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016.03.12 17:43

(91강) 야곱의 절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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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37:29-36http://onlycross.net/videos/gen/gen-372936.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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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29.르우벤이 돌아와 구덩이에 이르러 본즉 거기 요셉이 없는지라 옷을 찢고

30.아우들에게로 되돌아와서 이르되 아이가 없도다 나는 어디로 갈까

31.그들이 요셉의 옷을 가져다가 숫염소를 죽여 그 옷을 피에 적시고

32.그의 채색옷을 보내어 그의 아버지에게로 가지고 가서 이르기를 우리가 이것을 발견하였으니 아버지 아들의 옷인가 보소서 하매

33.아버지가 그것을 알아보고 이르되 내 아들의 옷이라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 먹었도다 요셉이 분명히 찢겼도다 하고

34.자기 옷을 찢고 굵은 베로 허리를 묶고 오래도록 그의 아들을 위하여 애통하니

35.그의 모든 자녀가 위로하되 그가 그 위로를 받지 아니하여 이르되 내가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 아들에게로 가리라 하고 그의 아버지가 그를 위하여 울었더라

36.그 미디안 사람들은 그를 애굽에서 바로의 신하 친위대장 보디발에게 팔았더라

 

<설교>

요셉을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아 버린 야곱의 아들들은 나중에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의 조상이 됩니다. 그런데 그들의 행동은 참으로 악할 뿐입니다. 야곱이 요셉을 편애하는 것으로 인해 시기가 있었다 하더라도 요셉이 꾼 꿈 내용 때문에 어린 동생인 요셉을 죽이기로 작정하였다가 급기야 상인들에게 돈을 받고 팔아 버린 것은 이스라엘 열 두 지파의 조상이라고 말하기가 부끄러울 정도의 악한 행위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인간의 역사라는 것을 성경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살인의 역사는 가인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가인의 살인도 하나님이 자신의 제사를 받지 않고 아벨의 제사만 받았다는 것에 대한 분노로 시작합니다. 이처럼 악이 반복되어 온 것이 인간의 역사이기 때문에 이 역사 안에서 ‘착하게 살자’라는 말은 선을 빙자한 악의 세력에 동조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착함이라는 윤리적 행동이 악하다는 것이 아니라 착한 행동을 했다는 것으로 자신이 죄의 세력으로부터 벗어난 것처럼 간주하는 것이 죄의 세력에 동조하는 것이 됩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믿는 민족이라고 해서 그 조상이 선하고 믿음 좋은 사람이었을 것이라는 기대는 헛된 것입니다. 인간은 애초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외면하고 선악과를 먹은 악으로부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요셉의 형들은 숫염소를 죽여 그 피를 요셉의 채색 옷에 묻혀 야곱에게 가져가 이 옷을 발견했는데 요셉의 옷인지 확인하라고 합니다. 요셉의 옷임을 확인한 야곱은 요셉이 짐승에게 잡아 먹혔다고 생각하고 자식들의 위로도 받지 않을 정도로 슬퍼하며 애통해 합니다. 야곱의 슬픔과 애통이 자신들의 짓이었음에도 야곱을 위로한 척 하는 야곱의 아들들을 보면 속임수로 이삭에게 축복을 받아낸 야곱의 과거를 보는 듯합니다.

 

 

어쨌든 야곱은 아들들의 악행과 속임수로 인해 슬픔과 절망을 경험합니다. 이것이 야곱 가정의 현실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하나님께 축복의 말씀을 들은 상태입니다. 35:11,12절에서도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한 백성과 백성들의 총회가 네게서 나오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준 땅을 네게 주고 내가 네 후손에게도 그 땅을 주리라”는 말씀으로 야곱을 축복하셨습니다.

 

 

그런데 축복에 대한 세상의 시각에서 야곱의 가정 문제를 보면 축복과는 전혀 거리가 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야곱이 처음에 기대했던 하나님의 축복은 지금의 기독교인들이 기대하는 축복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습니다. 재물의 부요, 자식의 성공, 가정의 화평과 평안, 이것이 세상이 기대하는 축복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야곱의 형편이 그러한 축복과는 전혀 상관없음을 생각한다면 하나님의 축복은 세상이 기대하는 것과는 분명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대개의 교회는 하나님의 참된 축복에 관심 두지 않습니다. 알고 싶어 하지도 않고 오히려 세상적 기준의 축복이 부인되는 것에 반발합니다. 그래서 교회 내에서도 잘 살고 자식이 잘되고 어려움이 없는 교인들이 믿음이 좋아 복 받은 것으로 인정되고 어려움에 처한 가정들은 마치 신앙생활에 문제가 있어서 하나님께 징계를 받은 것처럼 여김 받는 현실입니다.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세상이 생각하는 축복의 기준으로 따진다면 야곱보다 에서가 축복을 받았습니다. 에서의 족보가 말해주는 것처럼 에서의 자손은 크게 번성했으며 족장과 왕이 수없이 등장했습니다. 그런데 야곱의 족보는 형제들의 속임수와 악행으로 시작합니다. 요셉을 죽여서 꿈이 이루어지는 것을 막겠다는 하나님의 계시에 도전하는 교만도 드러냅니다. 이처럼 야곱의 족보는 인간의 악한 본성을 드러내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야곱은 하나님께 선택을 받았고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가정이 악행으로 가득한 모습으로 소개되고 이유가 무엇일까요? 성경은 인간의 악행을 감추지 않습니다. 악행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면서 우리에게 외치고자 하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악행을 행한 그들이 바로 성경 앞에 서 있는 우리 자신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죽는 순간까지 우리 속 밑바탕에 깔려 있어야 합니다.

