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016.04.02 16:44

(94강) 옥에 갇힌 요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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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39:19-23http://onlycross.net/videos/gen/gen-391923.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9.그의 주인이 자기 아내가 자기에게 이르기를 당신의 종이 내게 이같이 행하였다 하는 말을 듣고 심히 노한지라

20.이에 요셉의 주인이 그를 잡아 옥에 가두니 그 옥은 왕의 죄수를 가두는 곳이었더라 요셉이 옥에 갇혔으나

21.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간수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

22.간수장이 옥중 죄수를 다 요셉의 손에 맡기므로 그 제반 사무를 요셉이 처리하고

23.간수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살펴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

 

 

<설교>

신자는 믿음의 대상인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가에 초점을 두고 그 분이 가신 길로 자신이 순종되어 지기 위해 믿음이 주어졌음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이 말은 믿음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믿음의 대상이지 믿는 자가 아니란 뜻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기독교인들의 관심은 온통 믿는 자의 위치에 있는 자신에게로 향해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누구신가를 아는 것보다 하나님을 잘 믿어서 복을 받거나 자신의 일이 잘 되는 것에 더 관심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형통을 모든 일이 자기의 뜻대로 잘 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도 믿는 자인 자신에게 관심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 관심을 둔다면 형통의 의미는 나의 일이 아니라 예수님의 일이 잘 되는 것으로 이해하게 됩니다. 이것이 믿음에 의한 해석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이 요셉에게 함께 하시고 요셉을 형통하게 하셨다 하지만 요셉의 일이 잘 되는 것은 없습니다. 하지만 요셉을 애굽에 보내시고 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일은 단 하나의 오차도 없이 잘 되고 있습니다. 이것이 형통의 의미입니다.

 

 

보디발의 집에 팔린 요셉은 그 집의 가정총무가 됩니다.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서 보디발을 위해 성실히 일한 결과일 것입니다. 이것은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서 형들을 원망하고 신세 한탄만 하며 지내지 않았으며 요셉이 형들을 만났을 때 말한 것처럼 하나님이 애굽으로 보내신 것으로 알았기 때문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6절에 보면 요셉의 용모가 빼어나고 아름다웠다고 말합니다. 37장에 보면 요셉에 대한 이야기는 17세의 나이에서 시작합니다. 그렇게 보면 요셉이 애굽에 팔린 나이는 최소 17세 이상입니다. 또한 보디발의 집에 팔리자마자 가정 총무가 된 것이 아니라 몇 년 동안 일하며 신뢰를 얻었음을 가정한다면 가정 총무가 된 나이가 19세 아니면 20세로 추정할 수도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청년의 때였고 용모가 빼어나고 아름다웠기에 보디발 아내의 유혹을 받게 된 것입니다.

 

 

요셉은 보디발 아내의 유혹을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그의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창 39:9)는 말로 거절합니다.

 

 

보디발 아내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동침해 줄 것을 요구했고 요셉은 거절하면서 그와 함께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집에 아무도 없는 날에 보디발의 아내가 다시 요셉의 옷을 잡고 동침을 요구합니다. 요셉은 자기의 곳을 여인의 손에 버려두고 밖으로 나가 버렸지만 보디발의 아내가 집 사람들을 불러 요셉에게 누명을 씌웁니다. 요셉이 자신과 동침하려고 들어온 것을 소리를 질렀더니 옷을 버려두고 도망쳤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보디발이 돌아왔을 때 같은 말로 요셉에게 누명을 씌웠고 보디발은 노하여 요셉을 옥에 가두어 버린 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이처럼 보디발의 집에서 가정 총무로 지내던 요셉은 뜻하지 않게 누명을 쓰고 옥에 갇혔음에도 불구하고 23절에는 “간수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살펴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고 말합니다.

 

 

