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2014.12.07 09:48

(7강) 주의 영

조회 수 3413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겔 3:12-15http://onlycross.net/videos/eze/eze-031215.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2 때에 주의 영이 나를 들어올리시는데 내가 내 뒤에서 크게 울리는 소리를 들으니 찬송할지어다 여호와의 영광이 그의 처소로부터 나오는도다 하니

13 이는 생물들의 날개가 서로 부딪치는 소리와 생물 곁의 바퀴 소리라 크게 울리는 소리더라

14 주의 영이 나를 들어올려 데리고 가시는데 내가 근심하고 분한 마음으로 가니 여호와의 권능이 힘 있게 나를 감동시키시더라

15 이에 내가 델아빕에 이르러 그 사로잡힌 백성 곧 그발 강 가에 거주하는 자들에게 나아가 그 중에서 두려워 떨며 칠 일을 지내니라

 

 

<설교>

 

한국교회 신자의 신앙을 평하자면 신자의 책임이라는 무거운 짐을 지고 있고, 그 책임을 잘 감당하지 못한다는 자책감과 함께 자신에 대해 실망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중요한 것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우리에게 짐을 지우거나 책임을 묻고 질책하는 내용이 아니라 기쁨과 소망과 자유하게 하는 내용으로 가득 채워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약속 안에 담겨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고 이해했다면 하나님이 어떻게 행하시는가에 눈이 열리며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하게 되고 하나님의 행하심에 모든 소망을 두게 되면서 자유가 무엇인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말씀 안에 있는 신자는 무거운 짐을 지는 것이 없습니다.

 

 

신앙이 짐이 되지 않기 위해 도움 되는 것은 신앙이 좋아져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는 것입니다. 신앙이 좋아질 필요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대개의 신자들은 신앙이 좋아져야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런데 신앙이 좋아져야 한다는 생각에 붙들리게 되면 결국 신앙이 좋아지기 위해 자신이 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찾게 되고 그것을 실천하면 신앙이 좋아진다는 착각에 붙들리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이미 짐을 지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이 좋아져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성경에서도 신앙이 좋은 사람만 생각 하게 되고 그들처럼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붙들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새롭게 눈을 떠야 하는 것은 신앙이 좋은 인물이 아니라 신앙이 형편없고 악행을 일삼았던 인물입니다. 그들을 보면서 하나님이 그들에게 어떻게 일하셨는가에 눈을 뜨는 것이 필요합니다.

 

 

12절에 보면 주의 영이 에스겔을 들어 올립니다. 주의 영은 하나님의 영이며 성령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주의 영이 에스겔을 들어 올렸다는 것은 에스겔의 모든 활동이 주의 영과 무관하지 않음을 말해줍니다.

 

2:1절에 보면 “인자야 네 발로 일어서라 내가 네게 말하리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에스겔이 일어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이 임하여 에스겔을 일으켜 세웁니다. 그리고 본문 12절에서도 주의 영이 에스겔을 들어 올리셨다고 합니다. 이것을 ‘에스겔이 성령을 받고 힘을 얻어 일어섰다’는 뜻으로 이해해도 되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주의 영, 즉 성령을 그런 의미로 받아들입니다. 성령이 임하는 것을 힘과 능력을 주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받으면 무슨 대단한 일을 하게 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것이 성경을 인간중심으로 해석함으로 나타나는 폐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이 인간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으로 해석되어야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성경이 어떤 방향으로 해석되느냐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을 빌미로 종교적 실천에 초점을 둔 방향으로 해석하느냐 아니면 인간을 통해서 나타나고 증거되는 하나님의 행하심으로 인해 감격하고 감사하며 기뻐하게 되는 방향으로 나아가느냐로 달라지는 것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행하심을 높이고 감사함으로써 영광 돌리는 존재로 부름 받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자가 훌륭한 사람으로 부각되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신앙이 좋은 사람은 다르다는 평을 받아야 할 이유가 없고, 그런 평을 받기 위한 목적으로 신앙생활을 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런 말들이 비난 받을 행동을 해도 된다는 의미로 이해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은 신자는 훌륭한 인물이 되는 것으로 신앙이 증거 되고 그것이 신자의 역할이 아님을 알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에스겔도 다르지 않습니다. 에스겔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고 환상을 보게 되며 말씀을 듣고, 이스라엘로 보내심을 입어 말씀을 전하는 사명을 받는 것 때문에 에스겔이 우리와는 다른 특별한 인물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만약 에스겔이 그의 의지와 결단으로 이스라엘을 향해 갔다면 신앙이 남다른 선지자라고 평할 수 있습니다.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믿는 민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배반하고 완악하고 얼굴이 뻔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이스라엘을 향해서 애곡과 애가와 재앙의 말을 전하기 위해 간다는 것은 짚을 들고 불로 뛰어드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일반적인 인간의 심성으로는 이스라엘로 가기를 꺼려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에스겔이 이스라엘로 가서 전하라는 말씀을 듣고 스스로 일어나 갔다면 에스겔의 믿음과 순종을 칭찬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하지만 본문은 에스겔에게 주의 영이 임하였다고 합니다.

