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016.05.28 17:56

(101강) 요셉과 형제들의 만남(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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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42:24-28http://onlycross.net/videos/gen/gen-422428.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24.요셉이 그들을 떠나가서 울고 다시 돌아와서 그들과 말하다가 그들 중에서 시므온을 끌어내어 그들의 눈 앞에서 결박하고

25.명하여 곡물을 그 그릇에 채우게 하고 각 사람의 돈은 그의 자루에 도로 넣게 하고 또 길 양식을 그들에게 주게 하니 그대로 행하였더라

26.그들이 곡식을 나귀에 싣고 그 곳을 떠났더니

27.한 사람이 여관에서 나귀에게 먹이를 주려고 자루를 풀고 본즉 그 돈이 자루 아귀에 있는지라

28.그가 그 형제에게 말하되 내 돈을 도로 넣었도다 보라 자루 속에 있도다 이에 그들이 혼이 나서 떨며 서로 돌아보며 말하되 하나님이 어찌하여 이런 일을 우리에게 행하셨는가 하고

 

 

<설교>

성경은 세상의 문화와 가치관에 의해 구축되어 있는 우리의 보편적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본문의 내용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 형들에 의해 버림받고 애굽에 종으로 팔린 요셉이 기근으로 인해 곡식을 구하려고 애굽에 온 형들을 만나게 됩니다. 하지만 요셉은 형들에게 복수할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요셉이 인품이 좋아서가 아니라 자신이 버림받고 애굽에 종으로 팔리고 총리의 자리에 오르게 된 일의 배후에 하나님이 계심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형들이 애굽으로 오게 되고 자신을 만나게 된 일 또한 하나님이 작정하신 일임을 알았습니다. 때문에 비록 요셉이 형들에게 복수할 마음이 없다 해도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고 환대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요셉이 형들에게 정탐꾼이라는 혐의를 씌워 옥에 가둡니다. 그리고 사흘 후에 시므온만 옥에 남기고 모두 돌려보내면서 베냐민을 데려와야 살려주겠다고 합니다. 그로 인해 요셉의 형들은 자신들이 요셉의 일로 말미암아 범죄 하였음을 생각하게 됩니다.

 

 

애굽을 향해 갈 때는 기근에서 살아남기 위한 생존 문제가 전부였는데 요셉을 만나면서 자기들의 범죄를 생각하게 되고, 그로 인해 괴로움이 임하며 요셉의 핏값을 치르게 되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생존만을 생각하고 생존을 위해 사는 야곱과 그의 아들들을 하나님은 생명의 구원을 위한 방향으로 끌어가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서 증거 되는 하나님의 일하심은 생존을 위해 살아가는 인간에게는 이해될 수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만약 요셉이 형들을 정탐꾼이라는 혐의로 가두지 않고 곡식을 줘서 돌려보냈다면 생존을 위해 애굽에 온 야곱의 아들들은 생존의 문제를 해결하고 돌아간 것이 전부가 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일하심 또한 생존 문제를 해결해 주신 것에 초점을 두고 이해할 것입니다. 때문에 자신을 먼저 애굽으로 보낸 분이 하나님이심을 아는 요셉은 곡식만 주고 돌려보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삶과도 무관하지 않음을 생각한다면 하나님은 우리가 관심을 두고 있는 생존 문제를 도우시기 위해 일하시는 분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생존에 매달려 사는 우리의 삶에 간섭하시면서 생명의 구원으로 이끌어 가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주어진 어떤 형편에서도 ‘아니요’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고후 1:20절에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야곱 가문의 생명의 구원을 위해 일하신 것은 야곱이 하나님의 약속 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야곱이 주어진 모든 상황에서 하나님의 간섭과 함께 하심을 보게 되고 ‘아니요’가 아니라 ‘아멘’으로 받게 하심으로 영광 돌리는 길로 이끌어 가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잊지 않는다면 신자는 주어진 모든 형편들이 자기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에 마음을 두도록 몰아가시는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 보면 요셉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형들에게 한 가지 일을 더합니다. 그것은 곡물 값으로 받은 돈을 곡물 자루에 도로 넣어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여관에서 나귀에게 먹이를 주려고 하다가 알게 된 그들은 혼이 나서 떨며 서로 돌아보며 “하나님이 어찌하여 이런 일을 우리에게 행하셨는가”라고 탄식합니다. 돈이 곡물 자루에 도로 들어 있는 것을 보고 돈을 도둑질 한 것으로 오해 받을 것을 염려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면 요셉은 왜 돈을 도로 곡물 자루에 넣어 두었을까요? 돈을 도로 넣어 두었다면 그것은 곡물을 돈을 받지 않고 무상으로 준 것이 됩니다. 형들이기 때문에 차마 돈을 받을 수가 없어서 넣어 둔 것일까요? 그렇다면 그것은 요셉이 형들을 형제의 정으로 대한 것이 됩니다.

