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2014.11.30 10:05

(6강) 꿀 같은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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겔 3:1-11http://onlycross.net/videos/eze/eze-030111.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 또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발견한 것을 먹으라 너는 이 두루마리를 먹고 가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말하라 하시기로

2 내가 입을 벌리니 그가 그 두루마리를 내게 먹이시며

3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네게 주는 이 두루마리를 네 배에 넣으며 네 창자에 채우라 하시기에 내가 먹으니 그것이 내 입에서 달기가 꿀 같더라

4 그가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스라엘 족속에게 가서 내 말로 그들에게 고하라

5 너를 언어가 다르거나 말이 어려운 백성에게 보내는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 족속에게 보내는 것이라

6 너를 언어가 다르거나 말이 어려워 네가 그들의 말을 알아 듣지 못할 나라들에게 보내는 것이 아니니라 내가 너를 그들에게 보냈다면 그들은 정녕 네 말을 들었으리라

7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은 이마가 굳고 마음이 굳어 네 말을 듣고자 아니하리니 이는 내 말을 듣고자 아니함이니라

8 보라 내가 그들의 얼굴을 마주보도록 네 얼굴을 굳게 하였고 그들의 이마를 마주보도록 네 이마를 굳게 하였으되

9 네 이마를 화석보다 굳은 금강석 같이 하였으니 그들이 비록 반역하는 족속이라도 두려워하지 말며 그들의 얼굴을 무서워하지 말라 하시니라

10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네게 이를 모든 말을 너는 마음으로 받으며 귀로 듣고

11 사로잡힌 네 민족에게로 가서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그들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시다 하라

 

 

<설교>

 

독일의 정신분석학자이며 사회심리학자인 ‘에리히 프롬’이라는 사람이 쓴 ‘소유냐 존재냐’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소유지향적인 삶에 대한 경고를 그 목적으로 하고 있는데 인간을 자기 소유에 집착하는 소유적 인간과 살아있는 존재 가치를 느끼는 존재적 인간으로 나누어 말합니다.

 

 

대개의 사람은 소유를 통해 기쁨과 행복을 느낍니다. 하지만 그것은 새로운 것을 소유함으로 인한 잠시 동안의 기쁨이고 행복일 뿐이며 다음에는 더 큰 소유를 원하게 되고 그러한 반복이 결국 욕구하는 무엇인가를 소유하지 못하는 삶을 견디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 그의 논리입니다. ‘에리히 프롬’의 이 분석은 정확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존재는 무엇일까요? 그가 말하는 존재는 현재의 살아있는 존재를 그대로 느끼는 것입니다. 이는 소유하지 않음을 의미하고 소유하지 않는다는 것은 잃어버릴 것이 없음을 뜻하고 잃어버릴 것이 없음으로 불안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불안이 없음으로 자신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일반적으로 소유로 자기 존재 가치를 확인하지만 소유와 상관없이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에 집중하는 삶의 태도를 ‘존재지향적 삶’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은 거의 존재지향적이 아니라 소유지향적이라는 것이 그의 논리입니다.

 

 

제 생각에 그의 말은 지극히 타당합니다. 사람은 일반적으로 소유지향적인 삶을 살고 있고 소유로 자신을 확인한다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존재지향적인 삶이 된다고 해서 행복할 수 있을까요? 소유에 대해 전혀 의식하지 않고 자신의 존재만을 바라본다면 비교와 경쟁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에 행복이 가능하다는 생각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욥처럼 존재 자체가 무너져버릴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과연 존재만으로 기뻐하고 행복할 수 있겠습니까?

 

 

사실 우리가 비록 소유론적이 아니라 존재론적 삶을 지향한다 해도 늘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존재 또한 언제든 변할 수 있는 가능성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앞서 말한 욥처럼 건강한 몸으로 존재하다가 원하지 않는 몸의 질병으로 인해 고통을 겪어야 하는 상황에 처해질 수도 있습니다.

 

 

