계시록에서는 하나님의 보좌에서 하나님을 수종드는 존재입니다. 따라서 네 생물이 하나님의 모습에 함께 나타나는 것은 보좌에 계신 하나님이 바벨론의 그발 강가에 임재 하셨음을 의미하는 것이 됩니다. 이방 나라 바벨론에서 고통을 당하는 그 곳에도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함께 하시고 이스라엘을 다스리고 계셨던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이라는 곳에 고정되어 계시는 분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성전에 고정되어 계시는 분으로 아는 것과 온 우주 만물 어디에도, 심지어 우리가 생각할 때 하나님이 계시지 않을 것이라고 여겨지는 모든 곳에도 하나님이 계신다고 아는 것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하나님을 성전에 고정되어 계시는 분으로 여기게 되면 인간은 정해진 날에 자신의 발로 하나님이 계신 성전으로 가서 제물을 바치며 섬겨주면 되는 것을 신앙으로 간주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성전에서 인간이 찾아오기를 기다리고, 성전에 와서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원하고, 많은 제물을 정성껏 바치기를 원하는 신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성전 신앙이었고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었습니다.

 

 

지금의 기독교인들의 신앙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예배당이든 하늘이든 고정된 분으로 인식하고 신앙을 주일이라는 거룩한 날에 교회에 와서 예배하고 정성껏 제물을 바치고 하나님께 헌신한다는 명목으로 교회에서 부지런히 봉사하는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생각이라는 것을 본문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15절에 보면 세 생물들 곁에 있는 땅 위에 바퀴가 있는데 네 얼굴을 따라 하나씩 있고 바퀴 안에는 또 바퀴가 있는 것 같고 네 생물이 갈 때는 바퀴도 곁에서 같이 가고 네 생물이 서면 바퀴도 선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네 생물과 바퀴는 절대로 독자적으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20절에 보면 영이 등장하고, 영이 움직이는 방향으로 네 생물과 바퀴가 움직이는 것입니다. 영이란 하나님의 영, 즉 성령을 의미합니다.

 

 

18절에 보면 바퀴의 네 둘레로 돌아가면서 눈이 가득하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세상의 모든 일을 보고 살피시고 알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처럼 눈이 가득한 바퀴가 네 생물과 함께 하나님의 영에 따라 움직인다는 것은, 세상의 모든 일을 살피시고 아시는 하나님이 천사를 동원하여 움직이고 일하고 계심을 말해 줍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천사를 동원하여 하나님의 뜻에 따라 움직이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계신다면 우리는 무슨 생각을 버려야 할까요? ‘하나님은 인간을 통해 일하신다’는 이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신자를 세상에 세워서 하나님이 이루고자 하시는 일을 맡기시고 그 일을 잘 할 수 있도록 힘과 능력을 주셨기 때문에 인간은 사명감을 가지고 하나님이 맡기신 일을 이루기를 힘써야 한다는 그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고정된 분으로 여기게 되면 결국 인간이 일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굳어지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어디엔가 고정되어 계시는 분이고, 하나님이 이루고자 하시는 일을 인간에게 맡기셨기 때문에 인간이 부지런히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그것이 바로 인간의 악한 생각인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에는 인간이 움직여서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을 인간에게 맡겨서 이루시고자 할 만큼 인간이 믿을 만한 존재라고 생각합니까? 인간은 하나님이 맡기신 선악과도 온전히 지키지 못했습니다. 자신의 뜻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은 잊어버리는 것이 인간입니다. 이러한 인간이 하나님의 뜻대로 가고 서고하면서 온전히 하나님의 뜻만을 이룬다는 것은 도무지 인간에게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이 움직이시고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내가 움직여서 될 일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럼 아무것도 하지 말란 말인가’라고 반발하기 전에 ‘내가 하나님의 뜻에만 순종하고 진심으로 하나님을 위해 일할 수 있는 존재인가?’부터 생각하십시오. 그런데도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드신다면 지금 여러분의 삶이 과연 누구의 뜻을 따라 움직이고 있는지 보십시오.

 

 

 천사와 바퀴는 하나님의 영을 따라 움직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내 속에 자리하는 내 욕망에 따라 나를 위해 움직이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을 위해 일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인간의 완악함일 뿐이며 그것이 곧 죄가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위해 일한다고 생각하게 되면 그것을 복의 당위성으로 삼게 됩니다. 하나님을 위해 일했으니 복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이 원하는 선한 대접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죄인이라는 의식이 있을 리 만무합니다. 오히려 죄인이라는 말에 ‘나는 아니다’라고 반발할 것이 뻔합니다. 이들이 바로 이스라엘이었고 오늘 우리들이기도 합니다.

