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016.03.26 16:30

(93강) 요셉의 형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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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39:1-6http://onlycross.net/videos/gen/gen-390106.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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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요셉이 이끌려 애굽에 내려가매 바로의 신하 친위대장 애굽 사람 보디발이 그를 그리로 데려간 이스마엘 사람의 손에서 요셉을 사니라

2.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3.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4.요셉이 그의 주인에게 은혜를 입어 섬기매 그가 요셉을 가정 총무로 삼고 자기의 소유를 다 그의 손에 위탁하니

5.그가 요셉에게 자기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

6.주인이 그의 소유를 다 요셉의 손에 위탁하고 자기가 먹는 음식 외에는 간섭하지 아니하였더라 요셉은 용모가 빼어나고 아름다웠더라

 

 

<설교>

요셉이 애굽으로 끌려가 바로의 친위 대장인 보디발에게 팔립니다. 이러한 요셉에 대해 2절에서는 하나님이 요셉에게 함께 하심으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요셉이 처한 형편을 생각하면 요셉은 형통한 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요셉에게 함께 하셨고 그를 형통하게 하셨다면 당장 집으로 돌아가서 형들에게 복수하고 예전보다 더한 평안한 삶을 누렸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형통에 대한 보편적 이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요셉이 애굽에서 장차 어떤 지위에까지 오르게 되는가를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애굽의 총리가 되는 것을 요셉의 성공으로 규정하고 비록 타국에 종으로 팔린 기구한 운명이 되었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애굽의 총리가 되는 성공을 이루게 하셨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을 하나님이 형통하게 하신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자신 또한 그러한 형통이 있기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보디발은 요셉을 가정총무로 삼고 자신의 소유를 모두 요셉의 손에 맡깁니다. 이것을 보면 보디발이 요셉을 많이 신뢰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만 보면 비록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 종으로 팔렸다 해도 잘 된 일이라고 생각될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고난을 받긴 했지만 그래도 일이 잘 풀렸으니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도우셨고 형통한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의 본성입니다. 항상 현재만을 바라보면서 현재의 일이 잘되는 것에서 형통을 찾습니다. 현재의 형편이 어려워지고 힘들어지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늘 현재의 평안과 행복을 보장 받기를 원하고 그것을 형통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요셉은 결코 형통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인해서 그의 인생은 자신이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흘러갔습니다. 요셉이 꿈을 꾸게 된 것은 요셉이 원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하신 일입니다. 요셉의 의향을 물어 보고 요셉에게 허락을 받고 꿈으로 계시를 주신 것이 아닌 것입니다.

 

 

만약 요셉이 꿈을 꾸지 않았다면 야곱의 사랑을 독차지 한 것 때문에 형들의 시기를 받기는 했을지언정 요셉을 죽이려는 생각을 하고 상인에게 팔리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요셉이 고초를 겪는 것은 하나님으로 인해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요셉의 고난은 하나님의 함께 하심 때문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의 입장에서 보게 되면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고 했을 때 생각하게 되는 것은 나의 일을 도우시고 힘주셔서 모든 일이 잘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형통입니다. 하지만 요셉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인해서 그의 인생은 오히려 세상이 보기에 뒤틀렸을 뿐임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성경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만사형통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런 요소들이 우리를 하나님 앞에 원수로 나오게 할 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잘 먹고 잘사는 형통에 매어 하나님의 뜻은 외면하려고 하는 것이 우리 자신임을 알아야 합니다. 진심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세상에서의 형통을 추구하는 내 자신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아는 것이고 그런 자신을 보게 될 때 ‘나를 건지소서. 나를 도우소서’라는 절박한 기도가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우리는 믿음에 대한 감각을 잃고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세상을 보면서 형통을 꿈꾸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하나님의 원수된 것임을 생각하지 못하고 오히려 세상의 가진 자만큼 살아가지 못하는 자기 인생에 대한 불만으로 가득하니 말입니다. 다른 사람과의 경쟁에서 이기는 것을 목표로 삼고 살아가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자신으로 인해 애통해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절박함이 없는 이유가 믿음에 대한 감각을 상실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인간에게 만사형통은 없습니다. 굳이 말하자면 만사불통이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은 우리 인생을 하나님이 사용하신다는 뜻입니다. 애당초 나의 인생은 없습니다. 하나님께 저당 잡힌 인생이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실 뿐입니다. 그렇다면 내 뜻대로 되는 일은 없어도 모든 일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취될 것입니다. 이것이 형통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도, 이삭에게도, 야곱에게도 함께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서 우리가 생각하는 형통을 만날 수 없습니다. 야곱의 경우에는 오히려 그가 생각하지 않았던 전혀 다른 길로 끌려갔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야곱에게는 오히려 축복입니다. 왜냐하면 야곱이 기대한 하나님의 함께 하심에는 야곱의 욕망이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즉 야곱이 원한 하나님의 함께 하심은 멸망의 길이었을 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야곱을 붙드시고 가르치시면서 하나님의 참된 복을 알게 하십니다. 이것이 야곱에게는 만사형통이었습니다. 때문에 신자는 하나님의 함께 하심과 형통을 욕망을 채우기 위한 시각으로 접근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욕망을 채워주는 것이 형통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되는 형통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요셉을 통해서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을 애굽으로 보내시는 것은 요셉 한 사람을 통해서 다른 사람을 구원하기 위함입니다. 이것은 장차 야곱과 그의 아들들이 요셉으로 인해 구원 받는 것으로 드러나지만 보디발의 집에서도 요셉의 위치가 어떤 것인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5절에 보면 “그가 요셉에게 자기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고 말합니다.