 

 

요셉이 죽었다고 생각한 야곱은 깊은 절망을 느낍니다. 야곱의 절망과 슬픔에도 하나님은 침묵하십니다. 요셉이 죽지 않았음을 알게만 하셔도 야곱은 절망과 슬픔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 침묵하십니다. 침묵하시지만 가만히 계시지는 않습니다. 인간이 자기중심적인 선택과 슬픔과 애통과 고통 속에서 살아갈 때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이루십니다.

 

 

시 46:9-11절에 “그가 땅 끝까지 전쟁을 쉬게 하심이여 활을 꺾고 창을 끊으며 수레를 불사르시는도다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뭇 나라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내가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고 말합니다.

 

 

교회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말 중의 하나가 ‘하나님은 인간을 통해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기 위해 인간을 세우셨고 능력을 주셔서 일을 이루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인간을 통해 일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이루시며 인간은 도구로 사용될 뿐입니다. 인간의 악함까지 도구로 사용하시며 하나님의 선을 이루십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능력을 주셨다 해도 인간이 그 능력을 과연 하나님의 일을 위해 사용하겠습니까?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이 하나님이 허락하신 능력이라면 우리는 그 능력으로 자기를 위해 살아갈 뿐입니다. 오히려 주어진 것에 불평하며 더 큰 능력을 구합니다. 결국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을 위해 무엇인가 했다고 하지만 실상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존재일 뿐입니다. 즉 하나님이 가만히 있으라 하지 않아도 가만히 있었던 것이 인간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열 두 지파의 조상이 될 야곱의 아들들에게 남기고자 한 것도 그것입니다. 그들이 요셉을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고 야곱에게 죽었다고 거짓말 한 것으로 요셉과의 관계는 끝났다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요셉을 총리의 자리에 세우시고 야곱과 그 아들들을 애굽으로까지 오게 하시며 만나게 합니다. 그리고 요셉이 야곱 가족을 살리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배우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요셉이 팔려가고 야곱이 절망에 빠진 상황에서도 침묵하신 이유입니다.

 

 

우리는 절망과 슬픔의 상황에 처하면 자연히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기를 원합니다. 절망과 슬픔이 자신에게 어떤 유익으로 돌아올지 알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침묵하실 뿐입니다. 지금의 절망과 슬픔이 장차 갑절의 축복으로 돌아올 것이니까 인내하고 기다리라는 희망적인 말씀으로 응답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믿으며 인내할 뿐입니다.

 

 

절망과 슬픔이 언제까지 계속된다 해도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우리를 가르치시고 배우게 하시며 깨닫게 하시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배웠을 때, 그리고 하늘을 향한 소망이 견고해 졌을 때 사도 바울처럼 감옥이라는 고통과 절망의 처지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찬송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하심입니다.

 

 

때문에 세상이 우리의 생각과는 다르게 흘러간다 해도 분노할 필요가 없습니다. 악인이 성공하는 현실에서도 신자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믿을 뿐입니다. 왜냐하면 악인의 성공은 영원한 것이 아니며 참된 성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죄의 세력에 붙들려 있는 인간에게 성공은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만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이미 성공이라는 자리에 앉히셨습니다. 다만 연약한 우리가 늘 세상의 소리에 흔들리며 성공을 성공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절망과 슬픔에 주저앉을 뿐입니다. 이러한 우리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이끌어 가십니다. 그리고 순간순간 십자가에 피 흘리신 그리스도를 보게 하시며 내가 누구인가를 보게 하십니다. 요셉이 죽은 줄 알고 절망에 빠진 야곱이 요셉을 만나 기쁨의 눈물을 흘리게 되는 것처럼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기쁨의 눈물이 있게 하기 위해 하나님이 일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이 피난처시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육신의 문제로 힘든 일이 있고 아무리 기도해도 나아지는 것이 없어도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함께 하시고 일하시며 놀라운 배움이 열매로 맺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이 된다면 삶의 길은 견고할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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