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2014.12.14 09:41

(8강) 파수꾼의 책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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겔 3:16-21http://onlycross.net/videos/eze/eze-031621.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6 칠 일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17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

18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꼭 죽으리라 할 때에 네가 깨우치지 아니하거나 말로 악인에게 일러서 그의 악한 길을 떠나 생명을 구원하게 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그의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의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고

19 네가 악인을 깨우치되 그가 그의 악한 마음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지 아니하면 그는 그의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너는 네 생명을 보존하리라

20 또 의인이 그의 공의에서 돌이켜 악을 행할 때에는 이미 행한 그의 공의는 기억할 바 아니라 내가 그 앞에 거치는 것을 두면 그가 죽을지니 이는 네가 그를 깨우치지 않음이니라 그는 그의 죄 중에서 죽으려니와 그의 피 값은 내가 네 손에서 찾으리라

21 그러나 네가 그 의인을 깨우쳐 범죄하지 아니하게 함으로 그가 범죄하지 아니하면 정녕 살리니 이는 깨우침을 받음이며 너도 네 영혼을 보존하리라

 

 

<설교>

 

인류 역사상 최악의 인간관계의 주인공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예수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에 갇힌 세상에 생명의 길로 오셔서 참된 진리를 전하셨고 하나님과의 영원한 생명의 관계를 위해 우리의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세상은 사람의 조건을 보고 대하였지만 예수님은 외부 조건은 무시하시고 오히려 세상이 멀리하는 죄인들을 가까이 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손수 부르신 12제자들에게까지 등 돌림을 당하셨고, 자신의 피조물에 의해 매를 맞으시고 침 뱉음을 당하는 인간과의 최악의 관계를 경험하시고 십자가에서 힘없이 돌아가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세상이 예수님을 반대하게 된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처음부터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반대했던 것이 아닙니다. 비록 율법의 문제 때문에 바리새인, 서기관과 같은 사람들과는 관계가 좋지 않았지만 수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따르고 추종했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순간에는 모두가 예수님의 반대편에 서서 예수님을 버리기 위해 강도인 바라바를 선택하는 이율배반적인 모습을 보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추종했던 사람들은 과연 예수님이 좋았던 것일까요? 예수님을 미워하고 죽이고자 했던 사람들은 예수님이 싫었던 것일까요? 사실 이들은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이들의 관심은 예수님이 행하신 신비한 기적의 사건이었고 예수님의 행동에 있었습니다. 즉 예수님보다는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이 좋았던 것이고, 예수님의 율법에서 어긋나는 행동이 싫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이 되는 참된 진리를 담고 계셨지만 세상은 예수님에게서 참된 진리를 보고자 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입맛에 맞는 대로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보고자 했고, 자신들이 싫어한 것에 대해서는 밀쳐내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인간관계를 중요시 하셨다면 예수께 담겨 있는 진리를 꺼내지 않았을 것입니다. 세상이 좋아하는 기적을 베푸시고 세상이 옳다고 생각하는 율법을 따라 행하셨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예수님은 세상으로부터 능력의 선지자로 인정받고 대접받으면서 큰 세력을 이루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교회라는 이름으로 모이는 기독교가 추구하는 것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물론 그렇게 되었을 때도 예수님의 능력과 세력에 위협을 느끼고 시기하면서 반대하는 세력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아마 대제사장과 장로 서기관과 같은 유대 사회의 기득권 부류들일 것입니다. 그렇다 해도 예수님을 해할 수 없었을 것이고 오히려 예수님의 세력을 의식하여 외적으로 예수님과 원만한 관계를 이루려고 우호적인 접근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예상들이 참된 진리를 내어 놓는 것으로 깨어진 것입니다.

 

 

여러분은 참된 목회자가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합니까? 참된 교회는 또 어떤 교회라고 생각합니까? 저도 목사의 한 사람으로 참된 목회자의 길로만 가고자 했고, 제가 설교하고 있는 은석교회가 참된 교회로 세워지기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모든 것이 헛된 환상이며 결국 또 다른 영광과 이름을 추구하는 욕심이라는 것을 압니다.

