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2014.11.09 09:37

(4강) 구름에 있는 무지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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겔 1:22-28http://onlycross.net/videos/eze/eze-012228.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22 그 생물의 머리 위에는 수정 같은 궁창의 형상이 있어 보기에 두려운데 그들의 머리 위에 펼쳐져 있고

23 그 궁창 밑에 생물들의 날개가 서로 향하여 펴 있는데 이 생물은 두 날개로 몸을 가렸고 저 생물도 두 날개로 몸을 가렸더라

24 생물들이 갈 때에 내가 그 날개 소리를 들으니 많은 물 소리와도 같으며 전능자의 음성과도 같으며 떠드는 소리 곧 군대의 소리와도 같더니 그 생물이 설 때에 그 날개를 내렸더라

25 그 머리 위에 있는 궁창 위에서부터 음성이 나더라 그 생물이 설 때에 그 날개를 내렸더라

26 그 머리 위에 있는 궁창 위에 보좌의 형상이 있는데 그 모양이 남보석 같고 그 보좌의 형상 위에 한 형상이 있어 사람의 모양 같더라

27 내가 보니 그 허리 위의 모양은 단 쇠 같아서 그 속과 주위가 불 같고 내가 보니 그 허리 아래의 모양도 불 같아서 사방으로 광채가 나며

28 그 사방 광채의 모양은 비 오는 날 구름에 있는 무지개 같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의 모양이라 내가 보고 엎드려 말씀하시는 이의 음성을 들으니라

 

 

<설교>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방식은 우리의 생각과는 전혀 다르게 펼쳐집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생각이 우리의 생각과는 다르고 더 높으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때문에 하나님을 안다는 말을 쉽게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방식도 알지 못하는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것은 자기 확신에 의한 주관적 신앙일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해하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는 나의 유익이 그 중심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내 유익을 중심으로 은혜와 사랑을 해석하는 것입니다. 즉 ‘나를 유익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다’라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은 궁극적으로 우리의 유익으로 다가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베푸시는 유익과 우리가 원하고 기대하는 유익이 다르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영혼 구원이라는 유익을 위해 베풀어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환경적 조건의 유익도 함께 기대합니다. 그로 인해 영혼 구원보다는 환경적 유익을 기준으로 은혜와 사랑의 여부를 판단합니다. 주어진 환경에 따라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셨다’며 기뻐하기도 하고, 은혜와 사랑에서 멀어진 것처럼 여겨 낙심하기도 합니다.

 

 

빌 1:6절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고 말씀합니다. 주께서 우리 안에서 시작하신 착한 일, 즉 선한 일이 있습니다. 주께서 시작하신 선한 일이 무엇일까요? 우리를 자녀로 삼으셔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일을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신다는 것은 항상 나의 유익만 추구하고 살아가는 우리를 붙드셔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높이고 찬송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이러한 주의 일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주께서 일하신다는 것을 실감하지 못합니다. 주께서 일하신다는 것보다 내가 일해야 산다는 것만 실감합니다. 힘든 문제가 있으면 도와달라고 기도하지만 그 또한 확신은 없이 답답한 마음에 나오는 공허한 외침이 전부입니다. 이것이 진심으로 은혜와 사랑을 아는 자로 예수님을 믿는 것일까요?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나름대로 확신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들이 떡을 달라고 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고 하는데 뱀을 주는 분이 아니라고 하면서 내가 달라고 하는 좋은 것을 주시는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확신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한 자의 맹목적 확신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사랑이고 은혜일까요? 우리가 진심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인해 환경과 조건으로부터 자유하기 위해서는 사랑과 은혜가 무엇이고 어떻게 역사되는가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도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에스겔의 환상으로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본문 내용으로 들어가기 전에 먼저 바벨론으로 끌려온 이스라엘 백성들의 처지에서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해 어떻게 이해했을 지부터 생각해 보십시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사랑하시고 은혜를 베풀고 계신다고 생각했을까요? 모든 것이 무너지고 삶은 엉망진창이 되었고 고통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하나님이 자신들을 사랑하시고 은혜를 베푸신다고 여길 백성은 없을 것입니다. 그들에게 실감되는 은혜와 사랑은 포로 생활을 끝내고 자유를 찾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무너진 성을 재건하고 다시 예전의 영화를 누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이스라엘이 처한 상황에서 생생하게 다가오는 것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버리셨다는 것입니다. 이들에게 하나님은 에스겔의 환상을 통해 과연 무엇을 보여주고자 하시는 것일까요?

 

 

본문에 보면 궁창이 등장합니다. 궁창이 생물의 머리 위에 수정 같은 형상으로 있는데 보기에 두렵다고 합니다. 그리고 24절에 보면 생물들이 갈 때에 에스겔이 날개 소리를 듣는데 많은 물소리와도 같고 전능자의 음성과도 같고 군대의 소리와도 같다고 합니다. 또한 궁창 위에서부터 음성이 나는데, 그 음성은 26절을 보면 궁창 위의 보좌에 있는 사람의 모양을 한 한 형상으로부터 나옵니다. 먼저 여기까지의 내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부터 생각해 보겠습니다.

