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016.04.16 16:43

(96강) 바로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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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41:1-8http://onlycross.net/videos/gen/gen-410108.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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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만 이 년 후에 바로가 꿈을 꾼즉 자기가 나일 강 가에 서 있는데

2.보니 아름답고 살진 일곱 암소가 강 가에서 올라와 갈밭에서 뜯어먹고

3.그 뒤에 또 흉하고 파리한 다른 일곱 암소가 나일 강 가에서 올라와 그 소와 함께 나일 강 가에 서 있더니

4.그 흉하고 파리한 소가 그 아름답고 살진 일곱 소를 먹은지라 바로가 곧 깨었다가

5.다시 잠이 들어 꿈을 꾸니 한 줄기에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이 나오고

6.그 후에 또 가늘고 동풍에 마른 일곱 이삭이 나오더니

7.그 가는 일곱 이삭이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을 삼킨지라 바로가 깬즉 꿈이라

8.아침에 그의 마음이 번민하여 사람을 보내어 애굽의 점술가와 현인들을 모두 불러 그들에게 그의 꿈을 말하였으나 그것을 바로에게 해석하는 자가 없었더라

 

 

<설교>

술 맡은 관원과 떡 맡은 관원이 자신의 운명과 연관된 꿈을 꾸었지만 정작 꿈을 꾼 본인은 꿈을 해석하지 못하고 요셉이 해석하게 됩니다. 그리고 요셉의 꿈 해석대로 술 맡은 관원은 옥에서 나와 복직 되고 떡 맡은 관원은 죽게 됩니다. 분명 본인이 꿈을 꾸었고 본인의 운명을 보여주는 꿈이었지만 본인 스스로는 그 내용을 전혀 해석하지 못하고 하나님이 함께 하며 형통함 가운데 있던 요셉으로 인해 해석이 되었다는 것은 인간의 운명이 예수님이 없이는 결코 해석될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 밖에서 보는 인간과 예수 안에서 보는 인간의 운명은 절대 동일하지 않습니다. 예수 안에 있는 인간은 하나님께 속한 자로 존재하는데 하나님께 속했다는 것 자체가 현재의 모든 형편과 상황을 초월하여 복으로 간주되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술 맡은 관원의 꿈을 해석하며 “당신이 잘 되시거든 나를 생각하고 내게 은혜를 베풀어서 내 사정을 바로에게 아뢰어 이 집에서 나를 건져 주소서”(창 40:14)라고 당부했습니다. 하지만 복직이 된 관원은 요셉을 기억하지 못하고 잊어버립니다. 결국 요셉은 그렇게 잊혀진 채 이년의 세월이 흐릅니다.

 

 

술 맡은 관원이 요셉을 기억만 했어도 요셉의 옥중 생활은 일찍 끝났을 것입니다. 요셉 또한 술 맡은 관원이 옥에서 풀려날 때 그것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관원이 요셉을 잊으면서 요셉의 삶은 또 다시 요셉의 뜻과 상관없이 흘러가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뜻에 의해 요셉의 뜻은 덮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우리의 삶이기도 합니다.

 

 

요셉이 두 관원의 꿈을 해석하고 만 이년 후에 바로도 꿈을 꾸게 됩니다. 바로가 꿈으로 인해 마음이 번민하며 사람을 보내어 애굽의 점술가와 현인들을 모두 불러 그들에게 꿈을 말했지만 누구도 바로에게 해석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당시 점술가, 현인들은 꿈을 해석하는 전문가들입니다. 꿈을 해석하여 사람의 운명에 대해 말해주는 전문가들입니다. 그런데 누구도 바로의 꿈에 대해 해석을 하지 못한 것입니다.

 

 

바로의 꿈이 해석하기 어려웠기 때문일까요? 하지만 바로의 꿈을 보면 그렇게 어렵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바로의 꿈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아름답고 살진 암소가 강 가에서 올라와 갈밭에서 뜯어 먹는데, 그 뒤에 흉하고 파리한 다른 일곱 암소가 나일 강 가에서 올라와 아름답고 살진 일곱 소를 먹어 버린 것입니다.

 

 