 

 

예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예수께서 알게 하시고 제 속에 담아 두신 참된 것, 예수님이 전하신 그 진리를 내어 놓는 것에 있기 때문입니다. 즉 목사인 제가 참된 목회자로 인정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늘의 참된 진리가 나의 속에 갇혀 있지 않고 여러분께로 전달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저와 여러분이 진리의 도구로 부름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일이 쉽지가 않습니다. 진리만을 전하신 예수님이 세상으로부터 반대를 받으신 것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세상은 진리를 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진리를 전하는 목사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세상은 도덕적으로 온전하고 삶에 있어서도 존경할 만한 목사를 원할 뿐입니다. 이것이 세상이 생각하는 참된 목회자상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경이 증거하는 참된 복음을 그대로 전한다고 해서 참된 목사로 인정받고 칭찬 받는 존재가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참된 진리가 우리에게 세상적으로 득이 되는 것은 없습니다. 오히려 진리로 인해서 인간관계가 곤란해 질 수밖에 없고 반대를 받는 길로 가게 될 수도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이것을 본문의 에스겔을 통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17절에 보면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고 합니다.

 

 

파수꾼이라 함은 적의 침입을 미리 경고하여 전투 준비를 하게 하거나 사람들로 하여금 피난처로 미리 대피하게 하는 역할을 하는 사람입니다. 파수꾼이 자기 직무를 소홀히 한다면 적의 침입을 대비하지 못하게 됨으로 큰 피해를 입게 될 것이기 때문에 파수꾼은 매우 중요한 일을 맡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에스겔을 이스라엘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우셨다면 에스겔의 역할로 상상할 수 있는 것은 외부의 침략으로부터 이스라엘을 지키고 보호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이미 바벨론의 침략으로 무너지고 포로로 끌려온 상황입니다. 그러한 상황에서의 파수꾼이라면 외부 세력의 침략과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파수꾼은 생명과 연관이 있습니다. 즉 에스겔을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우셨다면 그것은 에스겔이 이스라엘 족속의 생명을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을 감당하는 사람으로 부르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파수꾼으로 세우신 에스겔에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난감하게 합니다.

 

 

파수꾼인 에스겔에게 요구되는 것은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는 말씀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대신하여 그 말씀으로 이스라엘을 깨우치는 것입니다. 만약 에스겔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아서 악인이 그의 죄악 중에서 죽으면 그의 피 값을 에스겔의 손에서 찾으시겠다고 하십니다(18-19절). 악인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에스겔에게 물으시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의인이 하나님을 떠나 악을 행할 때 선지자가 그에게 경고하지 않음으로 그가 그 죄로 인해 죽음을 당할 때도 역시 그 책임을 선지자에게 물으시겠다고 합니다. 하지만 선지자가 의인을 깨우쳐 범죄 하지 않게 하면 의인이 살고 선지자 역시 영혼이 보존된다고 하십니다. 이처럼 선지자의 역할은 사람을 살릴 수도 있고 죽게 할수도 있으며 그로 인해 자신이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하는 중대한 일임을 알게 됩니다,

 

 

에스겔에게 하신 말씀을 보면 한마디로 말해서 현실과 타협하지 말고 이스라엘 족속이 처한 현실의 경중을 헤아려 그들에게 가장 근원적인 일을 할 것을 요구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가장 근원적인 일이 무엇일까요? 바벨론 포로 생활이라는 현실만 본다면 생존이고 희망입니다. 고통의 상황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말하며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고 하나님께 희망을 두게 함으로써 생존에 힘을 내게 하는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우리 역시 이스라엘과 같은 처지에 처했다면 생존의 문제에 모든 관심이 집중될 것입니다. 굳이 이스라엘과 같은 처지가 아니라 해도 지금의 우리의 관심이 생존의 문제로만 향해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에스겔에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생각은 이스라엘의 생존보다는 그들이 죄를 깨닫고 악한 마음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는 것이 가장 중요한 근원적인 문제였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이 처한 실제적 현실임을 인식한다면 그들에게 진심으로 필요한 것은 듣기 좋은 말로 일시적인 위안을 받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살릴 수 있는 참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이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죄를 깨우치고 악한 마음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지 않으면 그들은 죄악 중에서 죽게 됩니다. 하지만 정작 이스라엘은 자신들에게 필요한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감지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을 살린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졌을 때 그들의 반응이 어떨지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가장 필요하고 그들을 살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하는 것이 파수꾼으로 세움 받은 선지자의 할 일이고 책임입니다.

 

 

그러면 파수꾼의 책임을 위해서 에스겔이 버려야 하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좋은 인간관계, 그리고 편한 인생입니다. 악인을 악한 마음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게 하기 위해서는 그의 악에 대해 말하고 책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처럼 상대방의 악함에 대해 말한다면 제아무리 최선을 다해 부드럽게 말한다고 해도 감정을 상하게 하고 미움을 살 수도 있습니다.