 

 

하지만 요셉과 형들의 만남은 인간적 관계에서는 이해될 수 없습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요셉은 모든 일이 야곱의 가문을 위한 하나님의 일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야곱의 아들들은 그러한 내막을 전혀 모르기 때문에 그들이 애굽에 오게 된 것이나, 애굽에 와서 총리인 요셉을 만나게 된 일들이 단순히 생존을 위해 곡물을 사고팔기 위함이 아닌 것을 알려주고 싶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돈을 도로 자루에 넣은 것으로 보여준 것입니다.

 

 

만약 요셉이 돈을 받았다면 곡식을 판 것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애초에 야곱의 아들들이 곡물을 사기 위해 애굽에 온 목적은 달성된 결과가 됩니다. 그리고 정탐꾼 누명을 쓰고 시므온이 옥에 갇히게 된 것은 단지 뜻하지 않게 발생한 불상사로 여겨질 것입니다.

 

 

하지만 요셉이 돈을 받지 않음으로 모든 상황의 의미가 달라집니다. 애굽의 아들들은 곡식을 사기 위해 애굽으로 왔지만 그것을 하나님이 밀어 붙이신 사건으로 알지 못했습니다. 기근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자연재해로 생각했고 애굽에만 곡식이 있는 것도 애굽이 부요한 나라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평소 세상일을 바라보는 시각입니다.

 

 

형제들은 자루에 돈이 도로 들어 있는 것을 보고 비로소 “하나님이 어찌하여 이런 일을 우리에게 행하셨는가”라고 말하게 됩니다. 이 말은 했다는 것은 이들이 자신들에게 주어진 상황을 하나님이 행하신 일로 생각하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돈이 자루에 없었다면 무심히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끝났을 일이 돈이 자루에 있음으로 해서 일을 행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요셉과 형제들의 만남은 생존에 필요한 곡식을 얻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만약 곡식을 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그것은 기근이 있을 때 야곱 가문의 생존에 필요한 곡식을 제공하기 위해 요셉을 애굽에 보내어 총리가 되게 한 것이 됩니다. 이것을 요셉이 알았기 때문에 형제들의 애굽 행이 생명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행하심인 것을 알게 하기 위해 돈을 받지 않은 것으로 해석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요셉에게서 볼 수 있는 것은 예수님입니다. 지금 야곱 가문과 하나님과의 관계에 요셉이 개입되어 있습니다. 요셉은 자신을 버린 형들의 범죄를 생각하기보다 애굽으로 보낸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고 그 뜻에 따라 행동합니다. 야곱 가문의 생명의 구원을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형들로 하여금 자기들의 범죄를 생각하게 하고 범죄에 대한 핏값을 치러야 함을 생각하게 합니다.

 

 

그리고 결국 애굽의 총리가 요셉이었음을 알게 되었을 때 요셉의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창 45:7,8)는 말에서 생명의 구원을 위해 간섭하시고 행하시는 하나님을 실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요셉에게서 우리는 예수님을 생각하게 돕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의해 버림 받으셨습니다. 우리들이 예수님을 버린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같은 범죄를 잊고 삽니다. 예수님을 버림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는 사실도 잊은 채 아예 예수님을 버린 일이 없는 것처럼 떳떳하게 살아갑니다.

 

 

형제들이 요셉 앞에 섰을 때 요셉이 자신들이 버린 동생임을 알지 못하고 다만 곡식을 얻을 총리로만 바라본 것처럼, 우리 또한 예수님을 찾고 예수님을 부르면서 그 분이 바로 내가 버려 버린 예수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나의 생존을 위해 도움을 받을 것만 생각하는 어리석은 자들일 뿐입니다.

 

 

때문에 우리의 생명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이 개입하지 않으시면 우리는 구원될 수 없는 자라는 사실이 분명해집니다. 우리는 날마다 생존에 매어 살아가지만 그런 우리의 관심을 생명으로 돌리시고 주어진 상황에서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행하신다는 것만큼 우리를 든든하게 하는 것이 없습니다. 생존을 도우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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