 

 

14절을 보면 “주의 영이 나를 들어올려 데리고 가시는데 내가 근심하고 분한 마음으로 가니 여호와의 권능이 힘 있게 나를 감동시키시더라”고 말합니다. 주의 영이 에스겔을 들어 올려 데리고 가셨다는 것은 에스겔이 스스로 갈 수 없는 길이었음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만약 에스겔이 스스로 갈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주의 영이 임하여 데리고 간 것이라면, 주의 영은 괜한 일에 끼어든 것 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주의 영의 등장은 인간의 열심과 순종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열심이 개입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1장에 보면 에스겔이 네 생물의 형상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생물들 곁에 있는 땅 위에는 바퀴가 있는데 바퀴들이 제멋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영이 움직이는 방향대로 움직입니다. 그 이유는 생물의 영이 그 바퀴들 가운데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1:21절에서 “그들이 가면 이들도 가고 그들이 서면 이들도 서고 그들이 땅에서 들릴 때에는 이들도 그 곁에서 들리니 이는 생물의 영이 그 바퀴들 가운데에 있음이더라”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보면 활동의 중심에는 영이 있고 모든 것은 영의 힘에 의해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의 영을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체험적인 것으로 확인하려고 하지만 그것은 인간의 희망사항이고 착각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기적을 체험했다고 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는 인간으로 바뀌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의 영은 에스겔을 가시와 전갈로 표현된 이스라엘로 데려갑니다. 14절에서는 에스겔이 근심하고 분한 마음으로 갔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으로 가득한 두루마리 책을 먹은 에스겔이 하나님의 심정으로 이스라엘 백성의 죄악과 그들에게 임할 심판으로 인해 근심하고 분한 마음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15절에서도 “이에 내가 델아빕에 이르러 그 사로잡힌 백성 곧 그발 강가에 거주하는 자들에게 나아가 그 중에서 두려워 떨며 칠 일을 지내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하나님의 심정을 알게 된 에스겔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라볼 때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자신들의 평안만을 추구했던 이스라엘의 죄악으로 인해 근심하고 분노하게 되는 것이고 그러한 이스라엘로 인해 답답해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의 영이 임한 선지자가 이스라엘을 바라보는 심정입니다.

 

 

주의 영이 임한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심정을 알게 되고 하나님의 심정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누가 주의 영이 임한 사람인가는 체험으로 확인할 수가 없습니다. 그 어떤 기적을 체험했다고 해도 그 체험으로 인해 하나님의 심정을 알게 되고 하나님의 심정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세상을 바라보면 보이는 것은 세상의 죄입니다. 죄 밖에 보이지 않으며 죄로 인해 분한 마음을 갖게 됩니다. 하나님을 배신 한 채 완고하고 패역한 길로 가고 얼굴이 뻔뻔한 것에 대해 분한 마음이 있게 됩니다. 그리고 그 분함은 자신으로도 향하게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즉 자신의 죄를 보며 하나님의 은혜로 살면서도 은혜를 찬송하지 못하고 여전히 세상의 죄에 붙들린 자신에 대해 분노하고 근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의 영이 임한 신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눈이 열려서 보지 못한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을 향한 환상이 깨어지게 됩니다.

 

 

사람들은 세상에 대해 끝없는 환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신이 잘만하면 세상의 많은 것을 누리며 원하는 사람을 살 수 있다는 환상입니다. 세상의 죄에 대해 분한 마음이 없습니다. 그러한 환상이 깨뜨려지는 것이 곧 구원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오늘날 교회가 세상의 인정을 받기 위해 사회적 활동에 열심을 내는 것은 하나님의 심정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적어도 하나님의 심정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면 죄 가운데 있으면서도 죄를 알지 못하는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이 담긴 십자가만을 말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주의 영이 임한 것입니다.