 

 

궁창 밑의 생물들이 갈 때에 들렸던 날개 소리가 많은 물소리와도 같다는 것에서 무엇을 생각할 수 있을까요? 성경에서 궁창과 많은 물소리가 의미하는 것을 찾아보자면 노아 시대의 홍수 심판이 가장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창 7장에 보면 당시의 홍수를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문들이 열려 사십 주야를 비가 땅에 쏟아졌더라고 말합니다. 이 내용을 보면 많은 물소리가 바로 노아 시대의 홍수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 할 수 있습니다. 궁창의 형상이 보기에 두렵다고 하는 것도 궁창의 물에 의해 세상이 심판을 받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홍수 심판을 의미하는 환상을 보여주는 것일까요?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노아가 방주에서 나왔을 때 그의 눈에 보인 세상의 형편이 어떠했겠습니까? 여기저기 사람과 동물의 시체가 나뒹구는 처참한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어디에도 먹을 것이 없고 앞으로 살아갈 것을 걱정해야 하는 환경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처럼 심판으로 엉망이 된 세상을 보면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고백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노아가 방주에서 나온 후에 가장 먼저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과 새 중에서 제물을 취하여 번제로 제단에 드립니다. 노아의 눈에도 엉망이 된 세상의 모습이 보였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번제로 드렸다는 것은 세상의 형편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행하심으로 인한 감사와 감격이 노아에게 있었다는 것이고 그 고백을 번제로 나타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노아에게 하나님의 행하심으로 인한 감사와 감격이 있었다면 그것은 온 세상의 심판 속에서 자신과 가족이 구원된 은혜입니다. 이처럼 노아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은커녕 버림받았다고 할 수 밖에 없는 형편에서 은혜로 인한 번제를 드린 것처럼 이스라엘 역시 그들이 처한 상황이 결코 하나님께 버림받았음을 대변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러한 형편에서도 하나님은 은혜와 사랑으로 함께 하고 계심을 보여주고자 하시는 환상인 것입니다.

 

 

28절에 보면 “그 사방 광채의 모양은 비 오는 날 구름에 있는 무지개 같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의 모양이라 내가 보고 엎드려 말씀하시는 이의 음성을 들으니라”고 말합니다

 

 

‘비 오는 날 구름에 있는 무지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앞에서 말씀드린 노아 홍수와 연결하여 생각하면 쉽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창 9:11절을 보면 하나님은 노아에게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 땅을 멸할 홍수가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는 언약을 세우십니다. 그리고 언약의 증거로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셨다고 하시면서 하나님이 구름으로 땅을 덮을 때 무지개가 구름 속에 나타나면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하라고 하십니다.

 

 

무지개는 다시는 홍수로 멸하지 아니하신다는 언약의 증거입니다. 따라서 에스겔이 본 ‘비 오는 날 구름에 있는 무지개’와 같은 사방 광채의 모양은 하나님의 언약의 증거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노아 홍수와 연관된 궁창과 함께 무지개라는 언약의 증거를 보여주시는 것일까요?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언약의 내용을 먼저 생각해 보겠습니다. 다시는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않으시겠다는 언약을 문자대로 이해하면 홍수라는 방법으로 심판하지 않겠다는 뜻이 되지만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홍수 심판은 사람의 죄가 세상에 가득해진 것에 대한 하나님의 조치입니다.

 

 

그러면 홍수 심판으로 인해 세상에 죄가 소멸되었습니까? 아닙니다. 여전히 죄는 존재 합니다. 설사 노아와 그의 가족까지 모두 심판을 받고 아예 새로운 사람을 창조하셨다고 해도 세상은 또 다시 죄로 가득해졌을 것입니다. 홍수로 세상을 쓸어버려도 죄의 세력, 즉 마귀는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만약 하나님의 언약이 없다면 세상은 죄로 인해 심판을 받는 일이 반복되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홍수로 멸하지 않겠다는 언약의 의미는 하나님이 인간의 악한 죄를 보시고 그 죄에 대해 심판하지 않으시겠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결국 언약의 증거로 나타나는 무지개는 세상이 죄로 인해 심판을 받아야 하지만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 보전되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 되고, 무지개가 곧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주는 형상으로 존재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무지개 언약의 의미임을 생각해 본다면 에스겔에게 비오는 날 구름에 있는 무지개와 같은 모양을 보여주신 이유를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비록 이스라엘이 바벨론으로 끌려와 고통을 겪고 있는 상황이 마치 하나님께 심판을 받고 버림을 받은 것처럼 보이지만 이미 하나님은 그러한 심판을 행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언약으로 세우셨음을 보여주고자 한 것입니다.