 

 

보디발이 요셉을 신뢰하여 가정총무로 삼기는 했지만 그가 하나님을 믿은 것은 아닙니다. 3절에서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종으로 팔린 요셉의 삶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보았다는 뜻이지 보디발이 하나님을 믿게 되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보디발은 어디까지나 이방인일 뿐입니다. 그런데 그가 요셉에게 자기 집과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도록 위임 했을 때부터 하나님이 요셉을 위해 보디발의 집에 복을 내리셨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보디발의 집에 복을 내리시고 그로 인해 보디발의 소유가 번창하게 되었다 해도 그것이 요셉의 소유가 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왜 보디발의 집에 복을 내리신 것을 요셉을 위해서라고 말씀하는 것일까요?

 

 

보디발이 요셉에게 자기 집과 소유를 주관하게 한 때부터 복을 내리신 것은 복의 중심에 요셉이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보디발은 하나님을 알지 못한 자이고 따라서 복을 누릴 자격이 없습니다. 그런 그가 순전히 요셉 한 사람 때문에 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요셉을 위해 보디발에게 복을 주신 것은 보디발의 복으로 말미암아 요셉이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존재이며 복의 중심에 있음을 증거 하시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내용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복을 누리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복의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우리는 한 마디로 말해서 보디발과 같은 존재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그리스도가 함께 하심으로 우리의 의가 아닌 그리스도의 의로 인해 복을 누립니다. 이것이 요셉을 애굽으로 보낸 이유입니다.

 

 

따라서 요셉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요셉을 형통하게 하심으로 인해 그 혜택을 보디발이 누리고 있음을 생각한다면 복을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만 그리스도의 의로 복을 누리는 감사함으로 주께 나올 뿐입니다.

 

 

그러고 보면 믿음은 우리의 상식과 생각을 초월해 있음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상식과 생각으로 도무지 계산할 수 없고 접근할 수 없는 것이 믿음의 세계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서 하나님의 일을 깨닫게 될 때마다 나 자신이 무너짐을 경험하게 됩니다. 나의 모든 것이 완전히 무너지고 예수님의 의로우심만 부각되고 높임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복의 근원은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신자는 형통한 자입니다. 그런데 세상을 보면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형통한 자라는 기쁨을 잃어버립니다. 예수님의 의로우심이 우리의 모든 죄를 덮으셨다는 것으로 신자는 말할 수 없는 복의 세계에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복의 세계에서 예수님을 위해 살아가는 것은 예수님의 의로우심을 높이는 것입니다. 나의 의로움을 내세우고 내가 높임 받는 것이 아니라 애굽과 다를 바 없는 내가 그리스도의 의로우심에 의해 복을 누리고 있음을 감사하고 자랑하는 것이 예수님을 위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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