 

 

더 힘든 것은 의인이 악을 행하는 경우입니다. 하나님은 의인이 공의에서 돌이켜 악을 행할 때는 그의 공의는 기억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가 행한 악만 보라는 것입니다. 만약 의인으로 행한 공의를 기억하게 되면 악에 대해서는 관대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우 악을 행한 본인조차 자신의 악함에 대해 둔할 수 있습니다. 평소 의인의 삶으로 인해 존경 받고 대접 받으면서 자신을 의인으로 여겼다면 악함을 보지 못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런 사람은 더욱 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기 힘든 법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는 것은 선지자 본인에게는 힘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이 한편으로는 억울함으로 다가올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을 파수꾼으로 세우시면서 그에 따른 어떤 보상도 말씀하지 않습니다. 다만 책임을 다하지 못함으로 죄악 중에 죽은 자가 있다면 그 피 값을 에스겔에게서 찾겠다고만 합니다. 에스겔 본인으로서는 부당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까지 하나님이 주시는 인생을 받아들이는 그가 바로 진정한 의미의 파수꾼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을 부르셔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바라보시는 것처럼 바라볼 것을 말씀합니다. 하나님과 같은 생각, 같은 마음으로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선지자이고 파수꾼인 것입니다. 선지자가 자기 생각과 자기 마음으로 세상을 보게 되면 타협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하나님보다는 자신의 입장에서 자신에게 유익이 되는 방향으로 나아갈 뿐입니다.

 

 

본문의 내용은 말씀을 전하는 역할을 하는 목사에게만 해당되지 않습니다. 에스겔이 비록 선지자로 세움 받긴 했지만 그 일이 이스라엘 민족들에게 인정받고 존경 받는 멋있는 역할로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것에서 오늘날 신자로 살아가는 우리 인생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께 부름 받은 신자로서의 인생이 부름 받지 않은 사람에 비해서 좀 더 특별해지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하나님을 믿는 신자로 살아온 인생을 되돌아 봤을 때 과연 특별함이라는 것이 느껴집니까? 아닐 것입니다.

 

 

저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제 나름대로는 복음을 전한다고 힘썼지만 아무것도 아닌, 그야말로 별 볼일 없는 인생을 살아왔을 뿐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기대와 예상을 뛰어넘어 일하시는 하나님이 주시는 인생입니다. 그렇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삶을 감사하고 기뻐하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이 세우신 파수꾼으로 사는 선지자의 삶입니다.

 

 

신자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으며 이것이 신자의 인생과 운명을 결정합니다. 즉 세상의 인간관계가 인생에 도움이 되는 것도 있고 필요하기도 하지만 신자의 인생과 운명을 결정하는 힘은 아니란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모든 초점을 하나님과의 관계에 두어야 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말씀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파수꾼으로서의 길이고 삶입니다.

 

 

그렇다면 에스겔의 진정한 파수꾼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이스라엘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지키는 것입니다. 말씀을 지킨다는 것은 말씀을 그대로 전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따라 그대로 행동하는 것이 말씀을 지키는 것이 됩니다.

 

 

말씀이 세상을 멸망의 장소로 본다면 신자 역시 세상을 그렇게 보는 것이 말씀을 지키는 것입니다. 말씀이 세상의 가치 있는 것을 배설물로 여긴다면 신자 역시 그렇게 여기는 것이 파수꾼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세상을 향해 말씀을 내어 놓는 것이고 세상을 깨우치는 하나님의 일에 도구로 참여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는 말을 합니다. 이것이 바울 자신이 구원에서 탈락될 것을 두려워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는 신자는 세상과 같은 길로 가지 않고 다른 길을 감으로써 싸움이 있을 수밖에 없는 길을 가고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믿음으로 인한 영적 싸움이 있는 것이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신자는 복음을 알고 말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복음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가는 사람입니다. 복음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감으로써 세상과는 다른 길로 가고 있으며, 세상이 가는 길에 타협하여 함께 가는 것이 생명에서 멀어지는 것임을 나타내는 것이 신자의 책임인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어떤 인생이든 하나님이 살게 한 대로 살면 됩니다. 이것이 참된 신앙입니다.

 

 

무기력한 숙명주의적 신앙이 아닙니다.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삶의 방향으로 삼고 예수님을 기다리기에 가능한 힘 있는 신앙입니다. 자신을 바라보지 않는 신앙이기에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여겨지는 자신에 대해서도 실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이루고자 하시는 뜻은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 있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씀이 가리키는 방향으로만 걸어갑니다. 그 길에 무엇이 있다고 해도 그 길로만 가게 됩니다. 죄로 가득한 멸망의 세상에서 생명은 주께 있음을 믿기 때문에 주가 계신 곳을 소망하며 오늘을 살아가는 것이고 내일을 염려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말씀을 지키는 파수꾼의 삶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