 

 

사실 이스라엘이 행한 죄를 생각한다면 홍수 심판처럼 쓸어버림을 받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보지 않으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이고 이 은혜를 형상화하여 보여주는 것이 무지개입니다.

 

 

에스겔이 본 무지개는 이스라엘이 비록 바벨론에 끌려와 있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아래 있음을 보여줍니다. 도무지 은혜가 보이지 않고 은혜라고 할 수도 없는 형편이고 상황이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은혜와 사랑으로 붙들고 계셨음을 알라는 것입니다.

 

 

24절에서 생물들이 갈 때에 에스겔이 들은 날개 소리는 많은 물소리 외에 전능자의 음성과도 같고 군대의 소리와도 같다고 합니다. 세상을 홍수로 쓸어버리는 많은 물소리, 즉 큰 물소리가 세상 죄에 대해 진노하는 전능자의 외침과도 같고 군대를 보내 심판하는 소리와도 같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홍수 심판의 그 비참함이 세상의 실제 모습임을 말해줍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비록 바벨론에 끌려왔지만 여전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의 무지개 언약에 의한 은혜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상한 것은 무지개 언약이 죄로 인해 심판하지 않으시는 것이라면 왜 예루살렘이 무너지게 하시고 바벨론 포로가 되게 하시는 것입니까? 죄로 인해 심판하지 않으신다는 것은 세상에 하나님의 심판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인간의 죄로 인해 심판하지 않으시겠다는 언약은 마음 놓고 죄 짓고 살라는 것이 아니라 홍수 후의 세상 또한 심판이 당연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보존됨을 선포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 무지개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으로 보존되는 세상에 요구되는 것은 은혜를 알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만약 은혜를 깨닫지 못하고 은혜를 배반하거나 멸시한다면 그것이 하나님의 영원한 저주 아래 있게 되는 죄로 규정되는 것이 홍수 후의 세상입니다. 이것을 보여주는 것이 함의 저주입니다.

 

 

이것을 생각해 보면 이스라엘을 바벨론 포로가 되게 하신 것은 그들로 하여금 죄가 무엇이며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가를 깨닫게 하기 위함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쓸어버림을 받아야 할 이스라엘이 보존되고 있는 것이 하나님의 언약으로 인한 은혜 때문임을 아는 것이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요청인 것입니다.

 

 

26절에 보면 “그 머리 위에 있는 궁창 위에 보좌의 형상이 있는데 그 모양이 남보석 같고 그 보좌의 형상 위에 한 형상이 있어 사람의 모양 같더라”고 말합니다.

 

 

사람의 모양을 한 형상은 허리 위의 모양은 단 쇠 같아서 그 속과 주위가 불같다고 합니다. 그리고 허리 아래의 모양도 불 같아서 사방으로 광채가 나고 사방 광채의 모양이 무지개 같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지금까지 말씀드린 무지개는 보좌의 사람의 모양을 한 형상과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사람의 모양을 한 형상이 실제 사람이 되어 세상에 나타난 사건이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입니다. 노아에게 언약의 증거로 말씀한 무지개로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다시는 죄로 인해 심판하지 않겠다는 무지개 언약을 세상에 나타내신 것입니다. 그 증거로 죄로 가득한 세상이 받아야 할 저주의 심판을 예수님이 받으십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곧 무지개로 세상에 오신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누가 뭐래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아래 있습니다. 비록 그들이 처한 고통의 형편 때문에 은혜와 사랑이 아니라 저주와 버림받음이 실감된다고 해도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에스겔 선지자를 세우셨고, 그들에게 말씀하시는 것 모두가 은혜와 사랑으로 이끄신다는 증거들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알고 어떤 형편과 상황에서도 주를 바라본다고 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이 처한 형편에서 은혜와 사랑을 확인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은혜와 사랑은 여러분의 마음에서 멀어지고 대신 불평, 불만과 함께 주를 향한 무기력만 자리할 것입니다.

 

 

무지개 언약은 모든 인간이 영원한 심판을 받아야 하지만 그들 가운에서 하나님이 자녀로 택한 자를 건시지고 구원하시겠다는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자녀로 택하시고 부르셨다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안에 있는 것입니다. 이 은혜와 사랑이 예수님의 오심으로 구체적으로 증거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예수님의 오심에서 죄로 인해 영원한 심판을 받아야 할 자신을 봐야 합니다. 그리고 창세전에 택하시고 심판에서 건지셔서 그리스도 안에 살게 하신 은혜와 사랑에 눈을 떠야 합니다. 은혜와 사랑에 눈을 뜨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가 여러분 안에 무지개로 자리하게 될 것입니다. 그 무지개로 인해 감사하고 기뻐하게 되된다면 삶의 형편과 조건을 초월하여 순전히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으로 인해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구원하기로 작정된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기쁨과 위로가 됩니다. 이 기쁨과 위로 안에서 지금까지의 모든 삶을 돌아보며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고백하게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