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2014.11.23 09:48

(5강) 듣든지 아니 듣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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겔 2:1-10http://onlycross.net/videos/eze/eze-020110.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네 발로 일어서라 내가 네게 말하리라 하시며

2 그가 내게 말씀하실 때에 그 영이 내게 임하사 나를 일으켜 내 발로 세우시기로 내가 그 말씀하시는 자의 소리를 들으니

3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자손 곧 패역한 백성, 나를 배반하는 자에게 보내노라 그들과 그 조상들이 내게 범죄하여 오늘까지 이르렀나니

4 이 자손은 얼굴이 뻔뻔하고 마음이 굳은 자니라 내가 너를 그들에게 보내노니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시다 하라

5 그들은 패역한 족속이라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그들 가운데에 선지자가 있음을 알지니라

6 인자야 너는 비록 가시와 찔레와 함께 있으며 전갈 가운데에 거주할지라도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들의 말을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그들은 패역한 족속이라도 그 말을 두려워하지 말며 그 얼굴을 무서워하지 말지어다

7 그들은 심히 패역한 자라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너는 내 말로 고할지어다

8 너 인자야 내가 네게 이르는 말을 듣고 그 패역한 족속 같이 패역하지 말고 네 입을 벌리고 내가 네게 주는 것을 먹으라 하시기로

9 내가 보니 보라 한 손이 나를 향하여 펴지고 보라 그 안에 두루마리 책이 있더라

10 그가 그것을 내 앞에 펴시니 그 안팎에 글이 있는데 그 위에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이 기록되었더라

 

 

<설교>

 

기독교인이라면 대개 성경에 기록된 신비적이고 기적이라고 할 수 있는 사건에 대한 호기심과 함께 직접 체험해 봤으면 하는 마음들이 있을 것입니다. 체험이 없는 것보다 있는 것이 더 신앙생활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직접 하나님 말씀을 듣게 된다면 어떻겠습니까?

 

 

아브라함이나 모세처럼 그리고 수많은 선지자들처럼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음성을 듣게 된다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더 확고하게 믿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체험을 믿음의 확실함을 증거해 주는 도장과 같은 것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체험으로 자기 구원의 확실함과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임을 인지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체험으로 구원의 확실함을 인지했다면 그의 신앙생활은 기쁨과 평강으로 가득하게 될까요? 믿음이 무엇인지도 모른 상태에서 환상을 보고 음성을 듣고 병이 고침 받는 체험을 했다고 해서 기쁨과 평강으로 가득해지는 것은 없습니다. 물론 환상이나 음성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본문에 보면 에스겔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 내용을 살펴보십시오.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는 것으로 마냥 기뻐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까? 앞에서 말한 것처럼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듣고 싶어 하지만 하나님이 내게 말씀하신다면 어떤 말씀을 하실 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막연하게 나를 사랑하는 하나님이시니까 듣기 좋은 말을 해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일까요? 그렇다면 그것은 큰 착각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우리 자신이 하나님께 기분 좋은 말을 들을 수 있을만한 사람들이 되지 못합니다. 삶이 엉망이고 생각도 계획도 모두가 악할 뿐인 우리에게 하나님이 어떻게 기분 좋은 말을 하시겠습니까? 오히려 ‘화있을진저’라는 우리의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며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는 무섭고 두려운 말씀을 들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말씀하지만 그 내용은 하나님이 에스겔을 이스라엘 자손에게로 보내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이스라엘 자손은 패역한 백성이며 하나님을 배반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들과 그 조상들은 하나님께 범죄 하여 오늘까지 이르렀고 얼굴이 뻔뻔하고 마음이 굳은자들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에스겔을 그들에게 보내신다고 하면서 그들에게 주 여호와의 말씀을 전하라 하십니다.

 

 

여러분은 에스겔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습니까? 이스라엘 자손은 조상 대대로 하나님을 신앙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면 말씀을 전하는 자는 환영을 받아야 하고 백성들은 말씀을 공경하고 받아 순종하기를 힘쓰는 반응을 보여야 맞습니다. 이스라엘이 그런 사람들이라면 선지자 노릇하는 것은 힘들 것이 없고 오히려 존중 받고 섬김 받는 인기 있는 직종으로 환대 받을 것입니다.