 

 

렘 16:10절에 보면 “네가 이 모든 말로 백성에게 말할 때에 그들이 네게 묻기를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이 모든 큰 재앙을 선포하심은 어찌 됨이며 우리의 죄악은 무엇이며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범한 죄는 무엇이냐 하거든”라고 말씀합니다.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외쳤을 때 그들의 반응은 ‘우리가 여호와께 범한 죄가 무엇이냐’라며 크게 반발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재앙을 내려야 할 만큼 죄를 범한 것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너희가 너희 조상들보다 더욱 악을 행하였도다 보라 너희가 각기 악한 마음의 완악함을 따라 행하고 나에게 순종하지 아니하였으므로”(렘 16:12)라고 말하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이 우상을 섬겼던 그들의 조상보다 더욱 악을 행한 것으로 선언하신 것은 그들이 악한 마음의 완악함을 따라 행함으로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과연 이들과 다르다고 할 수 있을까요?

 

 

우리 역시 마음의 완악함을 따라 행하면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움직이시는 하나님 앞에 가만히 있으라는 것은 단지 아무것도 하지 말고 있으라는 뜻이 아니라 심판이 당연한 죄인으로 나아와 가만히 있으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악함을 보지 못하거나 인정되지 않는 사람에게는 이것이 신앙으로 이해되지 않을 것입니다. 부지런히 움직이고 일을 하는 것을 신앙으로 간주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악함을 알고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는 완악한 마음으로 살고 있음을 안다면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감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없는 것이 자신의 완악함이고 현실임을 직시하기 때문입니다.

 

 

신자들이 가지는 환상 중에 하나는 자기 신앙을 하나님께 인정받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인정받는 신앙이라면 구원과 복 모든 것이 확보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하나님이 우리의 신앙을 인정해 주신다는 외적인 증표가 없습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하나님이 인정하실 만한 신앙의 수준을 세우고 그 수준에 도달하기를 힘쓰기도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어떤 경우에도 우리의 신앙이 하나님께 인정되는 일은 없습니다. 인정받기 위해 행하는 그 모든 것이 오히려 악할 뿐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모든 것이 부인되는 가운데 하나님 알에 나와 있게 되면 나로부터 나오는 움직임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주어진 구원에 놀라게 되는 것입니다.

 

 

뜻밖에 놀라운 일을 당했을 때 ‘어안이 벙벙하다’는 표현을 쓰게 됩니다. 우리의 구원이 바로 그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구원 받을 만하다는 예측을 가지고 있다면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 놀라워하지도 감격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결코 구원 받을 수 없는 것이 자신의 처지고 위치고 현실임을 안다면 오로지 하나님의 움직이심으로 인해 선물로 주어진 구원으로 인해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를 하나님 앞에 나오게 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스라엘 또한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에 눈을 뜨는 백성으로 세우시기위해 바벨론으로 밀어 붙인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의 행함을 보면서 감동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중국음식점 배달원으로 일하면서도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을 도와주다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분의 이야기나, 형편이 어려운 미화원이 길에서 돈 뭉치를 주워 주인을 찾아준 이야기나, 평생 모은 돈을 학교에 기부한 할머니 등의 이야기를 대하면서 감동을 합니다. 그런데 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아들을 보내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신 하나님의 구속의 이야기는 덤덤하게 다가오는 것일까요?

 

 

만약 재벌이 어려운 사람을 도와줬거나 돈을 주워 돌려줬다면 감동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남을 도울 수 있는 조건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도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쉽게 하나님이 뜻만 세우시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구원에 대해 덤덤해질 것입니다. 또 한편으로 구원을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면 역시 구원에 대한 감동과 감사는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아들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졌습니다. 아들의 희생에는 아들을 버리시는 아버지의 아픔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아픔과 희생을 우리를 위해 감당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그 같은 은총을 받을 자격이 없는 우리에게 크신 은총과 은혜를 베푸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나와서 죄인 됨을 확인한 신자에게서 나올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감사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움직여야, 즉 행함이 있어야 신앙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물론 우리는 늘 움직이고 행동하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우리의 모든 움직임의 중심에는 나 자신이 있습니다. 오직 날 위해 행동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런 우리에게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움직이는 천사를 보여줍니다. 내가 일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일하셨고 하나님의 일하심으로 인해 지금의 내가 존재하고 있음을 알라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