이 꿈에서 아름답고 살진 암소는 쉽게 부요와 평화를 상징하는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흉하고 파리한 암소는 가난을 의미하는 것이고 가난이 풍요를 먹어 버리는 것으로 충분히 해석 가능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성경을 보면서 꿈을 내용을 알고 있기 때문에 쉽게 그런 생각이 가능하다고 할 수 있지만, 적어도 꿈 해석의 전문가들이라면 그러한 생각은 얼마든지 유추할 수 있다 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꿈도 다르지 않습니다. 바로가 다시 잠이 들어 두 번째 꿈을 꾸게 되는데 한 줄기에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이 나오고 그 후에 가늘고 동풍에 마른 일곱 이삭이 나와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을 삼켜 버린 것입니다. 이 꿈 역시 해석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렵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점술가와 현인들이 꿈을 해석하지 못한 것은 어쩌면 꿈 내용이 전혀 비상식적이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애굽은 강하고 강성한 나라였습니다. 그렇게 보면 아름답고 살진 암소를 애굽으로 생각할 수 있고 따라서 애굽이 흉하고 파리한 존재에 의해서 삼킨바 된다는 의미가 되는데 점술가와 현인들은 아마 그럴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아름답고 살진 암소가 흉하고 파리한 암소를 삼키는 것이 세상의 이치인데 바로의 꿈은 전혀 반대된 내용이기 때문에 해석하지 못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19절에 보면 “그 뒤에 또 약하고 심히 흉하고 파리한 일곱 암소가 올라오니 그같이 흉한 것들은 애굽 땅에서 내가 아직 보지 못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약하고 심히 흉하고 파리한 암소처럼 흉한 것은 바로가 애굽 땅에서 아직 보지 못한 것들입니다. 이것은 애굽이 그동안 부요 속에서 평안을 누리며 살아왔다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흉하고 파리한 일곱 암소의 모습을 애굽이 겪어야 할 일로 해석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꿈을 해석하지 못한 이유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요셉은 하나님이 작정하셨다면 크고 강성한 애굽이라 해도 흉하고 파리한 일곱 암소로 전락될 수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흉하고 파리한 암소, 즉 심한 기근으로 인해 애굽이 누리는 부요가 삼킨바 된다는 해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32절에 보면 “바로께서 꿈을 두 번 겹쳐 꾸신 것은 하나님이 이 일을 정하셨음이라 하나님이 속히 행하시리니”라고 말합니다.

 

 

요셉은 바로가 두 번 꿈꾼 것을 하나님이 그 일을 정하셨고 속히 행하신다는 계시로 받아들였습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일은 반드시 시행될 것이고 어떤 경우에도 중지되지 않음을 알았기에 요셉이 바로의 꿈에서 하나님이 애굽에 행하실 일을 해석하게 된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이 성경을 제대로 해석하지 못하는 이유도 다르지 않습니다. 일단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의 구원과 복을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때문에 하나님 또한 자기를 구원하고 복 주는 분으로 생각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성경에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원수를 심판하시고, 복이 아니라 저주로 갚으시는 내용을 대할 때 그것을 자신에게 말씀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겠습니까? 자신이 아닌 이스라엘처럼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을 배신한 자에 대한 내용으로 이해할 것입니다. 자신은 하나님을 대적한 적이 없고 하나님을 배신한 적도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성경을 도덕적 교훈으로 이해하는 이유도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도덕의 시각에서 생각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신자에게 기뻐하시는 것을 도덕적 삶의 실천으로 이해합니다. 그래서 성경이 말하는 사랑, 용서, 인내, 교만, 겸손 등의 모든 내용을 도덕을 배경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도덕이 심판을 이길 수 없습니다. 도덕이 우리에게 생명이 되지 못합니다. 물론 도덕무용론을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생명의 문제에서 도덕, 윤리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합니다. 구원 받았으니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말을 하기도 하지만 구원 받은 자의 관심은 도덕적 삶으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이 되신 그리스도께로 향하게 된다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바로에게 꿈을 통해서 애굽에 행하실 일을 계시하셨고, 누구도 해석하지 못한 하나님의 계시를 요셉이 해석하여 애굽의 운명을 드러냅니다. 요셉으로 인해 해석된 애굽의 운명은 칠년 풍년 뒤에 칠년 흉년이 있고, 흉년이 풍년을 삼킨다는 것입니다.

 

 

바로가 애굽을 다스리며 언제나 목적했던 것은 부요와 강성이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애굽을 다스리는 왕으로써 당연한 목표고 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목사가 목표로 하는 것, 꿈을 꾸는 것이 교회의 부흥인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바로는 그가 전혀 원하지 않고 생각지도 않았던 흉년이라는 애굽의 운명을 꿈꿉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일이고 속히 행해질 것입니다.

 

 

우리도 우리 인생에 대해 목표와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인생이 우리의 목표와 꿈대로 흘러가지 않습니다. 전혀 원하지 않는 일로 괴로움을 당하기도 합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그러한 일을 겪을 때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내가 왜 이런 괴로움을 당해야 하는가?’라는 반발이 있기 때문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일에 반발하는 것이고 결국 내가 하나님을 대적하는 원수라는 사실이 발각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대적하는 원수이기에 심판을 받고 무너진다 해도 항의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존재인가를 알게 되면 주어진 모든 일에 순종할 수밖에 없음을 아는 것입니다. 괴로움이 있고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 해도 그것이 당연한 하나님의 일임을 아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자가 성경을 제대로 해석하게 되고, 자신이 처한 형편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꿈을 가지고 하나님이 그 꿈을 이루어 주실 것을 믿으면 꿈대로 된다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이것이 성경을 사람의 입맛에 맞게 왜곡하여 해석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이 정하신 대로 흘러갑니다. 우리의 뜻과 계획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이 뜻하신 대로 흘러갑니다. 하나님의 뜻이 때로는 우리를 당황스럽게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가기에 두려움 없이 하나님께 맡길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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