요셉이 보디발 아내의 유혹을 물리친 것은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보디발 아내의 유혹에서도 하나님께 죄를 지을 수 없음을 생각한 것입니다. 이것은 요셉이 하나님 편에 있었음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요셉이 누명을 쓰지 않도록 하나님이 지켜주셔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의 함께 하심, 형통은 그런 의미입니다. 하지만 요셉에게서 그러한 함께 하심과 형통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요셉이 옥에 갇혔지만 하나님이 간수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심으로 요셉이 옥중 죄수를 맡게 되고 제반 사무를 처리하게 된 것을 두고 하나님의 함께 하심, 도우심, 형통케 하신 것으로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비록 옥에서 죄수를 맡은 위치에 올랐다 해도 보디발의 집에서 가정 총무로 지내는 것이 나을 것이고, 보디발의 집에서 강정 총무로 지내는 것보다 애굽에 팔리지 않고 아버지의 집에서 편히 지내는 것이 더 나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정 총무가 되고, 옥에서 제반 사무를 맡았다는 것을 하나님이 형통하게 하신 것으로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요셉의 인생은 하나님께 붙들려 있습니다. 애굽으로 팔린 것도, 보디발의 집에서 가정 총무가 된 것도, 누명을 쓰고 옥에 갇히게 된 것도 그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이 뜻하신 일을 위해 요셉이 도구로 사용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요셉의 억울함보다는 요셉을 세워 일하시는 하나님께 생각이 집중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요셉에게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아무 잘못도 없고 하나님 편에 있던 요셉이 누명을 쓰고 옥에 갇히는 것에서 어떤 하나님의 일하심을 볼 수 있을까요?

 

 

시 105:17절을 보면 “그가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그의 발은 차꼬를 차고 그의 몸은 쇠사슬에 매였으니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고 말합니다.

 

 

시편에서는 요셉이 애굽에 종으로 팔린 것을 두고 하나님이 한 사람을 앞서 보내신 것으로 해석합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 그의 발은 차꼬를 차고 몸은 쇠사슬에 매였다고 합니다. 말씀이 응할 때까지는 말씀이 이루어질 때까지란 뜻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뜻한 일을 위해 한 사람의 인생은 철저히 도구로 사용되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항상 내 입장을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입장을 헤아려주시고 자신을 이해해주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믿음의 길로 가지 못할 때에도 그럴 수밖에 없는 입장을 내세우며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개인 사정을 위해 존재하시는 분이 아니고, 개인 사정 또한 듣지 않으십니다. 어쩌면 이러한 말에 반발하고 싶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자기 입장, 자기 사정은 모두 세상에 국한 된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들어 주셔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발에 차꼬를 차고 몸이 쇠사슬에 매인 것은 당시 노예나 죄인의 모습입니다. 요셉이 이스라엘 사람에게 팔리고 애굽으로 끌려갔을 때의 모습일 수 있고 옥에 갇혔을 때의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요셉의 죄가 아니라 요셉의 형들과 보디발 아내로 인한 것입니다.

 

 

요셉의 형들은 요셉을 시기하고 미워했습니다. 보디발의 아내는 요셉으로 자신의 욕망을 채우고자 했습니다. 이것은 그들만의 악함이 아니라 세상의 악함이기도 합니다. 결국 요셉은 세상의 악함으로 인해 종으로 팔리고 옥에 갇힌 것이며 이것이 바로 세상의 죄로 인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요셉의 형들과 보디발 아내의 죄가 세상의 죄의 속성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요셉을 애굽으로 먼저 보내신 것은 요셉 가족을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왜 굳이 요셉을 먼저 보내셔야 하는 것일까요?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었을 때 야곱이 거하는 가나안 땅에 기근이 들고 모든 가족이 애굽으로 오게 됩니다. 이것이 야곱 가족의 구원이라면 차라리 야곱이 거하는 땅에 기근이 들지 않게 하면 됩니다. 그렇다면 요셉이 먼저 애굽으로 가지 않아도 됩니다.

 

 

이것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예수님을 보내신 것이라면 굳이 예수님을 보내시지 않고도 우리를 구원하시고 천국에 들어가게 하실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원하는 형통입니다. 그런데 왜 굳이 예수님을 보내시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요셉을 세워서 야곱 가족으로 하여금 알게 하고자 하시는 것은 구원에 담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입니다. 그것을 자신들이 버린 요셉을 만나게 함으로 배우게 하시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손으로 버린 요셉이 없고, 기근도 없이 편하게 지낸 상태에서의 구원이라면 구원에 대한 감격이 없게 됩니다. 따라서 구원으로 인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해 감사와 찬송이 없게 됩니다. 우리의 구원에 십자가가 있어야 하는 이유도 같습니다.

 

 

롬 5장에 보면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고 말합니다. 죄가 드러나고 죄의 깊이를 알수록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는 더욱 크게 넘치게 됩니다. 은혜 앞에 우리는 할 말이 없게 되고 은혜만을 높이게 됩니다. 이것이 은혜가 왕 노릇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은혜가 왕 노릇 하게 되는 신자에게 세상의 일은 더욱 작아지게 됩니다. 반대로 은혜와 사랑은 더욱 커지며 세상 것으로 채워지기보다 은혜와 사랑으로 채워지고 넘치게 되기를 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한 사람을 보내신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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