육신의 비참한 상태로 인해 소유가 문제가 아니라 존재 자체가 무너지는 상황이 얼마든지 주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처럼 존재가 무너진 상황에서도 존재로 인해 기뻐하고 감사하고 행복해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없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사람이 소유지향적이든 존재지향적이든 죽은 존재입니다. 소유지향적인 삶을 떠나 존재지향적이 된다 해도 죽음의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처럼 죽음의 상태에 있는 인간에게 ‘살았다’는 말이 가능한 것은 죽음에서 부활하심으로 영원한 생명이 되신 분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관계론적이라고 합니다. 참된 생명이신 분과의 관계에 있는 그것이 곧 생명이기에 인간이 소유와 존재를 초월하여 참된 기쁨을 알 수 있는 것은 참된 생명이신 분과의 관계로만 가능하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대개의 신자들이 한 가지 오해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와의 관계로 인해 구원을 얻었고,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음으로 자신이 원하는 혜택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다는 것은 생명, 즉 구원을 얻은 후에 나머지는 자신이 원하는 것으로 채워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도하시는 삶으로 흘러감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즉 우리는 하나님의 피조물이고 종의 신분이며 그 분이 바로 우리 인생의 주인이심을 고백하게 되는 것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는 신앙인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음과 하나님이 주도하시고 주인이신 삶이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자기 존재에 대해 원망과 불평을 할 수 없게 됩니다. 내가 주라고 부르는 분이 나를 힘든 길로 가게 하신다고 해도 하나님의 종으로 남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는 종의 자세인 것입니다. 이러한 자세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움직이는 사람 중의 하나가 에스겔입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을 패역하고 하나님을 배반하며 얼굴이 뻔뻔하고 마음이 굳은 이스라엘 백성에게로 가라 하십니다. 하지만 그들은 에스겔이 전한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회개하고 마음을 돌이켜 선지자인 에스겔을 환영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배척할 것이기에 가시와 찔레 속으로 전갈 가운데로 보내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두루마리 책을 먹으라고 하셨고 그 책에는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3절에 보면 하나님이 주시는 두루마리를 배에 넣으며 창자에 채우라고 하십니다. 이제 에스겔의 속은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씀으로 가득하게 됩니다. 이러한 에스겔에게서 나올 것은 하나님이 채워 넣으신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씀 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여호와의 영이 임한 에스겔에게 정해진 길입니다.

 

 

그러면 말씀으로 채워진 에스겔이 이스라엘에게로 가서 말씀을 내어 놓을 때 이스라엘 또한 그 말씀으로 채워질 수 있을까요? 이스라엘은 에스겔과 언어가 다르거나 말이 어려운 백성이 아니라 같은 언어를 사용하기에 에스겔의 말을 알아듣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스겔의 말을 듣고자 하지 않을 것이고 그것으로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다는 사실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교통할 수 없는 단절된 관계에 있으며 따라서 저주의 백성이란 사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의 입을 벌리게 하셔서 하나님이 주시는 두루마리를 먹게 하십니다. 두루마리를 먹은 에스겔은 “그것이 내 입에서 달기가 꿀 같더라”고 말합니다. 말씀드린 대로 두루마리에는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이 기록되어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도 에스겔은 그것이 꿀처럼 달다고 표현합니다. 심판의 말이기에 ‘입에서 쓰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 같은데 에스겔에게는 달았던 것입니다.

 

 

이것은 에스겔이 하나님의 말씀과 온전히 교통되고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교통되게 하신 에스겔을 이스라엘에게로 보내셔서 에스겔의 말을 듣지 않는 이스라엘이 곧 하나님과 교통되지 않는, 하나님과 단절된 관계에 있는 저주의 백성이라는 사실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이 입에서 꿀처럼 달다고 하는 에스겔의 말이 이해되십니까? 많이 생소한 표현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꿀처럼 달게 느껴진다면 그만큼 우리 마음을 흡족하게 하고 귀를 즐겁게 하는 말씀일거라는 생각이 앞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에스겔이 먹은 말씀은 분명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이었습니다. 귀를 즐겁게 하기는커녕 듣기 싫고 피하고 싶은 말씀인데도 불구하고 에스겔에게는 꿀처럼 달았던 것입니다.

 

 

시 19:9,10절에 보면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법도 진실하여 다 의로우니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라고 말합니다.

 

 

시 19편의 저자는 여호와의 율법, 여호와의 교훈,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를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송이꿀보다 더 달다고 말합니다. 여러분께는 여호와의 율법 여호와의 교훈이 과연 그러한 말씀으로 다가오십니까? 여호와의 법은 우리의 허물을 드러내어 보게 합니다. 여호와의 법에 의한 우리는 저주의 자식일 뿐입니다.

 

 

그런데도 그 같은 말씀을 순금보다 더 사모하고 송이꿀보다 더 달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허물을 드러내는 그 내면에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한 놀라운 가치가 숨어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가치가 많은 순금보다 더 귀하고 우리에게 놀라운 유익으로 다가오기에 송이꿀보다 달다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시 19:11-14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또 주의 종이 이것으로 경고를 받고 이것을 지킴으로 상이 크니이다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또 주의 종에게 고의로 죄를 짓지 말게 하사 그 죄가 나를 주장하지 못하게 하소서 그리하면 내가 정직하여 큰 죄과에서 벗어나겠나이다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시편 저자는 여호와의 율법, 교훈으로 경고를 받았고 자기 허물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자기 허물을 깨닫게 된 것으로 크게 기뻐합니다.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라는 표현이 그것을 말해줍니다.