 

 

하지만 에스겔은 그러한 기대를 전혀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야 하는 이스라엘이라는 밭이 도무지 말씀을 받을 수 없는 엉망진창의 상태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하나님을 배반하고 패역한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에 대해서도 패역한 마음을 고스란히 드러낼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이스라엘에게로 보낸다고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에스겔에게는 고난이 예고되어 있고 목숨까지 위태로울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집어넣으시는 말씀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에스겔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부르시고 이스라엘로 가게 하신 모든 선지자에게 하신 말씀들이 개인적 입장에서는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고 거부하고 싶은 마음이 들 수밖에 없는 내용들이었습니다. 어떤 말씀도 말씀을 받은 당사자의 입장을 배려하거나 그의 안전을 보장하면서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을 때 이스라엘이 어떤 반응을 보이며 어떤 상황에 처해질 것인가를 아셨으면서도 가라하시고 보내셨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말씀이라도 듣기를 원하십니까?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듣고 싶은 마음이 있다 해도 그 내용이 여러분의 인생을 고난과 고통으로 끌어가고 목숨까지 위태롭게 하는 것이라면 아마 듣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만약 하나님이 여러분께 말씀하신다면 그 내용은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넘어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의 시대에 하나님이 음성으로 말씀을 주실 이유는 없는 것입니다. 성경으로 우리에게 끊임없이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말씀처럼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고 하신다면 그대로 순종하시겠습니까? 호세아에게 하신 말씀처럼 음란한 여자를 맞이하여 음란한 자식을 낳으라고 하신다면 순종할 수 있겠습니까? 말씀에 순종할 뜻도 없으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결국 자기 호기심 충족을 위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본문의 이스라엘과 우리가 다르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이 패역한 백성이고 하나님을 배반한 자들이었다면 우리가 바로 그렇습니다. 이스라엘에 뻔뻔하고 마음이 굳은자라면 우리가 그러한 자들입니다. 언제나 하나님을 배반하는 길로만 가려고 기를 쓰면서도 하나님을 잘 믿는 척 자신을 위장하고 있으니 얼마나 뻔뻔합니까? 하나님의 인도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내가 원하는 길로 인도해 주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원하지 않는 일에 대해서는 불평과 불만을 드러냅니다. 이 또한 이스라엘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분명 패역하고 뻔뻔하고 마음이 굳은 상태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이며 나의 악함을 시인하고 말씀 앞에 무릎을 꿇는 현상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이런 현상을 가능하게 하는 것일까요?

 

 

2절에 보면 “그가 내게 말씀하실 때에 그 영이 내게 임하사 나를 일으켜 내 발로 세우시기로 내가 그 말씀하시는 자의 소리를 들으니”라고 말씀합니다.

 

 

1:28절을 보면 에스겔은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을 보고 엎드려 말씀하시는 이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그처럼 여호와의 영광 앞에 엎드려 있는 에스겔을 일으킨 것은 하나님의 영이었습니다.

 

 

에스겔은 스스로의 힘과 의지로 일어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이 아니면 일어설 수 없는 무기력한 상태가 되었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아마 여호와의 영광이 임하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여호와의 영광 앞에 인간이 노출 되었을 때 드러나는 것은 인간의 악함과 더러움 밖에 없습니다. 여호와의 영광 앞에 설 수 있는 인간의 의는 없습니다. 세상에서 최고의 선을 행하였다고 해도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는 더러운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이사야서 6장에 보면 이사야 선지자가 성전에서 여호와의 영광의 충만함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때 이사야는 여호와의 영광을 체험한 것 때문에 감격하며 기뻐하며 자신의 놀라운 체험을 자랑하러 밖으로 달려가지 않았습니다. 그는 충만한 여호와의 영광 앞에서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사 6:5)고 고백했습니다.

 

 

요한계시록 1장에서는 요한이 자신에게 말한 음성을 알아보려고 돌이켰을 때 인자 같은 이를 봤는데 그를 보고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같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죽은 척한 것이 아니라 인자 같은 이 앞에서 자신은 죽은 자임을 절감하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 인간은 엎드려 지고 죽은 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스스로 일어날 힘조차 없는 무기력한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말씀 앞에 있는 인간에게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때문에 말씀을 보면서 ‘하나님 이 말씀대로 살겠습니다. 실천하고 행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말씀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이 아니라 단지 신자에게 주어진 숙제의 수준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말씀 앞에서 깊이 자각하게 되는 것은 우리의 무기력한 상태입니다. 스스로 일어설 수 없고 말씀을 따라 행할 수 없는 연약한 상태의 우리 자신을 보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야 우리가 무엇을 하든 나의 힘과 의지로 인한 것이 아님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말한 대로 에스겔은 여호와의 영광 앞에 엎드렸고 스스로 일어설 수 없는 무기력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를 일어서게 한 것은 하나님의 영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 일어서고 말씀을 듣고 말씀대로 패역한 이스라엘에게로 가는 것입니다. 에스겔의 순종 또한 하나님의 영에 의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임한다는 것은 본인이 원하는 인생은 내려놓고 하나님이 원하시고 가게 하시는 길에 순종하게 되어짐을 의미합니다. 성령이 임하여 거듭나고 새로운 사람이 되는 의미가 여기에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인생을 들고 나와 하나님께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생이 무엇인가를 물으며 하나님이 가게 하시고 살게 하시는 그 길에 뜻을 두게 되는 것입니다.