 

 

고후 3:14-17절을 보면 “그러나 그들의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벗겨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그 마음을 덮었도다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고 말합니다.

 

 

모세가 산에서 내려올 때 얼굴에 수건을 썼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내려옵니다. 하나님께 받은 말씀으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고 있는 것이 모세입니다. 그런데 산 아래 있던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지 못하고 보이는 존재가 자기들에게 함께 해야 안심하는 수준이었습니다. 그래서 송아지를 만들어 그것을 하나님으로 여기고 섬기는 수준이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이 우상일 뿐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모세가 이러한 이스라엘에게 오면서 수건을 씀으로 이스라엘과 하나님을 만난 모세가 서로 교통할 수 없는 관계에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것으로 이스라엘은 마치 그들이 수건을 쓰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에 대해 무지하다는 것을 나타낸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날까지도 구약을 읽을 때 수건이 벗겨지지 아니하고 있다는 말씀처럼 우리가 수건이 벗겨지지 않은 상태에서 말씀을 봅니다. 그래서 말씀을 봐도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지 못하고 이스라엘처럼 송아지만 만들어 하나님인 것으로 착각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에 대한 본래의 우리들 생각이었습니다.

 

 

 말씀을 봐도 하나님에 대해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잘 섬겨주면 우리를 복주고 재앙에서 건져 주며 평안한 삶을 살게 해줄 것이라는 생각을 넘어서지 못하는 것이 우리들의 현실이었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주의 영이 임하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에 대해 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주의 영이 말씀을 해석하면서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의 마음에 눈이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도 단순히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오신 분이 아니라 나의 완악함과 죄로 인해 피 흘리시고 고난 받으신 분으로 해석됩니다. 말씀을 어디를 봐도 나의 복이 아니라 죄가 보이는 것이고 그 죄를 짊어지신 그리스도의 고난과 함께 감당할 수 없는 은혜를 알게 되는 것이 주의 영으로 인한 해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얼굴에 수건이 벗겨진 것이고 때문에 주께로 돌아가면 수건이 벗겨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를 주께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 바로 주의 영입니다. 그러므로 주의 영이 임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가리어진 수건을 벗기기 위해 찾아오신 하나님의 열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이고 사랑이기 때문에 신자는 어떤 처지에서도 하나님의 열심에서 은혜와 사랑을 깨달으며 하나님을 높이고 찬양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자리로 이끄시기 위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열심입니다.

 

 

12절에 보면 주의 영이 에스겔을 들어 올리실 때 에스겔은 뒤에서 “찬송할지어다 여호와의 영광이 그의 처소로부터 나오는도다”라는 크게 울리는 소리를 듣습니다. 그런데 에스겔의 입장에서 생각한다면 찬송이 가능하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늘 내 입장에서 생각합니다. 때문에 하나님을 찬송하게 되는 것도 하나님이 그럴만한 일을 해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원하는 일을 해주면 얼마든지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찬송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런 수준의 사람들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성령이 임하게 하심으로 찬송할 수 없는 가운데 찬송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하나님을 찬송할 수 없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을 찬송하게 하고 하나님이 거하시는 진정한 처소가 되게 하기 위해 에스겔을 보내시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의 자신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습니까? 아니면 찬송은커녕 불만과 불평을 쏟아내고 싶은 심정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언제나 나를 바라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위해 일하지 않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이것이 얼굴이 수건으로 가려서 하나님을 알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일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일하십니다. 하나님을 배반하고 완고하고 뻔뻔한 것이 우리라 할지라도 버리지 않으시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알게 하시고 그로 인해 하나님을 찬송하게 하심으로 영광 받고자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이 일을 위해 주의 영,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게 하셔서 말씀을 바르게 해석하게 하시고 하나님을 알아가게 하십니다.

 

 

우리의 심령에 주의 말씀이 박히고 그 말씀으로 인해 십자가에 피 흘리고 죽으신 그리스도를 깨닫게 되고 그리스도에게서 하나님의 크신 은총과 사랑을 알아가게 되었다면 그보다 큰 기적과 능력은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곧 주의 영이 여러분을 이끌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처럼 주의 영으로 이끌림 받을 때 세상은 어둠에 갇힌 심판의 대상으로 보이게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세상에서 나를 건지신 하나님으로 인해 감사하고 찬송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