 

 

아무도 스스로 하나님 앞에서의 자기 허물을 깨달을 자가 없고, 자기 허물을 알지 못함으로 결국 영원한 저주로 끝나는 운명임을 생각한다면 경고를 받고 허물을 깨닫게 된 것은 하나님의 큰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로 인해서 여호와의 도를 순금보다 더 사모하게 되고 송이꿀보다 달다고 하는 것입니다. 에스겔이 하나님의 말씀을 꿀처럼 달다고 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은 우리에겐 경고의 말씀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습니다. 에스겔은 경고의 말씀을 받아들임으로 자신의 허물을 깨닫게 되고 그로 인해 오직 하나님만이 구속자이심을 깨닫고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게 된 것이 생명임을 생각하면 나를 경고하고 허물을 깨닫게 하는 말씀이야 말로 꿀처럼 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을 위해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영이 임하게 하시고 입을 벌리게 하시고 말씀을 먹게 하시고 그 말씀으로 창자까지 채우게 하신 것입니다.

 

 

11절에 보면 “사로잡힌 네 민족에게로 가서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그들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시다 하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가게 하시고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다며 전하게 하신 것은 에스겔이 전한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으로 인간은 근본적으로 하나님과 교통할 수 없는 저주에 속한 존재임을 증거 하고자 하시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늘 소유지향적입니다. 가진 것은 지키려고 하고 가지지 못한 것은 가지기 위해 노력하며 가졌을 때 보람과 기쁨을 느낍니다. 그런데 이것이 뜻대로 되지 않으면 실망하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은혜와 단절되어 살아가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음에도 은혜와 교통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슬픔과 염려와 실망으로 가득하면서도 이것이 무엇으로부터 시작되었고 어디로부터 왔는지를 모릅니다. 그래서 맹목적으로 교회를 다니며 은혜를 받아서 슬픔 대신 기쁨이 있는 삶이되기를 꿈꾸지만 그 또한 마음대로 되지 않음을 절감하기에 신앙생활을 해도 늘 마음이 공허하다는 것만 느끼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인생을 나름대로의 즐거움과 편함을 찾아 누리다가 마무리 하는 것에 행복의 의미를 두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것이 인간의 탐심이며 이 탐심만으로 인간이 죄인이라는 것이 여실히 증명되고 있다는 사실에 무지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와 허물을 드러내고 깨닫게 하기 위해 말씀을 주신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기에 이스라엘이 에스겔의 말을 듣지 않는 것처럼 말씀을 듣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란 가슴 깊은 곳까지 내가 죄인이라는 고백이 박혀 있는 사람입니다. 에스겔에게 두루마리를 배에 넣고 창자에 채우라고 하시는 말씀도 그런 의미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받게 되면 죄에 대한 자각과 함께 그 속은 죄인이라는 고백으로 채워지게 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이 임한 신자입니다.

 

 

이러한 신자에게 하나님의 은혜는 소유와 상관없이 허물과 죄로 죽은 자를 살리시고 생명에 있게 하신 것으로 다가오게 되는 것이고 기쁨의 찬송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죄와 허물에 대한 자각이 없이 박수치고 노래하며 즐거워하는 것은 단지 기독교적 쇼라고 하는 것이 마땅한 표현일 것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에 아쉬움이 있고 불만이 있다면 그것이 곧 탐심에 붙들려 있는 증거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말씀은 그러한 우리의 실상을 드러내고 보게 하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말씀은 우리의 속 깊숙한 곳까지 파헤쳐서 미처 보지 못했던 악한 것들을 다 드러내시며 내가 곧 죽은 자라는 것에 절감하게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바라보게 합니다. 죽음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바라볼 때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심으로 베푸신 은혜에 마음이 열리게 됨을 경험할 것입니다. 말씀이 순금보다 더 귀하다는 고백에 고개를 끄덕이게 될 것이고 송이꿀보다 더 달다고 고백하는 그 마음에도 조금씩 함께 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누리게 되는 신앙인의 기쁨이고 행복입니다.

 

 

성령이 아니고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은 이마가 굳고 마음이 굳어 네 말을 듣고자 아니하리니 이는 내 말을 듣고자 아니함이니라”(7절)고 하신 것처럼 인간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은 마음이 굳은 상태에 있기 때문입니다.

 

 

철저하게 하나님으로부터 단절된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이런 우리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경고를 받고 나의 허물을 깨닫게 된다면 그것이 곧 우리에게 허락하시고 베푸신 하나님의 크신 은혜라는 사실에 눈을 떠야 합니다. 이것이 에스겔을 말씀으로 채우시고 이스라엘로 보내시는 하나님의 취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말씀으로 채워진 신자에게 세상의 풍요는 부러움의 대상이 되지 못합니다. 어떤 풍요 속에 있다고 해도 그 존재는 하나님의 관계에서 단절된 죽음의 상태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네 이마를 화석보다 굳은 금강석 같이 하였으니 그들이 비록 반역하는 족속이라도 두려워하지 말며 그들의 얼굴을 무서워하지 말라 하시니라”(9절)는 말씀처럼 생명이 되는 말씀으로 살아갈 뿐입니다. 말씀은 우리의 허물을 보게 하며 그 모든 허물을 씻어주신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함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게 합니다. 이 때문에 말씀이 꿀처럼 달게 다가오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