 

 

5절을 보면 “그들은 패역한 족속이라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그들 가운데에 선지자가 있음을 알지니라”고 하십니다. 7절에서도 “그들은 심히 패역한 자라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너는 내 말로 고할지어다”라고 말씀합니다.

 

 

듣든지 아니 듣든지 말씀을 고하라고 하신 것을 보면 에스겔을 보내시는 하나님의 의도가 무엇인지 애매하기만 합니다. 이스라엘이 패역한 족속임을 밝히는 것은 그들이 말씀을 듣지 않을 것임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그런 이스라엘에게 왜 에스겔을 보내시는 것입니까? 패역한 자들은 심판해 버리면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굳이 에스겔을 보내어 듣지도 않을 말씀을 전하게 하시는 것입니까? 그들 가운데 선지자가 있음을 알게 하기 위해서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는 이스라엘이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것에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아예 그럴 가능성이 없음을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패역한 족속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선지자가 있음을 알게 하시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가 그들 가운데 있음에도 선지자가 고한 말씀을 듣지 않았다면 이스라엘은 어떤 방법으로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을 돌이킬 가능성이 없음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 스스로는 하나님께 마음을 돌이키고 돌아올 가능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스겔의 역할은 패역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설득하고 감동시키고 회개하게 해서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이키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때문에 ‘어떤 말로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회개하게 할 수 있을까?’라는 고민도 할 필요가 없습니다. 듣든지 듣지 아니 듣든지 에스겔은 하나님의 말씀만 고스란히 고하면 되었기 때문입니다.

 

 

에스겔에게 필요한 것은 6절의 “인자야 너는 비록 가시와 찔레와 함께 있으며 전갈 가운데에 거주할지라도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들의 말을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그들은 패역한 족속이라도 그 말을 두려워하지 말며 그 얼굴을 무서워하지 말지어다”는 말씀으로 드러납니다.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이 듣지 않고 외면할 것이고 나를 반대할 것이다’라는 생각과 염려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에스겔은 에스겔의 역할만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너 인자야 내가 네게 이르는 말을 듣고 그 패역한 족속 같이 패역하지 말고 네 입을 벌리고 내가 네게 주는 것을 먹으라”(8절)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먹으라고 주신 것은 두루마리 책입니다. 그런데 그 책에는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람은 살기 위해 먹어야 합니다. 양식이 우리를 살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주신 말씀이 곧 에스겔을 살게 하는 양식이라는 뜻이 됩니다. 떡으로 산다고 하는 것이 세상인데 말씀이 양식이 되고 말씀으로 사는 존재가 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말씀에는 애곡과 애가와 재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이 어떻게 양식이 될 수 있을까요? 애곡과 애가와 재앙이 기록된 말씀이 에스겔에게 양식이 되었다면 오늘 우리에게도 이 말씀이 우리를 살게 하는 양식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일으키시는 애곡과 애가와 재앙, 즉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안에서 세상을 바라볼 때 내가 곧 심판에 속한 자임을 알게 되고 생명은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음을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그가 사는 길이기 때문에 애곡과 애가와 재앙의 말씀이 양식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의 기독교인들은 듣기에 좋은 말만 들으려고 합니다. 애곡과 애가와 재앙의 말에 대해서는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세상으로부터 나오지를 못합니다. 세상을 하나님의 심판의 작업장으로 보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능력하고 일어설 수 없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는 존재라는 것에 대해서도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일에 전혀 지장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말씀을 집어넣습니다. 세상을 심판의 대상으로 보게 하시고 하나님을 향해 일어설 수 없는 우리를 일으키시고 말씀을 집어 넣어 말씀이 양식이 되는 삶을 살게 합니다. 말씀이 양식이 된다면 신자는 세상이 양식으로 여기는 것에 연연하거나 매이지 않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복음 됨을 증거하는 삶입니다.

 

 

신자는 듣든지 아니 듣든지 전해야 하는 사람으로 존재합니다. 세상이 알아주건 말건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가 생명이심을 나타내는 사람입니다. 이 일을 위해 하나님을 우리를 일으키시고 믿음의 길로 가도록 도우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